[읽기 어려운 책에 대한 어려운 리뷰]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1990년대, 어려운 책을 어렵게 읽었던 시대. 쉬운 책, 쉽게 읽히는 리뷰가 대세인 요즘, 도전정신 반 허세 반으로 붙잡았던 그 시절의 사상가들이 문득 떠오른다. 90년대 스타일을 간직한 번역가 이정인씨의 현대 사상가 리뷰를 연재할 예정이다.
글ㆍ사진 이정인
201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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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은 『역사유물론의 궤적 (1983)』이란 짧은 저작에서 “오늘 날 파리는 반동의 도시가 되었다”라고 일갈하며 프랑스에서 기원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맹공격했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테리 이글턴은 이 책에 대한 서평 ?마르크스주의ㆍ구조주의ㆍ탈구조주의 (1984)? (국역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수록)에서 이들 프렌치이데올로기에 대한 앤더슨의 비판이 상당부분 근거가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싸잡아서 비판하고 있는 바람에 그들이 제기한 정당한 문제의식들까지 묵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푸코와 데리다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이론들을 맹목적으로 깎아내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우월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앤더슨의 태도가 여성운동 같은 현실 운동을 부당하게 폄하하는 한계를 드러낸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푸코 앞에 푸코 없고 푸코 뒤에 푸코 없다

 

미셸 푸코는 쟈크 데리다와 함께 포스트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다. 데리다가 구조 내부에서 구조의 내적 불안정성을 폭로하면서 구조의 해체를 시도했다면, 푸코는 초역사적으로 보이는 담론 구조의 역사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형성시키는 힘의 관계를 추적하면서 현재의 삶 속에서 인간을 얽어매고 있는 것들을 폭로하려 했다.


흔히 푸코의 작업은 60년대의 고고학 시기와 70년대의 계보학 시기로 구분한다. 『광기의 역사 (1961)』와 『임상의학의 탄생 (1963)』, 『말과 사물 (1966)』 등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통해 초기 근대 담론의 역사성을 탐구하던 푸코는 68년 혁명 이후 담론을 넘어 그것을 생산하는 권력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니체에게 빌려온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한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칸트 이래 인식적ㆍ윤리적ㆍ미학적으로 자율적 주체로 인식되어 온 근대적 주체가 사실은 형벌과 감옥 같은 제도적 장치에 의해 규율을 내면화하며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성의 역사』 1권에서는 성과 욕망을 단지 억압된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ㆍ라캉 류의 정신분석학을 암묵적으로 비판하며 근대적인 성적 주체가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작업을 통해 푸코는 권력이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 소유되고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신체에 작용하는 미시적이고 생산적인 힘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푸코의 고고학은 이른바 “근대”를 새로운 눈으로 이해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우리가 대부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무수한 관념과 상식들이 실제로 불과 2, 3세기 전에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만들었다. 근대 ○○의 탄생, 또는 기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많은 저작들은 거의 모두 푸코의 고고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푸코의 권력이론이 끼친 영향은 더욱 컸다. 그것은 일상의 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고찰하게 만들었으며 은폐된 권력관계를 노출시키고 저항을 조직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글턴의 지적대로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를 무시할 경우, 70년대 이후 다양한 영역에서 등장한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등 저항 운동들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실제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여 온 여성주의와의 대화 불가능성은 이들이 아예 일상에서 권력관계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푸코의 아포리

 

하지만 푸코의 작업은 이미 당대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자유의 가능성도 부인하는 허무주의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근대 사회 자체가 원형감옥 같다면 누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푸코는 1978년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하버마스처럼 계몽이냐 아니냐 식으로 재단하는 태도는 이제 별 의미 없으며, 현실의 제약 조건들을 역사-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통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점에서 자신이 오히려 계몽의 비판 정신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자신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어디까지나 또 다른 형이상학을 가능케 하지 않는 비판의 구도와 방법으로서 정의한다.

 

푸코의 말처럼 그의 작업이 “우리가 속한 역사적 시대에 대해 끝없이 비판하려는 철학적 에토스를 영원히 재활성화”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집단적 투쟁을 통해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저항운동이 가능한 것인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푸코는 자신이 결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고 확신하는 절대적 낙관주의자라고 밝혔지만 여전히 저항을 개인화시킨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또한 근대적인 주체가 감옥, 군대, 학교, 공장과 같은 근대의 제도적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주체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낡은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 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류”라고 말했는데, 이는 아마도 계급이 폐절된 공산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강제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사회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해방된 인류를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푸코의 눈에는 이 “사회적 인류”란 것 또한 새로운 규율 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보장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권력관계라는 원형감옥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이 시지프스의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는 존재란 말인가? 아니, 해방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푸코의 작업에 대해 이러한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70년대 중반까지 이에 대한 답은 불분명했다. 국가나 정치와 같은 거시적인 영역은 푸코가 다루는 대상에서 조심스럽게 회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전, 영토, 인구』와 통치성


1976년 『성의 역사』 첫 번째 권이 출간된 이후 푸코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수행한 일련의 강의는 이런 비판들에 대한 푸코의 대응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1977~78년에 행해진 푸코의 강의록 『안전, 영토, 인구』는 개인의 신체에 가해지는 미시권력 분석에 치중해 온 푸코의 변화가 명확히 드러난 책이다.

