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작곡가 라벨(1875~1937)은 아주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합니다. 마흔 살 때였습니다. 1914년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듬해에 군에 입대했던 것이지요. 사실 그는 스무 살 때도 입영 대상자가 됐던 적이 있었지만, 작은 키와 건강상의 문제로 면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흔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또 다시 입영을 열망합니다. 라벨이 특별히 군대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1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반적 분위기였다고 해야겠습니다. 입대를 피하기는 커녕 어떻게든 군에 가서 총을 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당시 대다수의 남자들은 의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재력이나 권력을 등에 엎고 군대를 빠져보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행동을 매우 부끄러운 짓으로, 다시 말해 씻기 어려운 불명예로 여겼던 것이지요.
라벨은 처음에 육군을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공군 운전병으로 참전했습니다. 1차세계대전의 격전지로 유명한 베르됭 지역에서 복무했는데, 이곳은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치열한 접전으로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지역이지요. 라벨은 이곳과 후방을 트럭으로 오가면서 부상병을 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한데 애초부터 몸이 약했던 그는 1916년에 건강에 이상이 생겨, 다시 말해 설사병과 동상 등에 시달리다가 얼마간의 병원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제대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아마 전장에서의 극심한 육체적 어려움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아닌가 짐작됩니다. 100만 명 넘는 병사들이 희생됐던 ‘베르됭 전투’는 바로 1916년 2월부터 거의 1년에 걸쳐 벌어졌지요. 제가 라벨의 <볼레로>를 설명하는 글에서도 썼듯이, 작은 물건 애호가였던 예민한 심성의 라벨, 유난히 키가 작았던 데다 결벽증에 가까운 정리벽까지 있었던 그가 전쟁터에서의 끔찍한 나날들을 견뎌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그렇게 제대한 직후에 라벨은 또 한번 커다란 상실을 겪지요.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역시도 <볼레로>를 설명하는 글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인데, 라벨은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강한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라벨이 마흔 두 살이었을 때 어머니 마리 들루아르가 세상을 떴다고 설명했지요. 그때가 바로 라벨이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습니다. 굉장히 상심이 컸겠지요. 군에서 부상병을 운송하면서 목격했던 숱한 주검들, 그리고 이어진 어머니와의 이별은 라벨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이 시기에 완성했던 음악이 <쿠프랭의 무덤>이라는 피아노곡이지요. 전쟁 중에 작곡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제대 후에야 마무리한 곡입니다. 전부 6개 악장으로 이뤄진 곡인데 전쟁터에서 세상을 떠난 병사들에게 헌정했지요. 아울러 어머니의 죽음이 오버랩되는 곡이기도 합니다. 한데 라벨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도 컸는지 이 곡을 완성한 이후, 약 3년간 펜을 들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살아온 파리를 떠나 도시 외곽으로 이사를 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지요. 생 클레에 잠시 거주하다가 1920년 몽포르 라모리로 이사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자, 그런데 라벨이 마흔 살의 나이로 참전했던 1차세계대전은 유럽의 문화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미국의 영향력이 급부상했다는 점이지요.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주로 유럽 문화를 받아들이는 ‘수입국’의 입장이었습니다. 거의 전적인 수입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악에서도 당연히 그랬지요. 예컨대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이 미국 뉴욕의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된 것은 1892년의 일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은 그곳에 약 3년간 머물렀고, 그 기간에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와 현악4중주곡 ‘아메리카’ 등을 작곡했지요. 또 구스타프 말러가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활약한 시기는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 해 전이었습니다. 그밖에도 미국은 유럽 지역의 많은 음악가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여 순회 연주회를 열거나 지휘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 이후 양상이 달라집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일방적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이지요. 1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부터 미국의 문화가 유럽에 속속 상륙하기 시작합니다. 그 유입은 약 20년에 걸쳐 계속되는데, 주로 미국의 대중적 문화상품들이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귀족이 없는 나라, 물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럽처럼 지배계급으로서의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지는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이 사회의 중심을 이뤘고, 그들이 주도했던 문화는 유럽과 달리 이른바 ‘대중문화’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대중문화는 당연히 ‘기술복제’라는 테크놀로지에 의존하지요. 오늘날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의 미국은 대량생산을 위한 기술적 발전이 가장 빠른 나라였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기반 위에서 미국의 영화와 음악(음반), 만화 등이 유럽으로 속속 유입됩니다. 월트 디즈니가 만들어낸 귀여운 생쥐 캐릭터 ‘미키 마우스’도 바로 이 시기에, 그러니까 1920년대 후반에 탄생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기억나는지요?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제작된 <미키 마우스>를 보노라면 율동감 있는 배경음악이 계속 이어지면서 코믹한 상황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음악, 영화 <미키 마우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악이 바로 재즈(Jazz)입니다. ‘아프로-아메리칸’으로 불리는 미국 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 특유의 5음계와 엇박자, 당김음 등으로 맛깔스러운 리듬을 구사하는 재즈가 드디어 유럽 대륙에 상륙합니다. 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도 재즈를 가장 열렬히 받아들인, 문을 활짝 열고 수용한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물론 당시에 유행했던 재즈는 흥겨운 리듬으로 대변되는 ‘스윙’(Swing)이었겠지요. 마일스 데이비스를 위시로 한 일군의 뮤지션들이 보다 예술성 넘치는 감각으로 구사했던 ‘모던 재즈’는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습니다. 그것은 1960년대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라벨은 바로 이 재즈의 어법을 자신의 음악 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태도는 그가 스페인풍의 음악을 구사했던 것과도 오버랩됩니다. 물론 스페인 풍은 태생적 감각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라벨은 스페인과 국경을 맞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시부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가계는 프랑스보다 스페인에 가까운 혈통이었습니다. 스페인적 유전자가 이미 몸 속 어딘가에 자리해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재즈는 그와 다른 경로로 라벨의 머릿속에 들어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한동안 침통한 기간을 보내고 다시 펜을 들었을 때, 미국에서 유입된 재즈가 프랑스에 한창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음악은 라벨의 귀에도 신선하게 들렸을 겁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유럽의 음악가들이 새로운 음악 언어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라벨은 1927년에 재즈의 본향인 미국을 여행할 기회를 갖게 되지요. 여러 도시를 돌며 순회 연주를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재즈와 좀더 밀접하게 접촉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라벨은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거의 동시에 작곡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는 1차세계대전에서 오른손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1887~1961)을 위해 작곡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였고, 또 하나는 <피아노 협주곡 G장조>였습니다. 두 곡 모두 1929년부터 작곡을 시작했는데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1930년에 한 발 먼저 완성됩니다.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이듬해인 1931년 완성했지요.
