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서 본격적인 겨울을 알리던 어느 월요일 오후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을 만났다. 4년 만에 발표한 첫 정규 앨범 < I Was, I Am, I Will >이 이전의 그에게 없던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한창 기대감을 높여가던 차였다. 추운 겨울 만난 최고은은 앨범에서 우직하고 때로는 어두워 보이던 그 목소리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첫 앨범 제목 < I Was, I Am, I Will >을 따라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물어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최고은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꾹 눌러 담아낸 앨범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넓었다. 때로는 준비한 질문들과 예상한 대답 사이의 경계마저도 넘어서버려, 내내 만족스러우면서도 이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걱정이 되는 인터뷰였다.
[I Was]
음악가로서 이력이 독특합니다. 어린 시절에 국악을 배운 경험부터 대학교 때는 하드코어 록 밴드에 몸을 담고 있었고요. 계속 음악과 같이하는 삶을 살던 셈인데 개인적인 음악사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국악은 초등학교 때 방과 후 활동을 하면서 시작했어요. 재미도 있었고 입상도 하면서 대학을 국악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렇게 가야금 병창으로 진학을 준비하다가 막상 낙방을 하고서는 이걸 계속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들더라고요. 국악을 평생 취미로 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일반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1학년 때 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교내 동아리 밴드 공연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어서 지원하고 활동을 하게 되었고요. 그게 들어가고 나서 보니 하드코어 밴드였는데 하드코어 장르를 잘 모르니까 1학년 때는 많이 헤매다가 나중에 즐겁게 하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하자는 생각은 아예 없었고요. 다만 친구들한테 종종 음악을 선물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런 노래들을 모아서 우연히 EP를 내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된 거죠.
당시 하드코어 밴드를 할 때는 지금과 스타일이 달랐나요?
달랐죠. 창법이 완벽하진 않았어요. 남자 노래를 부르는 경우도 많다 보니까 그로울링 같은 창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요. 엑실리아(Exilia) 구아노 에이프스(Guano Apes) 에반에센스(Evanescence) 커버를 많이 했고 인기가 많았던 건 롤러코스터나 넬 같은 음악이었어요. 저는 완전 센 노래뿐만 아니라 발라드도 하고 팝도 부르고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 동아리 분위기가 그렇긴 했는데 또 지금 학번들은 완전 하드코어 스타일으로 알고 있어요.
대학시절에는 여성학 전공을 했어요. 학업에 계속 뜻을 두다가 음악을 시작했고요. 학업을 계속할 생각은 이제 없나요?
그렇다고 봐야죠. 그래도 공부라는 걸 놓지는 않고 있어요.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우물을 파는 식의 공부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책을 읽는다든지 하면서요. 삶에서 인문학적인 생각들을 계속하고 그런 지식들을 화법과 행동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공부는 필요한 것 같아요. 학위를 위한 공부 생각도 막연하게나마 해요. 어디를 목표로 하는 공부는 아니지만 강의나 세미나에 다닌다는 식으로 작게 실천을 하고 있어요. 저는 제가 직접 가사를 적잖아요. 공부를 함으로써 관점이 달라지고 화법에도 그렇게 살이 붙는 거죠.
다양한 이력에 비해 첫 데뷔는 의외로 포크 음악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원래 노래 부르는 것만 좋아했지 기타 연주 같은 건 잘 몰랐어요. 다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가야금을 했고 피아노도 배웠기 때문에 혼자 배우기가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독학을 할 때도 코드나 노래로 배워간 것이 아니라 제가 내고 싶은 음을 찾아서 연구하고 쳐보고 그랬고요. 어디서 작곡을 따로 배운 적은 없다보니 이론적으로 굉장히 얕은 대신 좋아하는 소리 위주로 만들고 거기에 가사를 얹는 식이었던 거죠.
진지하게 음악을 해야겠단 생각은 언제였나요?
