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부탁
세상에서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위안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지루한 수업시간은 도무지 갈 생각 없이 느리게 흐르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쉬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 빠르게 흘러간다. 연인과의 이별 후에 그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고 상처를 입지만, 결국 그 시간이 다시 상처를 치유해준다. 이렇듯 시간은 참으로 기묘하고 특별하다.
연극 <시간을 파는 상점>은 시간을 매우 특별하게 사용하는 여고생이 등장한다. 주인공 온조는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걸 좋아해 오지랖이 넓다는 핀잔을 듣곤 하는 발랄한 여고생이다. 소방관이었던 아버지를 쏙 빼 닮아 심성이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온조는 사실 아주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는 것! 온조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라는 닉네임으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다양한 사람들의 의뢰를 들어준다. 좋아하는 가수의 팬티를 훔쳐달라는 황당한 의뢰부터 자기 대신 몇 년째 떨어져 지내는 할아버지와 식사를 해달라는 가슴 따뜻한 의뢰까지, 다양한 의뢰를 받으면서 온조의 카페는 활발히 운영된다.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던 어느 날, 온조의 정체를 알고 있는 네곁에라는 의뢰인이 나타나고 네곁에는 온조의 학교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과 관련된 의뢰를 한다. 자신이 정체가 알려진 것도, 복잡한 사건에 연루된 것도 혼란스러운 온조 앞에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과연 온조는 무사히 의뢰를 해결하고 '시간을 파는 상점'을 이전처럼 운영할 수 있을까?
시간의 의미
연극 <시간을 파는 상점>은 동명의 청소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책 <시간을 파는 상점>은 자음과 모음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김선영 작가의 소설로, 시간이라는 평범한 주제를 추리 소설의 기법을 빌려 흥미롭고 흡인력 있게 서술해나간다. 연극은 소설의 큰 줄거리를 그대로 무대 위에 옮겨놓았다. 탄탄한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하기에 연극의 스토리 역시 탄탄하다. 하지만 1시간 남짓한 연극 무대에 소설의 모든 내용을 담아 낼 수는 없기에 연결성이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존재한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여 웃음을 만들어 내고 집중력을 극대화 시키는 등 연극만의 매력을 잘 살렸지만, 연극 중반에는 그 집중력이 다소 떨어진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자연스러운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맥이 끊긴다. 급하게 마무리 되는 느낌에 영 찝찝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스토리 라인을 조금 각색하여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개연성을 극대화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연극 <시간을 파는 상점>은 관객들이 온조와 함께 호흡하며 '시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시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온조는 다양한 의뢰를 해결해 나갈 때 마다 자신의 시간이 허투로 쓰이지 않도록 노력한다. 다양한 의뢰를 성공 할 수록 자신에게 시간을 빌려달라고 의뢰한 이들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은조를 바라보는 관객들 역시 시간의 소중함과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된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이렇듯 시간이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 안에 숨겨진 마법 같은 비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연극을 보고 나서 문득 내가 온조에게 시간을 판 게 아닌 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더 큰 보람을 얻었던 온조처럼, 나 역시 온조에게 시간을 팔고 또 다른 보람과 깨달음을 얻게 됐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한 시간 남짓한 그 시간이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여고생 온조의 '시간을 파는 상점'은 다음달 1일까지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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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빈
현실과 몽상 그 중간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