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무너질 때 나만 살아남는다면, 다행일까 불행일까. 살아남은 기쁨은 하루 이틀이면 수명을 다할 것이다. 내 생활이 결코 예전의 수준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돈만 지불하면 얻을 수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내 육체노동의 양에 정비례한 만큼만 생활이 가능해진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나 자신의 노력만으로 지탱되어 온 게 아니란 사실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행운이 될 수 없다.
마르셀 서루의 <먼 북쪽>은 인간의 문명이 무너져 내린 후 홀로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다. 이상기후로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은 시베리아 극북지역만 남게 되고, 사람들은 좁은 땅덩이에 몰려들어 서로를 죽였다. 주인공 ‘메이크피스’는 마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시민이자 도시의 보안관이다. 홀로 살아남은 것은 결코 행운이 될 수 없을 것인데, 그는 낙담하거나 투정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혹한에도 직접 만든 총알과 두 자루의 권총을 챙겨 매일 아침 도시를 순찰하고, 양배추와 사과도 저장해 놓고, 필요하면 멀리 사냥도 나선다. 묵묵히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 읽는 내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데, 어떤 긴박한 순간에도 담담한 어조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메이크피스의 진짜 내면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그는 가족과 살던 집에 그대로 산다. 아버지가 삼나무로 지은 욕실은 여전히 좋은 향으로 유혹하고, 어머니가 남긴 자동피아노는 조율도 못하면서 아껴두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을에 나타난 중국인 아이를 집 안으로 들여 이제는 없는 동생의 옷을 입힌다. 사람이 그립고, 따뜻했던 과거의 기억을 잊을 수 없는 것 같다. 마침내 마을을 떠나는 것도, 어느 날 날아온 비행기를 보고 나서다. 비행기가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사람들, 그것도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문명을 보존한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니까. 그들을 만난다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일까, 메이크피스는 마을을 떠나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한다.
메이크피스의 여정이 시작되면서 소설도 본 궤도에 오르게 되는데,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하는 것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했다. “이 소설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이야기가 점점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므로 미리 내용을 알게 되면 재미가 떨어진다”라고. 실제로 그렇다. 표지 때문인지, 읽는 내내 새하얀 설원이 눈 앞에 펼쳐지리라 기대했는데, 마지막까지 눈을 완전히 가리고 읽는 것 같았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주인공의 담담한 목소리만 따라 읽는 ‘절정의 적막감’이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이다.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메이크피스는 당연히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선함은 시대가 허락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무너져 내린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한 눈망울만은 그대로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다. 메이크피스처럼, 누구나 예전의 풍족한 삶을 그리워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이 힘들게 살아갈까? “따뜻한 식사 한 끼만으로도 기꺼이 타인을 죽이려 드는”게 인간이다. 쥐꼬리라도 닥치고 빼앗아 모으면 소꼬리 정도는 될텐데, 얌전히 제 쥐꼬리들만 먹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면 메이크피스의 여정은 절망의 여정이 되는 것일까. 글쎄다.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미친 듯이 기이하고 기묘하게 희망적이다”라는 평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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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쪽마르셀 서루 저,무라카미 하루키 편/조영학 역 | 사월의책
혹자는 “또 다른 1Q84”라고 했고, 혹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시고니 위버 주연의 영화 같다”고 했다. 또 누구는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와 비견될 작품이라고도 했다. 『먼 북쪽』은 근미래 소설로 종말 이후의 황폐한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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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