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줄에 접어든 어느 날 심근경색이 찾아왔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수술을 통해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삶은 이전과 달라졌다. 심근경색은 그의 삶에 큰 사건이 됐다. 그리고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건이 또 다시 그를 흔들었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닥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연관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생로병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재배치됐다. 아들러 심리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질병, 노화, 죽음, 생에 대한 글을 써내려갔다.
“죽을지도 모르는 큰 병을 앓은 개인적 경험 그리고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사회적 경험이 내 사고방식(생사관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21쪽)
그렇게 탄생한 책이 『늙어갈 용기』. 기시미 이치로가 아픔ㆍ늙음ㆍ죽음ㆍ잘삶에 대한 알프레드 아들러의 사상을 자신의 삶과 죽음 속에서 녹여낸 교양심리서다. 저자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다룬다.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를 것이지만 그전까지 잘 살아야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 타자, 아픔, 늙음,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저자는 죽음으로 자신을 완성할 것을 권한다.
그런 기시미 이치로가 한국을 찾았다. 지난 8월 22일, 서울 숭실대에서 『늙어갈 용기』 출간 기념으로 특별 강연을 열었다. 『미움 받을 용기』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강연장을 찾았다. 마침 남한과 북한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할 때여서 일본에서 올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고 용기를 내서 왔다는 농담(?)까지 섞으며 독자들과 만났다.
타자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날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기시미 이치로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주변의 누군가가 죽었을 때 우리가 비통해하면서 슬퍼하기만 한다면 죽은 사람이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기뻐할까?
“주변의 누군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힘들겠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남겨진 사람은 앞을 향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보겠다. 오늘 누군가를 만나서 춤을 췄다고 해보자. 그때 그 춤은 어떤 목적을 향해 추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고 춤을 추는 사람은 어떤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용기가 필요한 것인데 만약 너무 일찍 죽는 사람, 특히 젊어서 죽는 것은 정말 안 된 것이지만 그 사람이 열심히 살았다면 그것은 그렇게 슬픈 것은 아니다.”
기시미는 아들러가 제자에게 말한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이솝우화에 나온 이야기라고 했으나 기시미가 찾아봤더니 이솝우화에 나오진 않은 이야기. 두 개구리가 다리에서 함께 놀고 있다가 한 개구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남은 개구리는 비관주의자였다면 떨어진 나머지 개구리에 대해 포기를 하나 그렇지 않고 남은 개구리가 낙관주의자라면 떨어진 개구리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는 것. 그래서 낙관주의자 개구리는 뭔가 움직이면서 떨어진 개구리가 다시 올라올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기시미는 나치에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하고 학대받았던 유대인들의 경우도 빗댔다. 이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이 낙관주의라고 생각했다.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도 그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도 있었다. 반면 끝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정신이상을 보이거나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만약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게임에 지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다시 도전하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병, 죽음 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 것들에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용기를 갖고 늙음이나 병, 죽음에 직면한다면 인생은 달라지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이다. 내가 무엇인가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라. 어떤 행위로서가 아닌 존재만으로도 세상에 공헌할 수 있음을 명심해 달라.”
기시미는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면 내 자신이 달라지면 된다고 강조했다.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을 권했다. 아침에 일어나 역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도 좋다고 했다. 이런 인사를 건네는 것도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것.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인사라고 한다면 그렇게 인사를 건넸을 때 다른 사람들도 높은 비율이 답을 해준다는 것. 그렇게 됐을 때 인사를 건넨 사람은 다시 다른 어떤 일을 도모하면서 세상에 공헌을 할 수 있게 된다.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자기를 갱신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건 컴퓨터 시스템을 바꾸는 것과 같다. 타자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컴퓨터의 하드는 달라지지 않지만 소프트웨어는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작은 계기로 지금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 오늘, 타자에 대한 시선을 바꿔 타자와 세상을 다르게 생각하고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Q&A
전라북도에서 올라왔다. 『늙어갈 용기』에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 ‘누구’보다 ‘무엇’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공감을 하면서도 의문이 든다. 좀 더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아들러 심리학은 대화할 때 기본적으로 말과 그 말을 하는 사람은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3쪽)
직장을 놓고 말하자면, 상사가 불합리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로 부하 직원을 혼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누가 혼냈다는 것보다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 맞지 않는다면 상사에게 반박하고 저항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부하가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다면 부하에게도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불합리한 것을 받아들인다. 책임을 상사에게 전가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 상사가 불합리한 것으로 화를 낸다면 그 내용에 대해 지적하고 반발해야 한다.
