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당일 여행
붉은 동백꽃이 피는 남쪽 바다와 벽화 골목 너머 통영의 진짜 낭만이 숨어 있다. 소설가에게 영감을 준 옛이야기를 달동네에서 발견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시인과 수다를 떨고, 동네 건축가의 집에 머물며 봄을 찾는다.
봉숫골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바라본 일몰.
PHOTOGRAPH : CHO JI-YOUNG
충렬사 마당에 핀 붉은 동백꽃.
PHOTOGRAPH : LEE KI-SUN
am 8:30
통영항
복국 1그릇은 통영항의 아침을 담고 있다. 새벽 고기잡이를 마치고 항구로 돌아온 통영 어부는 생선을 들고 코앞에 있는 서호시장으로 향한다. 당연히 시장 앞에는 해산물 식당이 즐비하다. 이곳의 오래된 식당 중 하나인 분소식당(055 644 0495)은 아침 6시 30분에 문을 연다. 통영 토박이 주인은 수십 년간 통영항에서 어업에 종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선한 해산물만 사용한다. 복국(1만 원)은 앞바다에서 잡은 자잘한 졸복에 콩나물, 미나리를 듬뿍 넣고 소금 간만 해서 끓였다. 국이 맑고 산뜻해 아침 식사로 부담 없다. 통영식으로 식초와 장을 넣어 먹으면 새콤하고 얼큰하다.
바다 향이 물씬 나는 뜨끈한 복국.
PHOTOGRAPH : LEE KI-SUN
am 10:00
서피랑
통영의 절반은 바다다. 아담한 시가지는 네모난 강구안을 품고, 동피랑과 서피랑 언덕이 이를 감싸고 있다. 조선 통영성지의 누각인 서포루가 서 있는 언덕에 집이 빼곡 들어섰고 좁은 골목이 서로 얽혀 있는데 이 일대가 바로 소설가 박경리가 살던 서피랑이다. 오미사꿀빵 본점에서 99계단, 충렬사, 서문고개, 서포루까지 돌아보는 데 2시간도 안 걸린다. 한적하고 좀 으슥하기까지 한 동네 곳곳에 옛이야기가 흐른다. 99계단은 통영 뱃사람이 찾던 윤락가가 늘어섰던 곳이고, 소설 『김약국의 딸들』 속 사위가 장모를 도끼로 죽인 사건이 실제 벌어졌다는 집이 충렬사 앞에 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아편 중독자에게 시집간 셋째 딸 용란이 울며 넘던 서문고개를 올라 서포루까지 가는 길은 가파르고 햇살이 유독 눈부시다.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 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1935년 25세의 백석은 좋아하던 통영 천희(처녀) 박경련을 보러 명정골까지 내려왔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대신 여자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충렬사 계단에 앉아 시<통영2>를 썼다. 만일 그가 사당 맞은편 충렬도너츠제과의 파삭한 팥 도너츠(700원)를 맛봤다면 달콤함에 취해 시를 쓰기 힘들지 않았을까. 다행히 빵집은 1990년대 문을 열었다.
서피랑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펼쳐지는 풍경.
PHOTOGRAPH : LEE KI-SUN
pm 12:00
세병관
먼 서피랑 고개에서 봐도 통제영지 내의 세병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만큼 거대하다. 1604년 지은 조선 시대 최대의 목조 건축 세병관은 300여 년간 조선 삼도수군통제영 본영 객사 역할을 했다. ‘세병관’ 세 글자를 쓴 현판의 크기는 세로 길이가 건물 기둥 높이의 반이나 될 만큼 파격적이다. 신을 벗고 반질반질해진 마루를 디디면 남풍이 불어오고 멀리 푸른 바다가 흐릿하게 보인다. 봄이면 마당에 붉은 동백꽃이 핀단다.
세병관을 한 프레임에 온전히 담기란 쉽지 않다.
PHOTOGRAPH : LEE KI-SUN
pm 1:00
동피랑
국내 원조 벽화 마을인 이곳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통영의 상징이자 최고의 화젯거리다. 고즈넉한 산책을 기대하지 말 것. 둘이 지나면 꽉 찰 만큼 비좁은 골목을 수많은 여행자가 돌아다니며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날개 벽화 앞엔 줄까지 늘어서 있다. 주민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가 하나 둘 늘어나고 드라마 촬영지 안내판도 붙었다. 지난 3년간 마을의 유일한 예술 공간이던 동피랑갤러리가 올 4월이면 집을 비우는 것은 이 같은 변화의 연장선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동피랑을 걷는 건 파리에서 에펠 탑을 보는 것만큼이나 여전히 상징적인 행위이며, 이곳의 변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정상의 동포루에서는 고즈넉한 강구안 전경을 볼 수 있다.