두 번째 EP때였어요. 처음으로 단독 공연을 가졌는데 내 공연을 사람들이 돈 주고 온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거든요. 그런 사실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음악에 하는 것에 대해 겁을 먹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앨범을 내도 멜로디나 가사만 바뀔 뿐 다 똑같은 음악일 것 같았거든요. 제 이름을 걸고 공연하는 것의 의미 자체도 잘 모를 정도였어요. 그 때를 기점으로 생각을 바꾸자고 마음을 먹었지요. 바꾸지 않는다면 음악적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 없겠구나 싶었고요. 지금은 음악을 하자는 마음에 흔들림은 없어요. 부족함은 있지만.(웃음)
작년 유럽 투어를 떠났고 그 경험으로 작은 라이브 앨범 < Real >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투어를 진행하게 되었나요?
독일에 있는 송스 앤 위스퍼스(Songs & Whispers)라는 음악 네트워크에서 아시아 음악시장에 관심이 있어서 제게 연락을 준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거기에는 한 달에 두 팀 정도를 초청해서 공연을 기획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마침 그곳 인턴으로 한국 분이 계셨거든요. 그 때 그 분이 저를 선택하신 거예요. 그렇게 연락을 받았고 1년 정도 준비를 해서 투어를 했어요.
투어 동영상 당시 발매된 앨범을 보면 공연장이나 라이브 분위기가 일상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특별히 투어를 하면서 의도한 점이나 콘셉트가 있었나요?
공연장은 그 쪽에서 잡아줬는데 일상적으로 문화를 소비하는 공간에는 다 갔던 것 같아요. 커피숍, 극장, 클럽, 공연장 등등. 일상적인 곳에서 녹음을 하자는 아이디어는 유럽투어 이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였어요. 라이브 앨범이랑 유럽 투어를 따로 진행하기에는 너무 비용이 커서 < Real >앨범의 콘셉트와 유럽 투어를 같이 합치게 된 거죠.
글래스톤 베리에서도 공연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다녀왔나요? 특별한 에피소드들이 있었는지요?
뮤콘같은 국제 음악 박람회가 에이팜이라는 이름으로 울산에서도 열려요. 그곳은 성향이 월드뮤직에 가까워요. 거기서 제가 공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CD를 듣고 싶다고 해서 인사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 분이 글래스톤 베리 실버 헤이즈 존의 책임자 말콤 헤인즈(Malcolm Haynes)였어요. 그렇게 연락이 닿아서 무대에 오를 수 있었어요.
제가 공연했던 시간은 정규 타임테이블이 시작도 하지 않은 정말 첫 타임이었거든요. 아침 10시, 11시 정도의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끝나고 나서 피드백을 주고받는데 같이 했던 무대 스태프들에게서 즐거웠다고 그날의 손꼽힐 만한 공연이었다는 칭찬도 들었어요. 그래도 사실 관객들 호응 측면에서는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기가 어려운 시간이었죠.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제가 공연한 구역에서만 240팀 정도가 공연하는데 서로서로 인지도가 낮잖아요. 근데 저는 그런 점들이 오히려 좋더라고요. 일단 거기선 전기사용이 어려웠고 물 사용도 까다로워서 샤워도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아티스트나 관객이나 그런 상황을 불평 없이 즐기면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좋았어요. 그런 불편함이 저는 처음이라서 그런지 기꺼이 견딜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만큼 어린이부터 장애인, 노년층까지도 다 함께 참여하는 공연이었어요.
[I Am]
이제 지금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첫 앨범이 나왔는데 주변의 반응이 어떤가요?
여태 나왔던 앨범들보다는 반응이 많은 편이에요. 기존의 앨범에 비해 달라졌다는 반응이 많은데 그 달라졌다는 걸 나쁘게 보는 게 아니라 발전하려고 노력했구나 생각해주는 내용이 많아서 다행이었어요.