상사가 불합리한 이유로 화를 내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이라는 틀 안에서 자기가 우수하지 않다는 생각에 화를 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말하자면 정도가 아닌 주변적인 것에서 그러는 것인데, 부하를 혼냄으로써 우월감 등을 느끼는 거지. 만약 부하가 용감하게 대들었다면 싸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부하가 진다면 상사는 우월감을 가질 것이다. 그런 상사는 일적인 면에서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그런 무능한 상사와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상사가 어떤 상사인지가 중요하기보다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불합리한 것으로 혼을 낸다면 또 시작이구나, 또 떠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라. 정말 훌륭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은 그 대단함을 대놓고 노출하지 않는다. 무능한 상사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삶을 불필요하게 소모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는 사람과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말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화에서는 어디까지나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 하며, 그것만이 디아렉티케(대화법, 철학적 문답법)의 정신이다.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누가” 이야기하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굳이 구별해야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런 점에 입각해서 “누구”와 “무엇”의 중점을 “누구”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건 “누구”를 중시함으로써 생기는 폐해나 문제점이 크기 때문이다.“(72쪽)
두 아이 엄마인데,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를 내기도 한다. 화를 내면 아이에게 사과하지만 내 자신에게 실망을 한다. 책에서 알고 있으면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알고 있는 게 아닌 걸까? 진짜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는 것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혼낸다는 게 유효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아이는 바로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칠 것이다. 혼내서 금방 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그게 반복이 된다면 잠시는 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 지속적으로 유효하지는 않다. 혼내는 것이 유효한 방법이 아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혼내는 것이 아닌 유효한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이의 행동을 개선시키려면 혼내는 것보다 언어로 부탁하는 것이 낫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의문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주지 않겠니? 그렇게 부탁을 받았을 때 아이가 아니야, 혹은 싫다고 할 수도 있음도 명심해라. 다음으로는 가정문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무엇을 해준다면 기쁠 거야. 명령이 아닌 부탁이다. 그때 아이가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면 아이가 들어줄 확률이 높아진다.
아이가 장난감, 과자 등을 사달라며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쓴다든지 할 때가 있다.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심하게 울기도 한다. 아이가 감정적으로 되는 것은 부모가 감정적이 돼서 아이를 혼내는 것과 같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좋다. 나는 유치원 때 그렇게 떼를 썼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울지 않아도 좋으니 말로 내게 부탁을 해주겠니? 그랬더니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하더라. 저 과자를 제게 사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은데요. 부모는 아이가 요구하는 내용보다는 방법이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불완전하더라도 말로 부탁하는 것을 시험해보면 좋겠다. 아이가 바로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부모도 혼내거나 화내는 횟수도 줄고 아이도 변화할 수 있다.
