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대중이 알기 쉬운 친숙한 음악언어로, 당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요구했던 낙관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그려냅니다.
글ㆍ사진 문학수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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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 이어 이번에도 쇼스타코비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그의 음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곡이 무엇일까요? 아마 다들 아실 겁니다. 거의 대중음악에 가까울 만큼 인기를 끄는 곡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재즈 모음곡 2번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2번> 중에서 ‘왈츠 2’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음악은 전부 8곡으로 이뤄져 있는데, 순서대로 열거하면 march, little waltz, dance 1, waltz 1, little polka, waltz 2, dance 2, finale입니다. 그중에서도 색소폰이 리드하는 ‘왈츠 2’의 세 박자 선율은 여러 영화에 삽입돼 인기를 얻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아이즈 와이드 셧>을 비롯해 한국영화 중에서는 <번지점프를 하다> <텔미 썸딩> 등에서 사용돼 사람들의 귀에 친숙해졌습니다.

 

지난 회에 설명했던 <교향곡 5번 d단조>는 1937년에 완성해 초연했던 곡이었지요. 쇼스타코비치는 그 곡으로 위기의 터널을 간신히 벗어나 정치적으로 복권됩니다. 한데 알려져 있다시피 이 무렵 스탈린의 폭압 정치는 점점 더 가속도를 내고 있었지요. 구두닦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던 이 황폐한 영혼의 독재자는 살벌한 숙청을 통해 자신의 권력 강화에 나섭니다. 1924년 집권한 그는 1938년까지 약 2천만 명을 숙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1937년과 1938년에 피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기존의 숙청과 구분해 ‘대숙청’으로 부르기까지 하지요. 스탈린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트로츠키는 그렇게 피바람이 몰아치던 1937년에 멕시코로 몸을 피해 자신의 추종자였던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도움으로 은신 생활을 시작합니다. 역시 공산주의자였던 리베라의 아내 프리다 칼로는 이 시기에 트로츠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트로츠키는 1940년에 살인청부업자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암살됩니다. 누가 암살자를 보냈는지는 뻔한 일이지요. 트로츠키는 그 암살자가 휘두른 등산용 피켈에 뒷통수를 찍혀 살해되는데, 이 이야기는 1972년 만들어진 <트로츠키의 암살>이라는 영화에도 묘사되고 있습니다. 리처드 버튼과 알랭 들롱이 주인공을 맡은 옛날 영화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살벌했던 시대에 미국의 음악인 재즈가 소련에서 꽤 유행했다는 점이지요. 쇼스타코비치가 <재즈 모음곡 2번>을 작곡했던 시기는 피의 광풍이 정점을 찍었던 1938년이었습니다. 한데 곡의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소련에는 ‘재즈 오케스트라’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즈 경연대회까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우호적 관계’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로 들어서기 전까지 미국과 소련은 우방국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정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있습니다. 2차대전의 와중이었던 1941년에, 나치 독일군에게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된 이 교향곡은 소련에서의 초연 직후 미국에서도 연주돼 대대적인 환영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반나치즘’의 상징처럼 울려퍼졌던 것이지요. 어쨌든 당시 소련 내부에서는 재즈를 못마땅해 하는 시각과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친선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금지할 수 없는 음악’이었던 셈이지요.

 

그렇게 양국의 우호 관계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재즈는 당시 여러 나라의 음악가들에게 신선한 음악적 소재였습니다. 물론 재즈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는 미국의 음악가 조지 거쉬윈이겠지요. 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음악가들이 재즈에 매료됐습니다. 체질적으로 현대적 지향이 강했던 음악가 쇼스타코비치도 당연히 그중의 한 명이었지요. <재즈 모음곡 2번>은 그런 배경 속에서, 정치적으로 살벌했던 1938년에도 작곡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이 음악을 과연 재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는 재즈의 본령이랄 수 있는 독특한 5음계와 엇박자의 리듬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1930년대는 재즈 중에서도 흥겨운 ‘스윙 재즈’, 다시 말해 그냥 귀로 듣기보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재즈가 유행했던 시기인데, 쇼스타코비치는 바로 그 ‘흥겨운 춤’의 분위기를 가져와 ‘재즈’로 명명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재즈 모음곡 2번>은 비엔나 풍의 왈츠, 또는 서정적인 ‘슬라브의 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재즈 모음곡 2번>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워낙 많이 알려져 있는 음악인 까닭에 그냥 건너뛰기 섭섭한 마음에 언급하다보니 말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쇼스타코비치에게 다가왔던 두번째 위기, 그러니까 지난 회에서 언급했던 1936년의 위기에 이어진, 2차대전 이후에 찾아온 두번째 정치적 위기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반나치 전선으로 미소가 함께 연합했던 2차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갈라집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진영으로의 양분이 그것이었지요. 두 체제를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은 당연히 체제 경쟁에 나섭니다. 미국에서는 ‘반공’의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1950년부터 매카시 선풍이 불어 닥칩니다.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바람잡이로 나서면서 이른바 ‘빨갱이 사냥’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것이지요. 물론 소련에서도 체제 강화의 깃발이 펄럭입니다. 미국보다 한발 앞선 1948년이었습니다. 당시 당중앙위원회 예술위원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 말하자면 문화부 장관 격이었던 그가 깃대를 잡고 숙청 작업을 총지휘했지요. 수많은 예술가들이 ‘형식주의자’ ‘반인민적인 개인주의자’로 몰려 곤경에 처합니다. 그때 당으로부터 비판받았던 음악가들은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옛소련의 대표적 음악가들입니다. 쇼스타코비치뿐 아니라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니콜라이 미야코프스키 등이 비판의 도마에 오릅니다. 

