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 공원, 내겐 이름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지명이다. 앞서 펴낸 두 권의 책에서 조금 다른 내용으로 이미 선유도에 대한 글을 쓴 바 있고, 다시 쓰라고 해도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근사한 공간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연작 ‘한양 진경’ 중 「선유봉」(영조18년, 1742)이라는 그림이 있다. 선유도는 원래 해발 40미터의 작은 봉우리로 된 섬으로 30여 가구가 경작을 하며 사는 마을이었다. 선유仙遊는 신선이 논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유도 하면 그 이름만으로도 신선이 된 듯 사뿐한 기분이 드나 보다.
차형이 선유도 공원을 돌아다니다 마지막에 만났다는 담쟁이 기둥들이 도열한 광장은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1978년 건립 이후 사용되었던 제1정수지의 슬래브 상판을 털어내어 기둥만 남겨둔 곳으로, 과거에는 물을 담아두었던 콘크리트 수조였다.
지금의 장소가 예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고 나면 조금 다른 느낌으로 이 공간을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을 동시에 경험함으로써 시간의 현재성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공감각적 일체감은 역사 깊은 도시의 오래된 장소들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감동을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전달해준다.
시간을 담았다고 하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가보면 알 것이다. 왜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지. ‘녹색 기둥의 정원’과 맞닿아 있는 수생식물의 천국 ‘시간의 정원’은 앞으로 우리 도시가 남겨야 할 유산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힌트를 던지고 있다. 정수지를 다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짓고, 남는 땅에 흔한 방식의 공개 공원을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매끈하게 마감된 석재 바닥 포장 산책길에 벤치 몇 개, 산책길 중앙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분수, 인공적으로 조성된 화단과 도시 매연에 강한 수종으로 이루어진 작은 숲, 방문객들을 위한 휴게실, 카페, 놀이방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공간이었다면 지금보다 의미 있고 시민에게 더 사랑받는 공공 공간이 되었을까. 임기 얼마 안 남은 해당 지자체장에게는 빠른 시간에 쉽게 만들 수 있는 실적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시민들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의 의미밖에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선유도 공원 말고도 서울에는 30~40년 전에 건축된 콘크리트 유적들이 꽤 많다. 건물을 유적으로 칭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세월 먹은 건물들을 밀어버리고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동대문운동장 터에 새롭게 개관한 거대 랜드마크를 알고 계시는지. 태어나서 처음 동대문을 가본 딸은 동대문이 대체 어디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가 동대문이야”라고 답하자, 딸은 “아니 그게 아니라, 대문이 어딨냐고” 하고 재차 물었다. 진짜 궁금해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손으로 대충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기 있어” 하고 넘어가보려 했는데, 딸아이는 지지 않고 “직접 보고 싶다”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동대문을 보러 갔다. 신호등 두 개를 지나 청계천을 건너 문 앞에 도착하니 “왜 문을 지나갈 수 없지” 하고 묻는 딸. 나도 궁금하긴 했지만 그저 “옛날엔 성의 안과 밖을 지나다니는 문이었는데 지금은 성도 사라지고 문도 쓰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저 멀리 뭔가를 발견하고는 “근데 저 큰 우주선(‘같이 생긴 것’도 아니고 ‘우주선’이라고 했다)은 왜 만든 거야”란다. 음. 그러게 말이다. 저 큰 우주선 같은 집에 대해서는 나도 참 궁금하거든. 동대문에 왜 저런 큰 덩치가 들어서야 했는지, 무엇을 위해 지은 집인지 말이지.
사실 동대문에 대한 추억은 꽤 많다. 아버지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사러가던 날의 기억. 근데 하필이면 스케이트를 꽃피는 5월에 사러 가다니. 그런 어린이는 아마도 전국에서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파는 데가 설마 있을까 의심했지만 5월의 스케이트는 동대문에 진짜 있었다.
