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골치 아픈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나름대로 탑클래스 MC를 데려와서 토요일 프라임 타임에 배치한 프로그램이다. 몸개그와 황당무계한 미션들을 일삼는 야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데, 특유의 막 나가는 진행으로 매니아 층은 사로잡았으나 시청률이 그 컬트적인 인기에 따라주질 않는다. 멤버도 교체해보고 미션의 강도도 높여봤는데 시청률은 좀처럼 다시 오를 줄 모른다. 아무래도 다른 프로그램을 런칭해야 할 것 같아. 이미 예능국 상부에서 나름의 마음의 결정도 내렸고, 그 자리를 대체할 만한 다른 프로그램도 슬슬 준비될 무렵이었다. “제가 메인 PD로 연출을 맡아보고 싶습니다.” 입사 4년차, 서른 하나의 젊은 PD가 미련을 놓지 못했다. 어차피 폐지 이야기가 나오는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떨어지면 뭐 얼마나 더 떨어지겠어. 방송국은 프로그램에 마지막 기회를 줬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골칫덩어리 프로그램은 MBC <강력추천 토요일>의 코너 ‘무리한 도전’이었고 겁도 없이 메인 PD 자리에 간 입사 4년차 PD는 김태호 PD였다.
아무리 중구난방이 매력이라 해도 구심점이 없으면 망한다.
소와 줄다리기를 하고 동전 분류기와 동전세기 대결을 하던 ‘클래식’ 시절부터 10년 넘게 <무한도전>을 봐 왔던 하드코어 팬들이라면 아마 그 시절에도 <무한도전>은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같은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동의하는 바다. “박명수씨는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라는 외침, 어떤 도전을 해도 처절하게 망가지고 마는 멤버들의 몸부림, 그리고 그 모든 아수라장 속에서 표정의 미동 하나 없이 판정을 내려주는 박문기 심판의 조합은 지금 다시 봐도 유효한 조합이니까. 그러나 같은 콘셉트가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오며 점차 쇼를 봐야 하는 이유가 줄어들고 있었다. 무슨 도전을 해도 ? 매주 실패해 왔으니 이번 주에도 또 ? 실패할 게 자명해 보이는데 굳이 봐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그 와중에 쇼가 제대로 자리 잡히기도 전에 멤버 구성이 자꾸 바뀌니 쇼에 정을 붙이는 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야외녹화를 하는 게 맞는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야외에서 오합지졸 멤버들이 모여 도전을 핑계로 몸개그를 펼치고 망가지는 좌충우돌이 프로그램의 핵심인데 무슨 소리인가 싶은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만 하더라도 유재석은 지금과 같은 압도적 1인자가 아니었고, 체력 또한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해 녹화가 오래 지속되면 종종 현장 장악력을 잃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유재석은 MBC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KBS <일요일은 즐거워> ‘천하제일 외인구단’ 등 실외에서 하는 예능에서의 성취보단 SBS <진실게임>, KBS <해피투게더>, MBC <놀러와> 등 실내 예능에서의 성취가 압도적으로 높은 MC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좌충우돌 하다가도 필요할 땐 구심점을 중심으로 상황이 정리가 되어야 프로그램에 고유의 리듬이 생기는데, 구심점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선 좌충우돌만 반복되니 쇼에 리듬을 주는 게 불가능했다. 그나마 캐릭터 구축이나 멤버 간의 화학 작용이라도 제대로 이뤄지면 모르겠는데, 당시 ‘무리한 도전’은 시청률 때문에 멤버를 넣었다 뺐다 게스트를 불렀다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멤버가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하며 매주 종목을 바꾸던 시절의 ‘무리한 도전’.
진득하게 호흡을 맞추며 서사를 쌓아 가는 것이 어려운 구조였다.
<강력추천 토요일 - 무리한 도전> ⓒMBC. 2005
기초체력을 다질 때까지는, 지붕과 벽이 있는 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무리한 도전’은 보다 적극적이고 냉정하게 쇼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쇼의 규모를 줄여 새로운 것을 시도함과 동시에 멤버를 확정하고 화학작용이 완성될 때까지 캐릭터 구축에 집중하며, 무엇보다 쇼에 응집력을 불어넣는 게 절실했다. 2005년 12월, ‘무리한 도전’은 ‘환골탈태’를 선언하며 그간 하던 육체적 도전을 싹 다 내려놓았다. 여의도 MBC 사옥 앞마당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 ‘이제는 몸이 아니라 두뇌 도전’이라며 끝말잇기의 수많은 변종 중 하나였던 ‘거꾸로 말해요 아하’를 시작했고, 세트가 마련되자 마자 바로 실내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잦은 멤버 교체는 사라지고, 천천히 오래오래 함께 할 멤버들 위주로 팀이 재편되기 시작했다. 조혜련, 김성수가 나가고 차례차례 하하와 정준하가 들어왔으며, 마지막 순간 이윤석이 프로그램을 떠나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6인 체제가 완성됐다. ‘무리한 도전’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퀴즈를 풀고 끝말잇기를 하고 멤버들 중 누가 제일 이상하게 생겼는지 앙케이트 조사를 벌이고 어린 시절 생활기록부를 공개하며 세트 안에서 버텼다. 세트 생활은 그 다음 해 5월 <무한도전>이란 이름으로 단독 편성이 되어 첫 에피소드로 미셸 위 특집을 할 때까지 5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렇게 기초체력을 다지고 캐릭터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난 뒤에야, 매번 다른 포맷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으로 다시 재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과격한 변화. ‘무리한 도전’은 에너지를 분산할 만한 요소들을 다 쳐내고 제한된 공간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메인 MC가 프로그램을 통제하기 더 편한 환경을 만들어 줬다. 변덕스러운 날씨, 매주 바뀌던 도전해야 할 상대와 종목 등 신경 써야 할 요소가 줄어들자, 실내에 더 강점을 보이던 MC 유재석 또한 전보다 더 여유 있게 농담을 던지고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체력소모가 극심한 육체적 도전 대신 매주 같은 말장난이나 캐릭터 겨루기를 해 보일 수 있는 퀴즈 류로 방향을 바꾼 것 또한 주효했다. 지식을 겨룬다는 콘셉트는 몸을 안 쓰고도 기존의 ‘무리한 도전’이 유지하던 기조인 ‘오합지졸물’을 자연스레 승계할 수 있게 해줬고, 같은 종목을 계속 함으로써 변수가 줄어들자 캐릭터를 잡고 멤버 간의 역학관계를 꾸려가는 것도 전보다 수월해진 것이다.
‘무리한 도전’이 서서히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찾아가던 시기.
이윤석이 하차하고 정준하가 합류하며 흔히 이야기하는 6인 체제가 완성됐다.
<강력추천 토요일 - 무리한 도전> ⓒMBC. 2006
냉정하게 판단하라. 당신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전장은 어디인가?
세상에는 처음부터 성과를 내는 종류의 기획이나 프로그램도 존재하지만, 이렇게 시행착오 끝에 극적으로 부활하는 기획도 존재한다. 첫 기획 단계의 초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대로 승부를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든다면 이처럼 과감하게 자신이 유리한 필드로 이동해 싸움의 양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온다. 마치 ‘무리한 도전’이 호흡을 가다듬고 쇼 전체의 모양새를 다시 설계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지붕과 벽이 있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지금 난항을 겪고 있는 당신이라면, 잠시 멈춰 서서 냉정하게 계산해보라. 당신이 어드밴티지를 쥘 수 있는 전장은 어디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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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감귤
2016.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