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거리, 오도리 공원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길이 있을까. 그 무한대의 갈래 중에서도, 유난히 꼼꼼히 걷게 되는 길이 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깊은 곳으로 말을 걸게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마음을 파고든다. 언젠가 많이 그리워할 풍경이다. 꿈속에서 애타게 찾아 헤매다 잠에서 깨고야 말 거리다. 삿포로에도 그런 곳이 있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며 걷다 보면 열한 개의 길이 된다. 도시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오도리 공원이다. 공원은 열한 개 블록에 걸쳐 이어져 있다. 폭 67m 거리를 중심으로 양쪽엔 번화한 건물과 나무가 늘어서 있다. 1871년에 화재 방지 선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거쳐가는 길목이자 쉼터가 되었다. 어디를 가든 오도리를 거쳐간다. 그곳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들은 시간이 지나 무척 소중한 추억이 됐다. 종종 한 정거장 지하철을 타는 대신 공원을 가로지른다. 꽤 괜찮은 기분이 될 때쯤, 열한 개의 길이 끝난다. 봄의 라일락 축제, 여름엔 비어 가든, 가을 요사코이 소란과 먹거리 축제 등 계절별로 축제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긴 겨울의 정점을 찍는 2월이 되면 눈축제가 열린다.
다시 돌아온 삿포로 눈축제
눈축제(유키 마츠리)가 열릴 때 도시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브라질의 카니발,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와 함께 세계 3대 축제로 꼽힌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과 취재진이 공원을 빽빽하게 채운다. 축제 준비는 자위대, 각국의 예술가, 자원봉사자 등이 한 달 동안 힘을 합친다. 5톤 트럭 7천 대 분량의 눈으로 블록마다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고, 밤이 되면 프로젝션 맵핑으로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삿포로 시민을 위로하는 축제라고 하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눈축제에 잘 가지 않는 것 같다. 한산함이 주특기인 이 도시에 번잡함은 어색하기도 하다. 그래도 안 가보자니 아쉬웠다. 가장 사람이 없는 첫날 오도리 공원을 찾았다. 일본인 친구에게 ‘별거 없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너 삿포로 사람 다 됐구나.’하는 답이 돌아왔다. 대수롭지 않아 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의 어리숙함을 벗어냈다는 허세 같은 거였다. 구석구석 돌아보고 스케이트까지 탔으면서 말이다. 도심의 거대한 눈 조각상 앞에 서면 탄성 한 번 내뱉지 않고선 배길 수 없다.
이번 66회 눈축제의 주말엔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조각상 일부가 무너지고 녹아 내렸다. 보수 공사를 위해 긴급으로 투입된 사람들이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눈축제에 눈이 녹아내렸다. 지구 온난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유빙(流氷)을 맞이하러 가는 길
비 내리던 그 주말, 삿포로를 떠난 열차는 다섯 시간 반을 달렸다. 선로의 끝엔 아바시리와 시레토코가 있었다. 어쩐지 이름부터 몹시 시리고 추운 곳이다. 도동(道東) 지역엔 유명한 게 두 가지 있다. 감옥과 유빙이다. 백여 년간 악명을 떨친 감옥이 이곳에 있다는 건 그다지 놀랍지 않다. 탈옥에 성공하더라도 얼어 죽을 게 뻔하다. 유빙은 무한도전 멤버들이 다녀가서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다. 홋카이도는 세계에서 유빙을 볼 수 있는 가장 저위도의 해역이다. 러시아 아무르 강 하구에서 형성된 유빙이 1,000km를 여행에 이곳에 닿는다. 1월 말부터 3월까지가 바로 그때다. 이 또한 지구온난화로 십여 년 뒤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먼 길 떠나온 유빙을 맞이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가장 일반적이지만, 결코 흔하지 않다. 아바시리와 몬베츠의 항구에선 스크루로 얼음을 갈며 전진하는 쇄빙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유빙을 뚫고 가느라 배가 이리저리 기울기도 한다. 먼 곳의 설산은 바라만 보아도 눈이 뻥 뚫린다. 시레토코의 우토로 지역에 가면 유빙 위를 걷고 다이빙을 하는 유빙 워크 체험이 있다. 두께 1m가 넘는 유빙들이 바다 위에 길을 만들어 주었다. 오호라, 신기하다. 고무로 된 전신 일체형 드라이 슈트도 껴입었다. 민망한 차림새였지만 따뜻했다. 얇은 유빙을 엘리베이터 삼아 몸을 바닷속으로 내려보냈다. 오호라, 신난다. 스마트폰의 GPS는 오호츠크해가 맞닿는 곳에서 깜빡이고 있었고, 나는 러시아 발(發) 얼음 위를 걷고 있었다. 어떤 유빙이든 내가 택하여 걸으면 바다 위에 길이 열렸다.