이런 저런 음악활동을 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정규 앨범은 처음이에요. 이렇게 늦어지거나 더뎌진 이유가 특별히 있나요?
정규앨범이라는 것이 어쩌면 낡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미니앨범과 싱글과는 다르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첫 정규 앨범은 뭔가 명찰을 차고 저를 소개하는 느낌처럼 해야 한다고 느꼈고요. 그런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저희만의 녹음의 방식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고 그 방식에서 한 곡씩 자연스럽게 분만하는데 4년이 걸렸어요. 시간이 점점 지나서 이젠 나올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온 것이 < I Was, I Am, I Will >인 거예요. 4년은 그런 의미에서의 시간이었고 돌아보면 긴 것 같은데 겪어오던 시간은 짧았던 시간이었죠.
녹음에 있어서도 차이가 보입니다. 어떤 차별점이 있었나요?
모두 원테이크로 녹음을 했어요. 저한테는 원테이크가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연주나 노래 모두 보컬과 기타를 유기적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기타를 치지 않으면 보컬에서 강약을 조절하기가 힘이 들더라고요. 여운 처리라든가 분위기 전달에도 이질감이 있었고요. 두 번째 EP때 원테이크라는 방법을 찾아서 계속 쓰기로 마음먹은데다가 밴드 구성의 곡들을 따로 따로 연주하면 그 느낌도 달라져요. 실시간으로 서로 들으면서 같이 플레이 할 때 뭔가 에너지의 흐름이 생기거든요. 저희가 스스로 2년간 회의를 하고 특별한 얻어낸 녹음 방식인 셈이죠.
편곡에도 공을 들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주안점을 두고 편곡에 임한 것이 있나요?
밴드 곡 같은 경우는 편곡을 다 같이 했어요. 제가 기타와 멜로디를 가져가면 멤버들이 그걸 듣고서 자기 나름대로 색깔을 넣거든요. 그러다보니 각자 스스로의 색이 분명하게 드러난 거 같아요. 저희가 서로 직언을 해주는 타입이라서 밴드의 분위기가 굉장히 열려 있어요. 저를 빼면 그래도 다들 10년 20년씩 음악하신 분들이라 딱 얘기하면 다 알아듣고 하죠.
평소에 좋아한다고 밝힌 적 있던 김소연 시인의 시를 가사에 인용했습니다. 개인적 취향 외에도 시를 인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타만네가라」라는 시는 김소연 시인의 시인데 타만네가라라는 인도네시아 밀림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겪으면서 쓴 시예요. 저도 계속 순환하는 사람으로서 저의 이전 모습(I was)이 의지(I will)를 가진 개인이 되고 또 그런 의지가 다시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는 이미지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언제라도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과 자세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 마음을 담아내는 데 이 시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용했어요.
< I Was, I Am, I Will >이라는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앨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의 경험을 주제로 써나간 듯한 앨범 구성도 눈에 띄고요. 어떤 연유로 이런 구성을 취했습니까?
