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인문학’이 중요하다 말한다. 몇몇 철학자는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린다. 제목에 ‘인문학’이 들어간 책이 서점을 채운다. 이렇듯 여전히 대학에서 인문학 전공 학과는 기피 대상이고, 여러 대학에서 국문과나 철학과는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확산되는 듯하다.
총 2권으로 이뤄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가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은 인문학을 갈구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제목 그대로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선택한 목적은 ‘지적 대화를 하기 위해서’일 테다. 저자는 지적인 대화가 필요한 이유로 다음과 같이 쓴다.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이고 대중은 주인으로서 선거를 통해 보수와 진보를 선택할 권한을 가졌다. 모든 책임은 대중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선별하는 시야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그 선별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정치는 썩었다면서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무관심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실제로는 보수 정당에 표를 던졌으면서도 집권한 보수 정당이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면서 열을 내는 사람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 지적인 대화는 분명 ‘놀이’지만 나의 이익을 위한 심오한 ‘놀이’다. (1권, 285쪽)
저자가 쓴 글에서 드러나듯, 『지대넓얕』은 지식을 가나다순이나 분야별로 나열해놓은 사전류의 책은 아니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로 분야를 나누긴 했지만 1권은 저자가 제안했듯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게 좋다. 상부구조를 규정하는 건 하부토대이고, 역사란 다른 말로 계급 투쟁의 역사, 즉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이라는 사적 유물론이 『지대넓얕』의 관점이다. 그렇다고 하부토대에만 주목한 건 아니다. 2권에서 채사장은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등을 다루면서 현실 너머의 차원도 소개한다. 얕다고 할 수 없는 넓은 지식이 두 권에 걸쳐 담긴 셈이다. 인기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운영자이기도 한 채사장을 만났다.
주변 사람과 대화하려고 쓴 책
『지대넓얕』이 처음으로 쓴 책이잖아요. 어떤 계기로 책 쓸 생각을 하셨나요.
여러 곳에서 많이 이야기했던 말인데요. 2011년 이전까지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완벽한 유물론자죠. 먹고 사는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 2011년에 큰 사건이 있었어요. 제주를 여행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두 분이 돌아가시고 한 분은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수습하는 시간이 길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 한 번에 죽을 수 있는구나. 세상이 불안했어요.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치유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을 명료하게 정리해놓으면 이런 불안감이 조금은 없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써내려갔죠. 원래 관심사를 정리한 게 1권인데, 1권 원고는 2011년에 써놨어요.
2권의 내용인 철학, 종교 쪽은 교통사고 이후로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인가요.
네. 최근 관심사는 종교, 신비 쪽인데요. 『지대넓얕』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냥 제가 관심 있는 소재를 따라갔습니다. 물질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신비까지 도착한 여정이 책으로 나왔어요.
1권에서는 하부토대를, 2권에서는 상부구조를 다뤘다는 점에서 결국 『지대넓얕』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같습니다. 채사장이 생각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요.
강연할 때도 종종 이야기하는데, 인간이란 여행자라고 생각해요. 배우면서 여행하는 존재죠. 세상은 학교이고, 저나 많은 사람이 배워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관계 맺어나가면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경험을 확장하며 결국에는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금은 베다 철학, 우파니사드, 티벳불교에 관심이 있어요. 깊게는 못 들어갔지만, 개인의 의식과 우주 전체의 의식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인도 세계관을 배우고 있습니다.
보통 인문학 입문서는 학계에서 저명한 분이 쓰는 게 보통이었는데요.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도 그랬지만 『지대넓얕』은 전공 학자가 아닌 사람이 썼는데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많은 책이 인문학을 쉽게 소개했다고 해도, 막상 읽어보면 어려워요. 제가 쓴 책은 그에 비해서는 쉽죠. 이미 익숙한 개념으로 경제, 정치를 설명하고 흩어져 있는 걸 정리하기 좋게 배열한 책이라 독자들이 좋아한 것 같아요. 재밌게 읽은 독자들이 소문을 내주시면서 책이 인기를 끌지 않았을까요.
정리하려고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염두에 둔 독자는 있었겠죠?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내는 것마냥 낭비적인 책은 없어요.책을 써서 저자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는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생각은 있었죠. 제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항상 정치 경제나 철학 예술 같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분들은 고졸이거나, 그렇게 유명한 대학을 나오지는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삶이 바빠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친구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쓰게 된 면도 있어요. 주변 사람과 함께 대화할 수 있도록 썼죠
책은 책, 채사장은 채사장
『지대넓얕』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책 읽으면서 노트에 정리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편하게 쭉 읽었으면 해요. 어차피 이 책이 전달하려는 건 개별적 디테일이 아니라 커다란 구조거든요. 1권에서는 다수의 피지배자와 소수의 지배자, 2권에서는 진리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큰 틀을 읽는다면 충분해요. 너무 세밀하게 보시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칠 수 있어요.
팟캐스트도 운영 중인데요.
팟캐스트는 작년 4월에 시작했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독특한 사람이 있어서 재미로 해봤어요. 어떤 사람들은 책을 잘 팔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건 결과론적 해석이고요. 실제로는 특별한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팟캐스트도 하고, 책도 쓴 거예요. 원래는 저희끼리만 좋아서 하려 했는데, 알려지다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긴 해요. 저희의 말 하나 하나에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니까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위축되기도 하고요.