거대한 성벽처럼 높은 운동장 스탠드 외벽 1층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체육용품점들을 지나 두 운동장 사이로 협곡처럼 깊고 짙은 공간을 통과해 ‘예림스포츠’라는 청색 간판이 달려 있던 가게로 들어갔던 날, 때는 1979년 봄이었다. 검은색 가죽 신발 밑에 은색 날이 멋들어지게 달린 번쩍거리는 스케이트를 사 들고 꽃가루 날리던 도로를 지나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순대에 떡볶이를 먹었던 것 같다. 그날의 기억들은 내게 동?대?문이라는 세 글자의 지명과 함께 진하게 남아 있다.
운동장 벽면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서울 성벽의 잔해처럼 도로에 널부러져 있던 각종 물건들. 어린아이 눈에는 모든 게 기이하게만 보였던 시장 특유의 과잉된 활력과 생활 에너지는 몸에 새겨진 것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된 소년이 중간고사 기간 아침에 시험을 치르고 대낮부터 동대문 시장을 기웃거리게 된 것도, 마침 더블헤더로 열린 프로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외야석에 자리를 잡고 청색 유니폼의 청룡과 흰색 유니폼의 슈퍼스타즈가 나른한 봄날의 오리떼처럼 한가로이 치르는 경기를 지켜본 것도, 모두 동대문의 강렬한 첫인상에 끌린 덕분이었다.
박민규의 소설처럼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고 칠 수 없는 공은 치지 않는 슈퍼스타즈 특유의 야구가 5월의 화창한 햇살과 묘하게 어우러져 한창 사춘기에 빠져 있던 ‘될 대로 되라 마인드’의 소년과 만난 그날. 우측 외야석 상단에서 멀고 먼 홈플레이트에 아지랑이(흙먼지였는지도 모르겠지만)가 피어오르는 경기를 지켜보다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오후를 흘려보내던 그때의 시간들은 살면서 몇 없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눈을 감고 듣는 타격 소리, 포수 미트에 박히던 투수의 속구 소리, 이어 운동장 밖에서 들려오는 시장의 소음들. 그것은 자동차와 사람이 뒤엉켜 도시의 탁한 대기 속에서 만들어내는 생활의 파열음들이었다. 누워서 바라보면 하늘과 운동장 스탠드의 둥근 처마가 어안렌즈로 들여다보는 듯 기이하게 보였다. 운동장 밖은 어쩐지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프로의 세계, 운동장 안은 어찌되었든 그보다는 편안한 아마추어들의 세계. 아마 야구 같은 프로야구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마침 딱! 정신을 차려보니 슈퍼스타즈의 투수가 던진 흐느적거리는 직구를 청룡의 타자가 ‘난 프로가 될 거야!’ 하는 느낌으로 받아친 공이 좌측 펜스를 시원하게 넘어가는 중이었다. 하품이 나올 것 같던 정적을 여지없이 깨는 결연한 의지의 홈런. 결국 아마 야구를 고수하던 슈퍼스타즈는 그해 봄까지만 야구를 하고 여름 무렵 프로를 영영 떠나고 말았다. 아마 1985년이었을 것이다. 딸이 좀 더 크면 옛날이야기처럼 해주고 싶은 나의 추억들이다.
딸의 동대문은, 그 첫인상은, 동대문을 직접 보려고 아빠와 길을 건너 천川을 지나 한참 걸어 도착했지만 문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상한 이야기와 맞닥뜨린 기억과 거기서 바라본 우주선의 기억이 합쳐진 형태로 남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봄에 스케이트를 사러 갔던 아빠의 경우와 어떤 측면에선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특히 우주선은 내 어릴 적 아이의 시선 속에서 압도적 스케일로 다가왔던 운동장 벽면처럼 꽤 강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을까. 어른의 눈에도 큰 스케일은 아이의 눈엔 불가사의한 크기로 보일 것이다.
