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침묵』 과 한국 추리소설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추리소설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Howmystery.com 사이트를 만든 게 1999년이다. 2,000명이라고도 하고 2,500명이라고도 하는 한국 추리 소설 팬 숫자가 크게 늘길 바란 건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일용할 읽을 거리가 있길 기원한다.
글ㆍ사진 윤영천(예스24 e연재 팀장)
2016.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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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가을까지 영어권 주요 미스터리 상들의 시상이 끝나면, 일어권 작품들의 시상이 시작된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등 일본 주요 미스터리 상들은 대부분 잡지 형태로 연말과 연초에 발표된다. 이런 상들은 매년 500여 명의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든든한 받침대가 된다. 창작의 선순환이 가능하기에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대중소설의 스타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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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미스터리 시장의 전성기가 있었다. 70, 80년대 문고본의 인기는 미스터리 소설 시장의 밑거름이 됐고 대형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스포츠 신문을 비롯해 등단의 계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90년대 초부터 기세가 수그러들더니 곧 기나긴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 가장 컸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2000년대 초 무렵에야 다시 시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전 세계의 작품이 번역 출간되는 활발한 시장이지만, 창작은 여전히 어둡다. 2015년 현재, 국내에서 미스터리 분야만을 다루는 정기적인 상은 계간지 『계간 미스터리』의 신인상뿐이다. 그것도 단편만 뽑는다. ‘웹춘문예’라 불릴 정도로 활발하게 공모전이 개최되는 온라인 플랫폼 사정은 의외로 더 혹독해서, 미스터리 장르가 아예 소외돼 있다.

 

국내에서 미스터리 창작은 고행에 가깝다. 애착을 넘어선 집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시스템이 마땅치 않기에 실력은 물론이고 반드시 행운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미스터리를 쓰는 새로운 작가들은 조금씩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그동안 소개된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자들을 자극해왔고, 미스터리 소설은 2차 상품으로 신속하게 확장될 수 있는 효율적인 원천 콘텐츠로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백조의 침묵』은 2014년 전자출판대상 작가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대상 수상작에 이어 두 번째로 종이책으로 출간됐다. 이 작품이 눈에 띄는 이유는 ‘발레’라는 소재의 독특함도 있지만, 현대를 배경으로 한 평범한 미스터리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릴러 구조도 아니고, 역사적 소재에 기대지도 않았고, 판타지적인 설정도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현대에 일어난 사건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극히) 평범한 미스터리 소설은 국내 시장에서 가장 보기 드물다.

 

국립발레단의 천재 발레리노 강효일이 자살한다. 지그프리트 역을 맡은 효일은 한 달 전 <백조의 호수> 리허설에서 무대 아래로 떨어져 발목과 척추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유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미 암으로 아내를 잃은 효일의 아버지 동운과 여동생 상아는 큰 슬픔에 빠진다. 오빠의 죽음을 아버지 탓으로 생각한 상아는 집을 나가버리고 가족은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든다. 그러던 중 동운에게 빨간 봉투 하나가 배송된다. 봉투 안에는 효일의 부상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고의였음을 가리키는 증거가 들어 있었다. 무대 사고의 진상을 알게 된 동운은 자연스럽게 용의자를 떠올린다. 바로 그날, 효일의 부상으로 지그프리트 역을 대신 맡은 이한빛이 자택에서 살해된다. 

 

이야기는 관련된 다섯 명을 화자로 하여 전개된다.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에 천착하는 서술 방식이기에, 독자는 그들의 심리와 인지를 통해서 사건을 이해하고 수수께끼를 더듬는다. 『백조의 침묵』은 안정적이다. 동기의 간절함이 그렇고, 잘 읽히는 가독성이 그렇다. 아쉬운 점은 결말까지 줄곧 기대에 맞는 전개를 보여줄 뿐 그 기대를 뒤집지는 못한다.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있어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쉽다. 발로 조사하지 않은 텍스트는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좋은 미스터리 소설이다. 좋은 미스터리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수수께끼에 맞설 기회를 준다. 동운이 마주한 광경을 독자도 함께 바라본다. 거기에 수수께끼를 해명할 단서가 있다.

 

‘한국에도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가 나올 수 있을까?’ 나는 항상 ‘어렵다’라고 답한다. 한국의 미스터리 작가는 최고의 번역서에 익숙해진 독자들과 상업성으로 주저하는 출판사와 마땅히 등단할 기회가 없는 시스템이라는 삼중고에 둘러싸여 있다. 악순환인 셈이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은 있다. 숨어 있는 작품들을 끌어올려 드러내는 것. 이 글을 쓴 이유도 그러하다.

 

 

  

한국 추리소설 걸작선 1, 2

김내성 등저 | 한스미디어

1983년에 창립한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엮은 단편집. 1937년부터 2012년, 김내성부터 홍성호까지, 근 75년에 걸친 44편의 단편을 한데 모았다. 한국 추리소설의 과거와 미래를 살피려는 독자들에게 가장 체계적이며, 또 부담 없는 작품집이다.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추리소설의 영역이 매우 방대함을 알 수 있다.

 

 

 

 

 

 

눈사자와 여름

하지은 저 | 새파란상상

<얼음나무의 숲> 이후 독특한 세계관과 몽환적인 분위기로 열혈 독자층을 거느린 작가로 성장한 하지은의 2015년 작품. 기존 작품의 무게를 덜어내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낸 추리극이다. 가상 도시 그레이힐에서 일어난 대문호의 죽음 그리고 사라진 원고. 이 수수께끼를 푸는 등장인물들의 로맨틱한 화학 반응이 매력적이다.

 

 

 

 

 

 

유랑화사 1, 2, 3, 4

정연 저/R.알니람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

네이버 웹소설 챌린지리그에 연재되다가 영상출판미디어의 노블엔진팝 대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작품. 화사한 일러스트와 인기 성우를 기용한 오디오 CD 등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동양적인 세계관, 그림을 그리는 화사와 여우소녀. 익숙한 기담과 괴담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

 

 

 

 

 

 

[연속 기사]

 

- 『산산이 부서진 남자』 스릴러란 무엇인가?

- 『모방살의』, 미스터리 소설의 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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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천(예스24 e연재 팀장)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추리소설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Howmystery.com 사이트를 만든 게 1999년이다. 2,000명이라고도 하고 2,500명이라고도 하는 한국 추리소설 팬 숫자가 크게 늘길 바란 건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일용할 읽을거리가 있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