라벨은 1930년 이후에 딱 세 곡의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이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이 바로 거기에 포함되는 말년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곡 중에 더 자주 연주되는 음악은 <피아노 협주곡 G장조>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왼손’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조금 덜 연주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는 ‘쌍둥이’처럼 같은 시기에 작곡된 두 곡을 함께 언급하려 합니다. 두 곡 모두 연주시간이 20분 내외로 비교적 짧을 뿐 아니라, 라벨이 말년에 적잖은 흥미를 느꼈던 재즈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는 음악들입니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D장조>는 중단 없이 계속되는 단악장의 협주곡이지요. 느리게 시작해서 중반에 빨라졌다가 다시 느린 템포로 돌아오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관현악이 어둡고 무거운 도입부를 연주하는데, 특히 콘트라베이스와 콘트라파곳이 한없이 가라앉는 저음을 연주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이어서 금관과 팀파니가 한 차례 작열한 다음, 드디어 피아노 솔로가 무겁고 비통한 느낌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왼손’만으로 펼쳐내는 기교와 힘이 대단한 음악입니다. 중반부에 들어서면 음악은 서정적으로, 잔잔한 물결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재즈풍이 등장하지요. 듣다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라벨은 이에 대해 “전통적인 스타일로 작곡된 부분이 일단락되면, 분위기가 일변해 재즈 음악이 시작된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엇박자로 비틀거리는 듯한 재즈적 리듬은 이후에도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과 달리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입니다. 라벨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협주곡이다. 협주곡은 화려하고 경쾌해야 한다. 심오함을 열망하거나 극적 효과를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답게 1악장에 ‘알레그라멘테’(allegramente, 즐겁게 또는 쾌활하게)라는 지시가 붙어 있습니다. 경쾌하고 율동감 넘치는 악구로 문을 엽니다. 피콜로와 피아노가 어울려 새가 지저귀면서 날아가는 듯한 음형을 연주하지요. 2악장은 ‘아다지오 아사이’(adagio assai)로 매우 느린 템포의 서정적인 악장, 특히 마지막에서 꺼질 듯이 사라지는 피아니시모가 인상적입니다. 3악장은 격렬하게 달려 나가는 프레스토(presto) 악장이지요. 약간 들뜬 기분으로 펼쳐지는, 빠르고 현란한 피아노 테크닉이 짜릿합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습니다. 이 곡을 듣노라면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쉬윈의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노골적으로 재즈적입니다. 한데 라벨은 이 곡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모차르트와 생상스의 협주곡 정신에 따라 작곡했다”고 강조한 바 있지요. 고전주의에 입각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1악장의 소나타 형식, 또 빠르고 느리고 다시 빠른 3악장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듣는 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곡이 <왼손을 위한 협주곡>보다 더욱 재즈적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영국 <데일리 텔레그라프>의 기자도 집요하게 재즈와의 관련성을 물고 늘어졌던 것 같습니다. 한데 라벨은 그것이 좀 귀찮았는지 “재즈에서 빌려온 요소가 있지만 많지는 않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사실 라벨은 이 곡을 미국에서 본인이 직접 연주할 요량이었지요. 하지만 1932년 10월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뇌에 손상을 입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생의 말년을 매우 고통스럽게 보냈습니다. 결국 1937년에 뇌수술을 받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향년 62세였습니다.
▶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피아노), 에토레 그라치스ㆍ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1957년/Warner Classics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거론하면서 빼놓고 갈 수 없는 음반이다. 지난 수십년간 애호가들의 변함 없는 사랑을 받아왔다.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세련되고 절제된 연주라고 평할 만한다. 특히 2악장이 정교하다. 재즈적 율동감, 특히 3악장에서의 서커스적 느낌, 혹은 퍼레이드적 흥취감은 좀 약하다. 워낙 오래 전의 녹음이라 음질에 불만을 갖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더라도 한 시절을 풍미한 명연임을 부정할 수 없다.
▶ 장 이브 티보데(피아노), 샤를 뒤투아ㆍ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Decca
우리 시대의 연주자 중에서는 프랑스 리옹 태생의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54, Jean-Yves Thibaudet)의 음반을 권한다. 그가 연주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유투브에서 동영상으로도 들을 수 있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연주다. 재즈적 분위기도 오롯이 살려내고 있다. 프랑스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의 연주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인터넷 매장에서 품절 상태인 탓에 곧바로 구입은 어렵겠지만, 물량이 확보되는 대로 구해 들어야 할 음반이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도 함께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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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prankster
201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