아이가 우주선이라 부른 건축물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다. 과거 서울의 동측 관문이었던 흥인지문興仁之門과 성벽,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던 지역의 역사적 의미까지 따지고 든다면 장소와 무슨 상관일까 싶은 뜬금없는 건축물이지만 어쨌든 국제 공모를 통해 설계안을 뽑았고 오랜 시간 막대한 돈을 투입한 끝에 완공에 이르렀다.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는 건물의 개념을 ‘환유의 풍경’이라 명명했는데 직유와 은유도 아니고 하필이면 다소 낯선 ‘환유’라는 수사를 내세운 것을 보면 이 건물이 특별히 낯선 이유가 ‘나도 모르는 나를 보여준다’는 식의 환유적 수사 개념에 기인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동대문 일대를 이방인의 눈으로 응시했을 건축가는 과거의 맥락을 더듬기보다는 돈, 물건, 사람이 폭발하는 미래의쇼핑 중심지로 읽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현재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극단을 오갈 수밖에 없다.
과거에 어떤 역할을 했던 장소든, 근대화 과정에서 동대문이라는 장소가 어떤 변화를 겪었든, 운동장과 시장이라는 특별한 장소성을어떻게 해석하든, 1970~80년대의 서울을 기억하는 아스팔드 키드의 추억 따위와 상관없이, 정책 결정자의 눈에는 동대문이라는 장소가 그저 24시간 밤낮없이 돌아가는 상업 중심지로 보였을 테고, 그런 정책적 판단을 바탕으로 가장 어울릴 만한 선택지를 뽑아들었을 뿐이다. 절차에 따라 선택했고 지어졌으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든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한정판 명품 백을 덜컥 산 후 주변 반응이 기대보다 안 좋다고 쓰던 것을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뭔가 우리도 세계적인 건축가의 명품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고른 디자인이라면 명품인지 아닌지 판단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고.
쇼핑 빌딩들의 성벽 뒤편 골목마다 작은 가게들이 밀집한 생활전선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는데,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운동장 안의 느릿느릿한 한가로움과 대치하며 기묘하게 공존했던 애틋한 장소와 기억은 모조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온통 흰벽에다 동물의 내장처럼 구불구불하게 만든 내부 공간을 뱅글뱅글 돌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 직원에게 길을 묻고, 그러고도 또 헤매다가 결국 옥상까지 올라와 (건축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에겐 흔치 않은 일이지만) 지도를 펴 들고 확인하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바라보니 ‘들어가지 마시오’ 푯말이 붙은 옥상 잔디밭 너머 옛날 운동장 조명탑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아……!
스무 살이 넘어서도 시간 남고 딱히 할 일 없고 그런데 집에 있기는 싫은 날엔 가끔 설렁설렁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야구장에 놀러가 시간을 때웠다. 특히 해마다 봄날 고교야구 전국대회 서울시 예선이 펼쳐지는 시즌이면 텅 빈 외야석에 혼자 앉아 맥주와 땅콩을 먹으며 경기를 보았다. 고교생들의 경기는 오래전 슈퍼스타즈의 야구를 연상케 했는데 뭔가 실수투성이의 인간적인 플레이 속에서 내 인생도 지금의 야구처럼만 살면 되는 게 아닐까, 속 편한 다짐을 했던 것이다. 고요하고 한가롭게 흘러갈 것만 같은 평화롭던 시간들. 도시가 내게 건네는 훈훈한 나태함이 바로 거기 있었다.
5년이라는 공사기간 동안 5,000억 가까운 돈이 들었고 매년 수백억의 유지비가 들어간다는 새로운 기념비 위에서 미래가 아닌 과거를 생각하며 장소적 위로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왠지 죄 짓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잔디밭에 들어가고 싶어 주저하는 아이에게 그냥 밟고 놀아, 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소심한 아빠는 이 건물이 훗날 아이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고민하던 아이가 마침내 에라 모르겠다, 잔디 위를 뛰어다닌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다른 집 아이도 때는 이때다, 같이 뛴다. 멀리 관리 직원이 아이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쨌든, 이런 장면에서 새로운 맥락의 동대문 이야기는 막 시작하는 중이다.
최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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