채사장이 실명은 아니잖아요.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느낌도 드는데요.
지금 저는 제 삶에 관심이 있어요. 이 삶에서 뭘 배워갈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가 고민인데, 다른 무엇인가가 삶을 장악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도 버거운데, 『지대넓얕』으로 인해서 제가 이 책에 마음 쓰거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안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책은 책으로의 길이 있고, 저술한 이는 나름대로의 삶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이 인기가 많으니 채사장을 향한 호기심이 생길 텐데요. 이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은?
다행인 건, 저를 털어도 나올 게 없어요. 그저 주변에서 흔하게 보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큰 관심을 보내주시지만 금방 잊혀질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죠.
채사장은 어떤 의미에요?
의미 부여를 하려 했지만, 사실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지식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 그리고 제 성이 채 씨니까.
원래 전공은 뭐에요?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어요. 다만 대학 때의 전공이 저의 정체성을 반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사회에서 일하고 배운 내용들이 삶에 있어서의 전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위기? 인문학은 그냥 존재해
『지대넓얕』이 서구 지식을 위주로 소개하셨잖아요. 못 다룬 부분도 있는데, 혹시 3권 계획은 없나요?
1권이 현실 세계를 다뤘고 2권이 현실 너머를 썼으니 더는 쓸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초월적 세계를 쓸 수 있겠지만, 일단은 3권 계획은 없습니다. 이 책은 완간이에요.
인문학 부흥이다, 인문학 위기다 이런 담론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문학은 뜨고 지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 같아요. 인문학의 부흥과 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인문학의 부흥과 위기에 대한 이슈만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에 대한 최근 이슈에 관해서는 잘 몰라요. 아직은 TV가 최신 이슈에 가장 민감한 시대인데, 집에 TV가 없거든요.
TV는 없는데 책은 정말 많이 읽었잖아요. 왜 그렇게 많이 읽었어요?
학사장교로 가기로 해서 취업 부담이 전혀 없었어요. 3학년, 4학년 때 할 게 별로 없으니까 신나게 읽었죠.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만 봤어요.
추천하고 싶은 독서 방법은?
도서관에서 정말 많이 읽었는데, 저는 불편하게 하는 책 중심으로 많이 읽었어요. 자기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소재만 따라가면 금방 실증이 났어요. 예를 들어서, 저는 학생 운동권이 다 죽은 시절 학교를 다녔는데, 그래서인지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은 제목만으로도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함을 꾹 참고 읽어보니까 내적 논리가 굉장히 탄탄해요. 그렇게 마르크스에 관심이 생겼죠. 어떤 책이 불편한지는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어요. 불편함을 느끼면 그 책을 읽으시면 돼요. 기독교인이라면 불교나 이슬람에 대한 책을 보면 비로소 종교인이 되고, 종교인은 과학을 읽으면 또 그게 도움이 되죠. 종교나 과학같이 현실 너머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재테크나 정치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좀처럼 신인 저자가 유명해지기 힘든 인문 분야에서 채사장이라는 존재는 특별한 듯합니다. 채사장을 보고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듯한데요. 글을 쓰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조언해주신다면.
정확한 답이 아닐 것 같긴 한데, 뭘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뭘 해도 어쨌든 삶의 여행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글을 쓰든 다른 일을 하든지요. 저자로 먹고 사는 건 불가능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나 성공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건 현실적이지 않아요. 그렇다고 글을 쓰지 말라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책으로 나오든 아니든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니, 누구나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강연도 하시잖아요. 어떤 이야기를 하세요?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종교 신비 쪽인데. 강연은 주로 1권 내용을 해요. 경제 정치 사회 연결고리에 관한 강의를 주로 하죠. 강연 오신 분들 중에서는 팟캐스트를 듣는 분이 많아서, 팟캐스트에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하시고요. 그리고 지식을 구조화하고 흐름을 만드는 노하우를 묻는 분도 계신데요. 노하우는 없어요. 저는 단지 대학생 때 시간이 많아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경제활동과 사회생활을 하시며 삶에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는 다른 지식들을 배우고 계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쓸 책은?
아직은 생각만 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잡힌 건 없어요.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2 권 세트채사장 저 | 한빛비즈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현실 너머 편은 이제 그 세계를 넘어서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단언컨대 이번에는 지식의 역사가 단순하게 구조화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철학 상식들, 철학자들, 학창 시절 암기했던 과학 지식들, 난해했던 예술 작품들, 막연했던 삶과 죽음 그리고 의식에 관한 문제 등 당신 안에 있던 단편적인 지식들이 드디어 자리를 찾을 것이다. 현실 너머 편까지 아우르고 나면 진짜 힘 있는 지식인이 될 것이다.
[관련 기사]
- 권대웅 시인 “우리는 달빛 아래 만들어진 달의 존재들”
- 벤츠 최초 여성 익스테리어 디자이너 조진영
- 백지연 “『물구나무』는 딸 가진 아버지에게 추천하고파”
- 뮤지컬 <로빈훗>의 프레스콜 현장 공개
-작사가 김이나 “가인이는 벽 보고 우는 고슴도치, 아이유는…”
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서유당
2015.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