*동피랑갤러리(055 648 4776)는 2주마다 쉼 없이 새로운 지역 작가를 소개하고 장인의 공예품을 판매해왔다. 문을 닫기전 마지막으로 <희망나눔전>을 3월 한 달간 연다. 작년 한 해 갤러리에서 전시를 연 작가가 각자 기증한 작품을 전시하며 저렴한 가격에 판매도 한다. 갤러리는 산양읍 연명예술촌(055 649 4799)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동피랑 골목은 아름답다.
PHOTOGRAPH : LEE KI-SUN
pm 3:00
카페 카사블랑카
강구안 바다가 보이는 옛날식 다방.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와 그림, 나무 책장, 푹신한 소파, 상앗빛 피아노는 몇십 년 전 모습 그대로다. 커다란 창은 거북선, 어선이 정박한 바다 너머 동피랑 언덕까지 담는다. 통영 토박이 시인이자 카페 주인인 김부기 씨는 여기서 홍상수 감독이 영화 <하하하>를 찍던 5년 전 여름을 생생히 기억한다. 영화를 보고 카페를 찾는 이가 늘면서 카사블랑카(055 648 9928)에도 새봄이 왔다. 하루는 영화 순례를 온 여대생이 영화 속 방중식(유준상)이 치던 피아노로 그의 즉흥 연주를 똑같이 재현했다. 순간 시인은 “시간이 붕 뜨며 영화 속에 들어간 것만 같았다”고 한다. 커피(5,000원부터) 1잔에 통영 전경과 시인의 입담이 함께하는 곳.
*통영 멍게는 전국 멍게 생산량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카사블랑카 뒤편으로 5분만 걸어가면 멍게가(055 644 7774)가 나온다. 향긋한 멍게비빔밥(8,000원)부터 멍게 회, 튀김, 전, 멍게김밥까지 판다.
오후, 카사블랑카의 창으로 통영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PHOTOGRAPH : LEE KI-SUN
pm 5:00
봉평동 봄날의집
미륵 산자락, 통영의 성북동인 봉숫골은 현지인에게 ‘공기 좋은 곳’으로 통한다. 봄이면 벚나무가 꽃 피우는 조용한 거리에 동네 건축가 강용상 대표와 동네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정착하며 색을 더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전혁림미술관 옆 예술 공간이자 게스트하우스인 봄날의집(070 7795 0531)을 열었다. 수십 년 전 봉숫골에 살던 한 동네 건축가가 지었으나 35년간 폐가이던 집을 복원한 것. 그 무명의 건축가가 여기 살며 집을 여러 채 지었다고 주민 몇이 기억하지만, 정확히 어느 집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강 대표에 따르면 전혁림미술관과 인근 건물 3채 모두 그가 지었다고 한다. 집 안방을 개조한 아트 숍인 동네상점에서는 직접 통영 각지 장인을 찾아가 구입한 작품과 공들여 고른 서적을 판매한다. 뒷집 할머니가 단골손님이라고. 봉숫골은 시내에서 통영대교를 타고 미륵도로 넘어와 차로 5분만 달리면 나온다.
*봄날의집에서 걸어서 2분. 성림(055 643 1425)은 가족에게 차려주는 건강한 밥상을 모토로 삼는다. 반건조 생선 정식(1만 원)에는 밥, 국, 말린 생선과 열 가지 반찬이 나오며, 종류도 매번 바뀐다. 주인은 친절하고 식당 내부와 음식 맛 모두 깔끔해 집에서 먹는 것 같다.
*커피집 우리 동네는 봉숫골의 새 이웃이다. 에메랄드색과 파란색을 칠한 귀여운 내부는 주인이 직접 꾸몄다. 매일 로스팅하는 커피(2,000원부터) 향이 고소하다.
봄날의집 정면에 자리한 동네상점.
PHOTOGRAPH : LEE KI-SUN
Side Trip 1. 달아공원
미륵도를 1바퀴 도는 24킬로미터 산양일주도로는 통영의 아름다운 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섬 남쪽 끝의 달아공원에선 수묵화 같은 한려수도의 풍광이 펼쳐진다. 이곳 일몰이 화려하다면, 일출은 담백하다.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이며, 530번 버스를 타면 좀 더 걸린다.
Side Trip 2. 봄날의집
봄날의집은 전혁림미술관 관장 전영근 화백이 그린 푸른 <통영항> 그림을 지붕에 얹고 나전 장인 김종량이 만든 문패를 달았다. 방은 장인이 만든 요와 이불, 가구와 소품, 그림 등으로 꾸몄다. 강용상 대표는 고풍스러운 나무 천장과 마루, 독특한 건축 구조는 보존한 채 공간을 창의적으로 개조했다. 투숙객은 이웃한 식당 성림에서 식사가 가능하다. namhaebom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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