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재미』, 『지금 외롭다면 잘되고 있는 것이다』의 저자 한상복은 혼돈과 위선, 불만의 원류를 찾다가 17세기 유럽 세 명의 현자와 조우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 장 드 라 브뤼예르가 그들이다. 현대 자기계발의 시초라 불리는 이 세 명의 지식인은 내일의 안녕을 기약할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는 게 인간다운 것인지를 끝없이 고민하며 인간의 위선과 허영, 이기심 등을 특유의 직관과 통찰로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17세기 유럽을 살았던 세 현자의 글에,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빠져드는 것은 그들의 짧은 문장 속에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 삶을 예리하게 풍자해낸 글을 읽다 보면, 어떻게 나를 지켜내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책의 집필 동기가 궁금합니다.
커피전문점에서 글을 쓰다보면 아웅다웅하는 연인들을 보게 되더군요. 서로 잘잘못을 가리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나쁜 X’으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면(사실, 그냥 들리는 거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투예요. ‘고마운 사람’이고 싶지만 상대는 그 고마움을 잊은 것일 테죠. 관심과 사랑을 블랙홀처럼 삼켜버린 상대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화가 나는 겁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합니다. 친한 선배가 새로운 팀을 만들게 되면 기대를 하죠. ‘나를 불러주겠지’ 하고요. 그런데 인사발령에서 내 이름이 쏙 빠진 것을 보고는 소외감을 느낍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내 기대를 배신한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 딱지를 붙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좋거나 나쁜 차원’이 아닐 때가 많아요. 각자 다른 ‘필요’가 부딪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상대에게 ‘나쁜’ 타이틀을 섣불리 붙여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관계를 악화시키기보다는 차분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해나 감정적 충돌로부터 몇 걸음 물러설 수 있어요. ‘필요’라고 하니까 “너무 계산적인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관계라는 건 애초부터 단순 계산으로 풀기는 어려운 문제죠.
책을 읽고 ‘나는 필요한 사람인가?’라고 자문해보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도 종종 하시나요?
그럼요. 예전에는 어른들이 ‘쓸모’며 ‘구실’을 논할 때마다 매정하게 들리기도 했는데요. 뭔가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되고 나니까 그게 현실이더라고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고요. 필요는 사랑이나 우정, 헌신 같은 감정들의 ‘현실적 구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소중한 감정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그런 감정들을 더욱 크게 자라게 돕는 자양분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이나 신뢰 같은 것을 원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필요를 통해 그것을 충족하려 들죠. 연인 사이도 그렇습니다. 자주 만나 관심 어린 대화를 나누고 싶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기를 원하고요. 사랑이라는 나무의 뿌리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이런 필요의 충족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필요가 어긋날 때가 종종 있거든요. 예를 들면 한쪽은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은데 다른 한쪽은 혼자 내버려둬 주었으면 할 때도 있고요. 어렵게 구한 선물을 줬는데 받은 쪽에선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죠. 다툼이 벌어지기 쉬운 이럴 때일수록 솔직하게 자기의 필요를 전하는 것으로 건강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어요.
회사에서도 그렇습니다. 선배와의 ‘의리’를 기대하기보다 찾아가서 자신이 신설팀에 왜 필요한 사람인지를 설득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죠. 그랬더라면 팀원으로 뽑히거나 아니면 ‘왜 어려운지’ 이유라도 듣고 다음 기회를 위해 부족한 점을 만회하는 준비에 돌입할 수 있었을 겁니다. 선배와 서먹해지고 마침내 멀어지는 수순을 밟지도 않았을 겁니다.
17세기 현자들 가운데 그라시안, 라 로슈푸코, 라 브뤼예르를 선택한 이유에 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세 현자는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비딱하면서도 속으로는 무한한 애정을 품은 진심이 느껴졌지요. 이를테면 마키아벨리의 노골적인 현실주의로부터 공자의 이상적 휴머니즘 사이를 오가는 그들의 글이 흥미로웠습니다. 꽤 오래전에 출판사 대표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책들인데요. 읽다보니까 왜 그렇게 마음의 빈 구석에 콕콕 박혀오는지 신기했죠. 바쁜 삶과 사람들한테 지쳤을 때 느꼈던, 그렇지만 형언할 수 없었던 느낌이 고스란히 글로 표현되어 있더군요.
유럽의 17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글이 왜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삶에도 이처럼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신기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살펴봤더니 그때의 프랑스나 스페인이 대혼란기였더군요. 내전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궁정에서는 음모와 암살이 꼬리를 물고 배신이 횡행했던 시기였지요. 그러니 민중의 삶은 얼마나 팍팍했겠어요.
직장인들은 업무 스트레스뿐 아니라 직장 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 혹은 후배가 사는 게 힘들다고 고민을 털어놓을 때, 어떻게 조언하시나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놓고 보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눈덩이처럼 늘어납니다. ‘좋은 사람’이 갑자기 기대를 배신하고, ‘나쁜 사람’과 어울려 일하는 게 싫어서 주말만 바라보고 살지요. 주말에는 출근 걱정만 하고요.
‘필요’라는 틀로 보면 감정을 꽤 드라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주로 보게 되고요. 내 마음 덜 다치게 하려면 다른 사람과의 주고받기를 보는 틀부터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를 위주로 보면, 그들의 동기가 ‘내 감정을 흔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게서 원하는 노동 또는 노력, 성과, 관심, 표현’ 같은 것에 맞춰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죠. 그걸 깨닫고 나면 마음 아프거나 화날 일이 줄어듭니다.
가족, 동료, 친구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먼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내 포지션을 만들어야 합니다. 내 중심이 확고하게 서야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얼마만큼 줄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어요. 자신이 갖고 있지도 않은 것을, 남들이 원한다고 주려 애를 쓰다 보니까 힘은 힘대로 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지요. 무엇보다도 먼저, 내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사람인가』를 어떤 분들께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사실은 20, 30대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남들에게 휘둘리면서도, ‘좋은 사람’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아서 힘겨워하는 여성들에게 이 책이 마음의 근육을 키워주는 작은 아령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착한 사람 말고 나쁜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고요. 상대의 필요에 적절히 맞춰주며 스스로에게도 더욱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성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건강한 사랑이란, 서로의 필요를 조정해가며 맞춰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상적인 사랑이 되려면 먼저 치열하게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상의 뿌리는 어쨌든 현실이니까 말이죠. 사랑이든 뭐든 좋은 관계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그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내린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출간 계획이 궁금합니다.
소설을 써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시놉시스를 만들어봤습니다만 출판사 대표님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하셔서 고이 접었습니다. 언젠가 써볼 날이 오겠죠. 다음 책을 준비 중입니다만, 이 또한 글부터 써야 책으로 나오겠죠? 아직은 머릿속에서만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많은 분께 필요한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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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사람인가발타자르 그라시안,라 로슈푸코,라 브뤼예르 공저/한상복 편 | 위즈덤하우스
누구나 유유자적 행복하게 살고 싶다. 마음 설레는 일을 하며 나답게 살기를 꿈꾼다. 그러나 생존에 급급해야 하는 현실은 비루하기만 하다. 살아남기 위해 상대의 낯빛을 살펴 분위기를 맞추거나, 호감을 얻기 위해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할 때도 많다. 산다는 건 끊임없는 대립과 위선, 혼돈의 연속이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나를 지켜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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