앨범의 주제가 전반적으로 I 예요. 수록곡들도 이 한 음반을 위한 노래들이 아니라 4년간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품어낸 곡들이었고요. 제 경험과 고민 정성을 담으려고 한 음악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대중성이 낮다는 이야기도 많은데 저는 저의 이야기를 제 방식으로 풀어내고 그리고 그런 것을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그런 것이 또 대중성이 된다고 봐요. 대중성이라는 건 유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결과물에 내가 없고 그게 그저 이전과 같다면 저는 그저 남의 노래를 취미로 듣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받고 지금까지 걸어온 삶을 음악으로 표현했을 때 사람들이 멋지다고 해주면 그게 대중적인 거고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렇게 고른 20여 곡 중에서 신곡 위주로 덜어내고 최대한 담다보니 지금의 앨범이 나오게 되었어요. 또 그렇게 담아낸 노래라서 서로 다른 장르들이 섞여있어도 저라는 이름 아래에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 Real >이후로 차츰 한글가사에도 익숙해지는 모습이 보입니다. 가사는 어떤 식으로 쓰시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가사에 있어서 직접적인 화법보다는 간접적인 화법이 더 편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적인 이야기의 부끄러움을 피하려고 처음엔 영어가사를 썼던 거고요. 그러고 나니 한글 가사라는 게 참 부끄럽더라고요. 가사를 써놓고 보면 제가 말하는 수준이 이것 밖에 안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이고 결국에는 가사가 그런 결과물들의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한글과 영어는 같은 단어라도 뉘앙스가 너무 다르잖아요. 그래서 표현을 찾을 때 영어가 표현에 더 맞는다면 영어로 가사를 쓰는 거고 한글이 더 낫다면 한글로 가사를 쓰고 있어요. 그러면서 수정을 많이 해요. 기타로 멜로디를 만들면서 생각나는 풍경이나 형태를 떠올려 단어들을 채집하고 그 표현들을 모두 끌어올려보는 식으로 가사를 써요.
국악을 소재로 한 곡들도 눈에 띕니다. 곡들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면?
「뱃노래 (Sailor`s song)」 같은 노래는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기타 연주를 하고 있는데 멜로디에 뱃놀이 가사가 잘 붙더라고요. 게다가 당시 < 캐리비안의 해적 >을 보던 때라서...(웃음)
어딘가 모르게 저에게 체화되어 있는 과거 국악의 경험들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서 다시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아리랑 (Arirang)」은 저번처럼 저희가 다음에 해외에 나가게 된다면 언젠가는 필요한 곡이 아닐까 생각도 들어서 만들게 되었고요.
[I Will]
이번 앨범의 덕분인지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음 음반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 I Was, I Am, I Will >은 저의 4년이란 시간을 정리하는 앨범이었는데 결국 왜, 그리고 어떻게 음악을 하는가를 계속 물은 것 같아요. 어떻게라는 측면에서 저는 장르보다 최고은 스스로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라디오헤드가 1집과 8집의 모습이 서로 다르지만 톰 요크(Thom Yorke)라는 사람의 모습 아래 하나의 이미지로 잡히는 것처럼 제가 말하고 싶은 바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계속 바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싶어요. 아까도 말했듯 저는 원점으로 돌아오고 싶은데 똑같은 저로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경험과 풍경을 보고 온 최고은으로서 돌아오고 싶은 거죠.
앨범에서 보여준 다양한 모습과는 별개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분야는 천편일률적으로 보이기 쉬운 위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비슷한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시나요?
저는 특별히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들으면 좋고 그걸 저와 비교하지는 않아요. 저는 음악을 들어도 그냥 한 부분이 좋으면 좋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제가 다른 여성 싱어송라이터 분들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멀리서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 분들이라도 실제로 다가가서 만나면 다 다르거든요.
공연과 앨범 중 어느 쪽에 더 주안점을 두세요?
저는 공연처럼 앨범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연이 앨범 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원테이크를 선호하기도 하고요. 사실 앨범 수록곡들도 많은 레코딩을 한 편은 아니에요. 저는 특히나 조금 틀려도 티가 확 나는 목소리거든요. 그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계속 원테이크에 맞도록 연습을 한 것도 있어요. 그래도 앨범과 공연이 다른 점이라면 앨범은 공연과 달리 이미지 없이 듣기만 하잖아요. 그래서 앨범을 눈 감고 들었을 때에도 연주하는 모든 에너지나 집중력이 잘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죠.
가장 좋아하는 앨범 혹은 노래를 세 개만 꼽아주세요.
아비샤이 코헨(Avishai Cohen)의 < At Home >랑 라디오헤드(Radiohead)의 < OK Computer > 좋아하고요. 국내에서는 롤러코스터 음악을 좋아해요.
인터뷰 : 김반야, 신현태, 이기선
사진 : 이한수
정리 : 이기선
2014/12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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