 

푸코는 통치성이라는 특수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근대국가를 통치성의 효과로 분석한다. 그는 “통치”라는 말의 기원을 기독교가 유럽에 도입되면서 나타난 흔히 목자와 양떼로 비유되는 사목 권력으로 끌고 올라간다. 푸코에 따르면 목자는 양떼들을 “전체와 각자를 동시에” “전체적인 동시에 개별적으로” 주시해야 한다. 사목 권력의 통치개념으로부터 비롯하여 근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통치성이 발휘하고 있는 권력기술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사목 권력과 마찬가지로 전체와 개인을 동시에, 전체 속에서 개인을 예속화시키는 기술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푸코의 작업이 학교, 병원, 군대, 감옥, 가족 등 근대 권력 장치들을 통해 규율이 어떻게 개인의 신체에 아로새겨지는지를 분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 통치성과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어떻게 국가가 인구라는 전체를 보호하고 조절하는지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푸코의 강조점은 신체에서 인구로, 권력에서 통치성으로, 규율에서 생명관리정치로 이동한다. 근대국가의 역사는 통치성의 변화를 통해서 설명된다. 예컨대 푸코는 중상주의 시대에는 내치(행정관리)를 중심으로 통치성이 형성되었지만, 중농주의 이후 경제라는 자율적 영역이 등장하면서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성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70년대 후반 푸코의 작업은 미시권력과 근대국가의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작업으로 보인다. 실제로 『안전, 영토, 인구』의 말미에서 푸코는 “미시권력의 수준과 거대 권력의 수준 사이에는 절단과 같은 것이 없다는 것, … 미시권력에 관한 분석은 통치나 국가 같은 문제에 대한 분석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나게” 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시권력에 대한 저항과 국가와 같은 거대 권력에 대한 저항의 연결은 여전히 불완전하게 남은 듯하다. 푸코는 후에 “통치되는 자들의 권리”, “봉기에 의한 주체성의 도입” 같은 개념들을 고민했지만, 이들에 대해 깊이 있는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성의 역사』 2, 3권과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의를 통해 푸코는 이를 주체화의 문제로 해결하려는 듯 보인다. 이 저작들을 통해 푸코는 고대 그리스 문헌들을 통해 기독교 유입 이전의 주체화 방식을 탐구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기 배려”나 “자기 통치”를 통한 독립된 주체의 가능성을 개진한다.

 

그러나 통치성에 대해 스스로를 지속가능한 작품으로서 생산해야 한다는 주장은 또 다시 저항의 개인화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뿐만 아니라 결국 기독교 담론 분석에서 근대의 문제들을 도출하는 푸코의 방식은 서구중심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1984년 푸코는 자신이 던진 문제들을 완전히 풀지 못한 채 58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푸코 잊기는 가능한가?


시뮬라시옹 이론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1977년 『푸코 잊기』라는 책을 썼다. 그에 따르면 푸코의 권력이론은 미디어의 무한복제 시대에 이미 낡은 것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푸코를 잊어버릴 때라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는 잊혀 지지 않았다. 오히려 푸코가 드러낸 일상사회에서의 권력관계는 이제 부정하지 못할 현실이 되었다. 그것을 부정할 때 지난 수십 년 동안 푸코의 영향을 받은 여성주의나 다른 소수자 운동이 이뤄온 실천적 성과들을 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의 작업 역시 앤더슨이 바라듯이 오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배척할 수만은 없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고 그럼으로써 시드니에서 샌디에이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젊은 세대 급진주의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푸코이기 때문”이라는 테리 이글턴의 제기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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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영토, 인구 미셸 푸코 저/심세광,전혜리,조성은 공역 | 난장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는 사후 30여 년이 지난 푸코가 왜 이처럼 여전히 '동시대의 사상가'일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화제작이다. 푸코가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가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더불어 보편적 문제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푸코의 동시대성과 꾸준한 영향력을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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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사회활동 틈틈이 추리소설, 교양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정해진 원고 분량를 훌쩍 넘기며, 수많은 고유명사를 흩날리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말투가 경직되는 그는 진정한 90년대 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