“자식을 야단치는 부모는 누구라도 언제든 자식을 학대할 수 있다. 야단치는 것의 폐해는 사회 문제와도 연결된다. 야단맞는 게 무서워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아이는 커서 사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실패나 부정을 은닉한다.(중략)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말로 부탁하면 된다. 만일 아이가 자신의 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걸 모른다면 굳이 야단을 치지 않고 그냥 말로 설명하면 된다. 대화할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83~84쪽)
회사를 다니다가 정년퇴직한 상태에 대해 묻고 싶다. 회사생활을 할 때를 작은 공동체라고 묘사하고 정년퇴직 후에는 좀 더 큰 공동체, 나라나 국가 등에 헌신하면서 늙어감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책에서 말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고 못한 것에 대해 피드백이 오는데, 더 큰 공동체에 대해 공헌을 해도 잘했는지 못했는지 피드백을 받을 순 없는 것 같다. 그럴 경우, 주관적인 오해나 독선에 빠질 수도 있다고 본다. 더 큰 공동체에 대해 공헌했을 때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회사에서는 피드백이 바로 온다. 그것은 하나의 인정욕구다. 인류, 국가 등의 공동체에 대해 공헌을 하면 바로 확인할 순 없겠으나 회사를 다닐 때와 같은 인정욕구는 생기지 않는다. 가정과 같은 아주 작은 사회에서도 자신이 한 것에 대해 평가를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가족이 식사를 한 뒤, 대부분 주부가 설거지를 한다. 그때 가족의 다른 구성원은 TV를 보거나 자신의 일을 한다. 설거지를 하는 주부는 나 혼자 설거지를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반면 설거지를 하는 것도 가족을 위한 하나의 공헌이고, 그 공헌하는 자신은 가족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대인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왜 다른 가족이 하지 않지, 라고 생각해보라. 가족에게 공헌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가족이 설거지를 하는 주부에게 고맙다고 말해준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겠지. 공헌도는 자기만족도가 중요한데 타인에 의한 인정이나 평가에 의존한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한 남자가 자기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라며 이런 결심을 했다. 아침마다 집 앞을 지나가는 차를 향해 인사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흔들어주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나중에는 기분이 좋아졌다고 하더라. 심지어 출근길을 바꾼 사람도 생겼다. 이 남자의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큰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 기사를 본 한 정신과 의사가 이를 책에 실었고, 그 책을 내가 읽고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한 작은 행동이 지금 여러분에게 전달된 셈이다. 한 사람의 힘은 의외로 크다. 자기의 능력이나 힘이 어디까지 전달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사람이 고맙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이 세계 어딘가에 전달될 수 있는 힘은 있다고 생각한다.
대인 관계에서 인정받으려는 용기를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한국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라고 주변에서는 차, 결혼 등 미래에 대한 기준을 주입한다. 나는 내 페이스를 지키고 싶으나 주변에서 나를 패배자 취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스트레스를 주는 사회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해야만 하는,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것. 그 중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사는 게 가장 낫겠지. 사람은 해야만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물론 인간에게 적정한 스트레스는 필요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의 차이가 스트레스의 크기가 될 수도 있겠다. 이 크기를 스스로 극복하는 건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 와중에 하고 싶은 목표가 정말 정당하고 좋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차, 결혼, 집, 재산 등이 정말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검증하고 물어야 한다. 자신이 병에 걸렸을 때도 그런 것들이 가치가 있을까. 몸을 가눌 수 없게 됐을 때 하고 싶은 것이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혹시 모든 것을 잃는 경험을 하면 정말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본 아이들도 게임기를 무척 갖고 싶어 하는데 왜 갖고 싶은지 물으면 다 갖고 있으니까, 라고 대답한다. 그런 말을 하는 아이에겐 게임기를 사서 주면 안 된다. 한국 젊은이들도 게임기를 갖고 싶은 아이들과 같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고 하고 있어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계속 고민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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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갈 용기기시미 이치로 저/노만수 역 | 에쎄 | 원제 : よく生きるということ
이 책은 아픔, 늙음, 죽음, 잘삶에 대한 알프레드 아들러의 사상을 기시미 이치로라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과 죽음 속에서 녹여낸 교양심리학의 결정판이다. 동시에 니체, 도스토옙스키, 에리히 프롬, 비트겐슈타인, 시몬 베유, 서머싯 몸, 마르틴 부버, 슈바이처, 칼 힐티, 스티븐 호킹, 수전 손택, 무라카미 하루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숱한 명사의 ‘오싹하도록 덧없고 눈물겹도록 살가운’ 생로병사 잠언들을 인용하며 육체의 애틋함과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지혜의 파피루스를 펼쳐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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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