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무엇을 남기는가. 세월이 지난 뒤에 지금 이 순간은 무엇으로 기억되고 기념될 것인가. 책장처럼 펄럭이는 생각의 갈피에서 초가을 어느 날 사랑스러운 선물을 내놓으며 북유럽 여행담을 들려주었던 후배가 쑥 떠오른다. 우연히 ‘토베 얀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장에 들렀더라는 행운담이며 그 증표가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것은 그러나 곧바로, 15년 전쯤 무민 시리즈를 바톤 넘기듯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며 나란히 한숨 쉬고 웃었던 딸아이 손으로 건너가 지금껏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운 무민 볼펜을 새로이 구해보자고 100주년 기념 한정판 무민 캐릭터 상품을 검색하며 며칠 밤 내내 인터넷 매장을 방황했던 일이 쑥스럽도록 생생하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는 무민 시리즈를 읽으며 무민 골짜기에서 무민 가족과 그 친구들을 만나던 시간을 기념할 만한, 온갖 무민 캐릭터 상품에 대한 동경을 한꺼번에 위로해주는 선물이다. 화가 토베 얀손이 1952년 무민 이야기의 작가로 데뷔한 지 7년 만에 직접 쓰고 그린 이 첫 번째 무민 그림책은 무민이 ‘우유 가게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이른바 북유럽 감성의 색깔과 이미지로 펼쳐낸다.
다섯 시에 우유 가게에서 나온 무민이 우유로
가득 찬 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길은 멀고 무시무시했으며, 어둑어둑한 숲 속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한숨 쉬듯 윙윙 불었어요.
해질녘까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어요.
생각해봐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마지막 행의 ‘생각해봐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가 장면마다 후렴으로 되풀이되고, 그에 맞춰 과감하게 구성된 다이 컷die-cut 구멍은 무민이 나아가는 방향이며 앞으로 맞닥뜨린 사건과 인물을 살짝 살짝 보여준다. 이 다이컷은 하늘엔 열기구가 떠있고,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 미이가 숨어있는 등 흥미요소가 많아서 하염없이 눈길이 머무는 책장을 넘기는 동력이 된다. 그러나 로라 바카로 시거가 『세상의 많고 많은 초록들』에서 처음부터 구상하고 구현한 그것과는 달리, 출판사 측의 아이디어였던 모양이다. 앞 표지 뒷면에 요란한 크기와 모양의 캘리그라피가 ‘구멍은 출판사에서 낸 거예요!’라고 씌어있는 것을 보면, 마치 토베 얀손이 외치는 듯하다.
‘빨간 모자 소녀’처럼, 이영경의 그림책 『넉 점 반』이나 존 버닝햄의 『장바구니』의 주인공들과 다름없이, 심부름길의 무민은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한다. 동생 미이를 잃은 밈블을 돕느라 이리저리 헤맨다. 그렇게 펼쳐지는 무민골짜기의 온갖 풍경들이며 거기서 살고 있는 온갖 트롤 친구들은 무민에게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데, 이 점이 바로 무민 이야기를 모조리 꿰고 있는 독자들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는 즐거움이다.
아이의 심부름 이야기는 작은 오딧세이라 할 만하다. 세상 모든 오딧세이- 귀향 이야기가 그렇듯 위험한 방랑과 방황은 끝이 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무민은 가장 완벽한 행복에 이른다. 바로 엄마 무민마마가 장미꽃밭에서 빨간 까치밥나무 열매를 모으다가 ‘어서 오렴’ 하고 반겨 주기 때문이다. 온갖 어려움과 유혹을 이겨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데 대한 참으로 합당한 인사, 예정된 시간 내에 심부름을 성공적으로 해내었는가를 따지며 다그치느라 세상 모든 엄마들이 깜박 잊곤 하는 그 인사 말이다.
뒤이어지는 작은 반전과 무민마마의 다정하고 지혜로운 대처 또한 이 그림책을 비롯한 모든 무민 이야기가 지닌 ‘평화의 향기’이다. ‘우리, 지금부터 주스를 마시자꾸나’라는 무민마마의 세리프는 엄마 또는 리더가 구성원들의 실수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대한 멋진 상징으로도 읽히는 것이다. 실제로 무민마마는 공동체를 사랑과 지혜로 이끄는 리더십 모델로 거론되며, 12년간 핀란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여성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의 별명이기도 했다.
무민이 조바심치며 헤매어 다니는 무민 골짜기의 시간과 그 결말의 행복을, 먼저 나에게 선물하고 싶다. 노란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의 빨간 장미와 까치밥나무 열매로 꾸민 식탁에 둘러앉아 무민마마의 목소리를 들으리.
미리 읽거나 함께 읽을 무민 이야기
즐거운 무민 가족 세트
토베 얀손 글, 그림/햇살과나무꾼 역 | 소년한길
토베 얀손이 직접 그린 캐릭터들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토베 얀손은 북유럽의 척박하고 사나운 자연을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합니다. 겨울이 길고 혹독한 핀란드처럼 무민 가족이 살고 있는 무민 골짜기는 겨울이 되면 엄청난 추위에 휩싸이며 모든 것이 눈 아래 파묻혀 버립니다. 책 곳곳에 묘사되는 거칠고 사나운 바다와 기기묘묘한 식물이 가득한 숲을 보며 저 멀리 북유럽의 이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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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토베 얀손 글,그림/이유진 역 | 어린이작가정신
무민이 심부름을 갔다가 밈블과 미이와 만나 흥미진진한 모험 끝에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담긴 이 책으로 토베 얀손은 스웨덴도서관협회가 최고의 아동 문학가에게 수여하는 닐스 홀게르손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민 책들 중 단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뚫린 구멍 틈새로 보이는 무민 골짜기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무민과 밈블과 미이와 함께 무시무시하게 재미있는 모험을 떠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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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그림책 번역가로 그림책 전문 어린이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와 그림책작가 양성코스‘이상희의 그림책워크샵’을 운영하면서, 그림책 전문 도서관 건립과 그림책도시 건설을 꿈꾸고 있다. 『소 찾는 아이』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은혜 갚은 꿩이야기』『봄의 여신 수로부인』등에 글을 썼고, 『심프』『바구니 달』『작은 기차』『마법 침대』등을 번역했으며, 그림책 이론서 『그림책쓰기』,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를 펴냈다.
앙ㅋ
2015.01.22
가득 찬 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길은 멀고 무시무시했으며, 어둑어둑한 숲 속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한숨 쉬듯 윙윙 불었어요.
해질녘까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어요.
생각해봐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무민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이끌어서 아기들이 열광하는것 같아요.
눈부신햇살
2014.12.10
저도 아이들도 너무 좋아라하는 인형~~!! 도서의 내용도 너무 좋아요!!
감귤
2014.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