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pol)의 땅(land)’이라는 뜻을 지닌 폴란드는 겨울이 무척 긴 나라이다. 일 년에 다섯 달 가량은 줄곧 차가운 겨울 날씨다. 끝없는 들판은 겨울 하늘에 머무르는 짙은 안개 때문에 대낮에도 어둑어둑할 때가 많다. 폴란드 사람들은 외롭고 긴 겨울밤 내내 무얼 하며 지냈을까. 너도 나도 포도주병을 들고 이웃을 찾았다고 한다. 화덕에 불을 피우고 예술과 삶을 이야기했다. 지루한 날씨 탓인지 오래전부터 폴란드에는 살롱 문화가 발달했다. 지금도 건물 지하에는 낡고 정겨운 풍모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살롱들이 많다. 폴란드는 이미 네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학의 나라이기도 하고 수만 명의 성직자를 가진 신앙의 나라이기도 하다. 쇼팽과 코페르니쿠스와 퀴리부인을 낳은 폴란드의 풍요로운 문화는 긴 겨울동안 살롱에서 오간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 꽃 피었는지도 모른다. 겨울의 길이와 상상력의 크기는 비례하는 것일까.
폴란드의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들은 인간만이 지녔다는 ‘상상력’이라는 사고 작용이 얼마나 깊고 웅대한 우물을 팔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옛말에 ‘생명은 타고 나지만, 그 생명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같은 시간에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 존재가 뛰어넘을 수 없는 일정한 틀이다. 나는 내일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한라산에 있으면서 동시에 백두산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상상력은 그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보게 해준다. 누군가가 지닌 과거의 경험은 그 사람의 상상력을 통해서 다른 경험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기 시작한다.
『파란막대 파란상자』는 그런 상상의 힘을 이용해 시간과 공간을 다시 짜 맞춘 동화다. 이 책은 앞표지와 뒷표지의 구분이 없다. 어느 쪽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파란막대』로도 읽히고 『파란상자』로도 읽힌다. 두 가지 이야기는 정확히 책의 한 가운데에서 만나는데 양적으로, 또 형식적으로는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파란 막대』는 아홉 살 여자 어린이 클라라가 『파란 상자』는 아홉 살 남자 어린이 에릭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들은 나란히 아홉 살 생일에 막대와 상자 하나씩을 선물로 받는다. 그리고 각각 한 권의 해묵은 공책을 물려 받는데 그 안에는 막대와 상자를 사용했던 선조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선조들도 그들의 아홉 살 생일에 이 막대와 상자를 선물로 받았으며 그 물건을 나름대로 즐겁게 사용한 다음 사용법을 공책에 기록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클라라와 에릭은 공책을 열고 파란막대와 파란상자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짚어본다. 선조들은 막대를 컴퍼스와 곡예 훈련기구와 해시계의 축으로 사용했는가 하면 상자를 점술도구와 병아리 침실로 사용하기도 한다. 클라라와 에릭은 이 이야기를 모두 읽은 다음 자신이 적어나갈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둘이 책 속의 한 장면에서(실제로는 만났는지 못 만났는지 알 수 없으나) 서로 만난다는 것이다. 막대와 상자도 마치 예정된 친구처럼 꼭 잘 어울린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앞’과 ‘뒤’라는 기존의 순서 개념을 무너뜨린다. 결말도 보여주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면서 독자의 상상을 통해 시간 개념을 자유롭게 재구성하라고 주문한다. 작가가 상상의 힘으로 재구성한 것은 시공간 개념만이 아니다. 이야기 구조도 독자의 상상이 어느 곳에 닿아 있는가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열어 두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하나가 아니라 둘인데 이들은 평행하여 등장하고 행동하는 것도 쏙 빼닮았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 달리 읽으면 이 책의 주인공은 수십 명이기도 하다. 막대와 상자를 사용해온 그들 가문의 모든 아홉 살 어린이들이니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그들이 사용한 막대와 상자가 이야기의 축을 이끌고 있으므로 ‘막대’와 ‘상자’가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독자는 이 책을 덥석 덮을 수 없다. 어느 편으로 읽어도 책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독자는 스스로 되묻는다. ‘클라라와 에릭은 이 막대를 어떻게 사용한 것일까?’, ‘그들 둘은 서로 만났을까, 아니면 못 만나고 각자 살았을까?’, ‘그들 둘이 만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막대와 상자를 함께 사용하여 무슨 재미난 일을 생각해냈을까?’
작가로부터 이야기를 불쑥 넘겨받은 독자는 그림 속에 숨은 상징은 하나하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상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부지런한 독자만이 기호의 새로운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그냥 스쳐가듯 읽으면 이 책은 다만 앞과 뒤가 비슷한 신기한 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대부분의 그림책 작업을 우리나라 출판사들과 함께 한다. 기획자이자 번역가인 이지원씨는 클라라와 에릭처럼 이 작가의 환상적인 파트너이다.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두 차례나 라가치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다른 그림책을 통해 폴란드 문화와 더불어 그동안 경험한 동양적인 우리 문화의 함축들도 작품에 담아 나가고 있다. 두 문화의 만남을 상징하는 이 책이 폴란드의 어린이들에게는 어떻게 우리들에게는 또 어떻게 읽힐까. 남자에게는 어떤 기호와 이미지가 더 강하게 기억되고 여자에게는 어떤 기호와 이미지가 더 강하게 와 닿을까를 짐작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막 커플이 된 두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그들이 서로 세계를 바라보는 따로 또 같은 창을 열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 함께 선물하면 좋은 책
내 남자친구 이야기 : 두사람의 같은 추억 서로 다른 이야기
음악을 매개로 서로에 대한 호감을 깊고 풍요롭게 가꿔 나가는 두 청소년 잔과 피에르의 이야기. 『내 남자친구 이야기』(Le pianiste sans visage)와 『내 여자친구 이야기』(La fille de 3e B)는 잔과 피에르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나가는 과정을 각각의 입장에서 풀어낸 커플 소설이다.
내 여자친구 이야기 : 두사람의 같은 추억 서로 다른 이야기
크리스티앙 그르니에 저/김주열 역 | 사계절
서로 다르면서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한 작품을 읽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의 작품이 읽고 싶어진다. 이 두 권의 커플 소설은 이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꿔 나가야 할지 몰라 조금씩 상처를 입곤 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자친구와 남자친구가 함께 읽으면서 남녀의 성향 차이를 이해해 봄으로써 서로를 좀더 깊이 알아 나가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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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막대 파란상자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이지원 역 | 사계절
이 특별한 선물들은 각기 아무런 단서도 없이 주어집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함께 건네진 낡은 공책 속에, 앞서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사용기가 적혀 있습니다.
[추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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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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