어김없는 자연
동쪽 끝에 길게 뻗어 나온 시레토코 반도는 2005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불곰과 부엉이 등 국제적 희소 종의 중요한 번식지와 월동지다. 겨울이라 많은 곳을 들러볼 수는 없었지만, 폐쇄된 도로 너머로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생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언가 웅장한 기운이 맴돌았다. 후레페 폭포는 시레토코 자연센터에서 삼십 분 정도 걸리는 산책길 끝에 있었다. 불곰이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무시무시한 안내를 받았다. 반달형으로 굽은 낭떠러지 중간에서 지하수가 흘러나와 생긴 폭포다. 가느다란 물줄기는 곧장 오호츠크 해로 떨어진다. 몸이 밀릴 정도의 눈보라를 뚫고 후레페 폭포 앞에 다다랐다. 다행히 불곰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사슴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절벽 끄트머리에서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뜯고 있었다. 홋카이도에선 여우나 사슴 같은 야생 동물을 종종 마주친다. 그때마다 녀석들의 눈은 동물원에서 본 그것과 다르다는 걸 확연하게 느낀다. 가혹한 겨울의 자연 속에서도 견고하다. 무척이나 단단한 빛이 서려 있다. 사람에게서 멀어져 어디론가 길을 떠나는 뒷모습은 언제나 홀연하다. 푸른 빛으로 얼어붙은 물줄기가 녹을 때까지 사슴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과한 걱정이다. 녀석은 어떻게든 견뎌내 길을 찾을 것이다.
자연은 만날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하여 인간을 놀라게 한다. 익숙해질 법도 한 홋카이도의 자연이건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두근거렸다. 자신만 바라보는 미숙한 인간 존재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방 펀치를 날린다. 거기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다. 눈비가 몰아치면 다음 날은 맑아지기도 하는 것처럼. 그래, 그렇게 걸으면 된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축제다. 거대한 조각상도, 웅장한 자연도 모두 즐겁다. 나는 오늘도 이곳의 길을 꼼꼼히 걷는다. 들여다보고 그 속으로 스며든다. 겨울을 걷는 건, 꽤 괜찮은 기분이다. 이 기억들이 어느 날 예고 없이 텅 비어버린 미래의 나를 토닥인다. 미숙한 고민으로 잠들 수 없는 밤이 온다면, 견고하고 단단했던 눈동자를 떠올리고 싶다.
* 삿포로 오도리 공원 축제
- 봄: 라일락축제 (5월)
- 여름: Yosakoi 소란 (6월), Pacific Music Festival, 비어가든, 시티재즈, 섬머 페스티발 (7~8월)
- 가을: 오텀 페스트 (9월)
- 겨울: 뮌헨 크리스마스 마켓 (11~12월), 화이트 일루미네이션 (12~1월), 눈축제 (2월)
* 도동(道東) 지역 유빙 여행
- 삿포로 > 아바시리 교통편: JR 열차 (5시간 30분), 버스 (6시간)
- 유빙 쇄빙선: 몬베츠의 가린코II, 아바시리의 오로라호
* http://www.garinko.com/
* http://ms-aurora.com/abashiri/en/
- 유빙 워크 체험: 시레토코 우토로 지역 가이드 투어
* http://www.shinra.or.jp/index.html
- 자유여행 패키지 문의 및 예약: JR 역사 내 트윙클 플라자 여행 센터
* https://www3.jrhokkaido.co.jp/jr-mpack/template/syuyu2014/index.html (일본어)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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