 

그래서 ‘스탈린상 수상자’였던 쇼스타코비치는 또 한번의 ‘자아비판’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진술합니다. “나는 또 다시 형식주의에 빠져들어 인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당이 옳다는 것을 안다. 내 음악에 대한 당의 비판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자아비판과 동시에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도 쫓겨납니다. 그리고 거의 작곡을 마무리했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초연을 보류하지요. 이 곡은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1955년에나 초연될 수 있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이 그해 10월 29일에 초연했습니다.

 

대신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좋아하는 ‘가사가 들어간 음악’을 쓰기 시작합니다. 스탈린은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합창 음악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쇼스타코비치가 자아비판 직후에 작곡에 착수한 곡은 바로 그런 음악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2차대전으로 파괴된 삼림을 복구하는 식림 운동을 한창 펼치고 있었지요. 쇼스타코비치가 1949년에 작곡한 음악은 정부의 삼림 녹화작업을 찬양하는 애국주의적 오라토리오였습니다. 이 장면은 1937년의 상황과 매우 자연스럽게 오버랩됩니다.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을 포기하고 교향곡 5번을 서둘러 작곡해 초연했는데, 1949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침묵의 서랍 속에 집어넣고 그 대신에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를 작곡했던 것이지요.

 

오라토리오는 제가 앞서도 몇 번 설명했듯이 일종의 ‘극음악’입니다. 하지만 오페라처럼 무대 세트를 갖춰놓고 성악가들이 연기를 하면서 드라마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합창단과 솔로 성악가들이 노래의 가사만으로 서사(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말하지요. <숲의 노래>에서는 두 명의 독창자(테너, 베이스)와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는데, 특히 당시 소련의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합창의 비중이 높습니다. 성인들로 이뤄진 혼성 합창단뿐 아니라 소련의 소년단 ‘피오니르’를 상장하는 어린이 합창이 들어가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아 웅장하고 장엄한 효과를 살려내고 있는 오라토리오입니다.

 

이 곡은 그렇게 당의 입맛에 맞는 음악으로 작곡됐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러시아 합창음악과 성악의 매력을 진하게 풍기고 있음도 동시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음악에서 러시아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민요 ‘밤꾀꼬리는 조용히 행복한 노래를 부른다’를 가져와 일종의 주제 선율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중이 알기 쉬운 친숙한 음악언어로, 당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요구했던 낙관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그려냅니다. 때로는 러시아풍의 무겁고 비장한 선율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특히 베이스 독창이 리드하는 3곡 ‘과거의 추억’이 그렇습니다.

 

1곡 ‘전쟁이 끝났을 때’는 2차대전에서의 승리, 파괴된 스탈린그라드의 복구에 나선 인민들의 기상을 잔잔하면서도 밝은 분위기로 노래합니다. 2곡 ‘우리의 조국을 숲으로 덥자’는 현악기들의 리드미컬한 연주로 막을 엽니다. 한마디로 건설의 대합창이라고 할 만합니다. 러시아풍이 느껴지는 흥겨운 분위기의 관현악에 이어, 여성 합창이 전국토를 숲으로 덮자고 노래합니다. 이어서 남성합창이 가세해 점점 고조됐다가 남녀가 한데 어울려 합창의 절정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3곡 ‘과거의 추억’은 비장한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가뭄으로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곡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는 4곡 ‘피오니르는 숲을 가꾼다’는 어린이합창단이 부르는 경쾌한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5곡 ‘스탈린그라드 시민은 전진한다’는 <숲의 노래>에서도 가장 선동적인 군가풍의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곡 ‘미래로의 산책’은 서정적입니다. 잉글리시 호른이 환상적인 분위기의 선율을 연주한 뒤, 잔잔한 합창을 배경에 깔고 테너 독창자가 민요 ‘꾀꼬리는 조용히 행복의 노래를 부른다’를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숲의 노래>에서도 백미와 같은 곡입니다. 비록 쇼스타코비치가 정치적으로 굴복해 작곡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미적 동경을 느끼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7곡 ‘찬가’는 호른의 힘찬 팡파레로 문을 엽니다. <숲의 노래>에서도 가장 웅장한 분위기를 구현하고 있는 곡입니다. 합창과 관현악이 총출동해 소비에트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물론 이 마지막 곡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결말이라고 해야겠지요. 쇼스타코비치는 <숲의 노래>를 발표한 후, 다시 스탈린상을 받으며 ‘당의 음악가’로 인정받습니다.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91년/Decca


알렉산더 유라노프가 모스크바 필하모닉을 지휘해 1975년 녹음한 ‘멜로디아’ 음반이 필청반으로 손꼽혀왔다. 베이스에 이반 페트로프, 테너에 블라디미르 이바노프스키가 포진한 녹음이다. 강렬한 맛은 약하지만 6곡 ‘미래에의 산책’이 지닌 서정성을 오롯이 맛볼 수 있는, 세부적인 표현력이 좋은 음반이다. 국내 매장에서 구입할 수 없어 아쉽다. 대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쉬케나지가 영국의 로얄 필하모닉을 이끌고 1991년 녹음한 음반이다. 브라이턴 페스티벌 합창단, 뉴런던 어린이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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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쇼스타코비치 #숲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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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