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나는 책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 산책
2주간 ‘책, 임자를 만나다.’ 시간에서 빌브라이슨과 함께 유럽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습니다. 방송에서도 전해드렸지만 빌브라이슨 이라는 너무나 독특한 저자의 성격과 필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직접 책 속 문장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죠. 그래서 지난 ‘소리나는 책’ 시간에서도 한 번 전해드렸지만, 다시 한 번 이 시간에서 읽어드릴까 합니다.
이렇게 외롭고 약해지자 나는 갑자기 고향의 간이식당 하나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식당 이름은 ‘와이 낫 그릴’이었는데, 사람들은 농담으로 그 이름이 ‘와이 낫 컴 인 앤 겟 푸드 포이즈닝’의 약어일 거라고 말했다. 식당의 위생 상태를 보면 그 이름 ‘구이 요리를 들지 그러세요?’가 실은 ‘들어와서 식중독이나 걸리지 그러세요?’라는 이런 해석도 일리가 있었다.
그 식당은 좀 이상한 곳이었다. 실은 형편없는 곳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청소년기의 많은 것이 그렇듯이, 이 식당 역시 훌륭하면서도 형편없는 곳이었다. 음식은 형편없었고, 식당 여종업원들은 성질 급하고 멍청하기로 악명 높았다. 요리사들은 항상 위생관념이 희박한 탈주범들이었다. 이들은, 무절제한 생활의 특징이기도 한, 코감기에 걸려 항상 훌쩍댔는데, 코끝에는 예외 없이 콧물 한 방울이 매달려 있곤 했다. 주방장이 몸을 돌려 주문한 음식을 자신 앞에 내놓았을 때는 코끝에 매달려 있던 수분은 이미 간 데 없고 주문한 햄버거 표면에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게 내려앉아 윤기를 더해 주고 있다는 걸 체념의 미학을 체득한 손님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 『빌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빌브라이슨/21세기북스) 中에서
에디터 통신
▶ 대한민국 다시 걷고 싶은 길
걷고 또 걸어도 다시 걷고 싶어지는 우리의 길.
요즘 저는 점심시간이 두렵습니다. 특히 햇살 환하고 바람 산들산들 부는데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까지 두둥실 떠 있으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지거든요.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좋은 날, 꼭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하고 동료들과 함께 탄식하며 마음만 싱그러운 풍경 속으로 떠나보냈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좀 다를 겁니다. 지난 봄 내내 ‘이 책만 만들고 나면 두고 보라지!’라고 마음을 억눌렀던 책이 드디어 나왔으니까요.
안녕하세요, ‘걷고 또 걸어도 다시 걷고 싶어지는 우리 길’을 담은 책, 『대한민국 다시 걷고 싶은 길』을 만든 위즈덤하우스 편집부 정지연입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국내여행 전문 여행작가들의 모임인 한국여행작가협회의 걷기여행책입니다. 걷기의 즐거움에 푹 빠진 여행자들을 위해 우리나라 전역에는 길들을 조성하느라 여념이 없는데요, 수도권부터 제주도까지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샅샅이 누빈 여행작가들이 무수한 길들 가운데 친환경적으로 정비해 자연 그대로 황홀한 길들, 그중에서도 이상하게 자꾸만 찾게 되는 길, 지역민들이 유난히 사랑하는 길을
엄선해 이 책에 실었습니다.
여행책을 만들 때 가장 곤란한 점은 눈앞에 아름다운 길과 풍경,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제 엉덩이는 자꾸 들썩이지 못하도록 의자에 눌러 앉혀야 한다는 겁니다. 전북 무주 내도리에 있는 금강마실길 편을 작업할 때 특히 그랬습니다. 1971년에 만들어진 금강마실길은 길 자체도 아름답지만 길이 만들어진 사연은 더 애틋합니다.
금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바람에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내도리 뒷섬마을 부모들이 비만 내리면 마을에 갇히는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강변에 거대하게 솟아 있던 질마바위를 일일이 망치와 정으로 쪼아 낸 길이거든요. 금강마실길은 금강 벼랑을 따라 질마바위를 뚫고 고요한 강변길이 이어집니다. 40여 년 전, 부모가 애타는 마음으로 만들어준 이 길을 아무 걱정 없이 오가며 개구지게 장난쳤을 까까머리 아이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왠지 그립습니다.
어느새 봄꽃들이 진 자리에 초록빛 잎사귀들이 눈부시게 일렁이는 초여름입니다. 제주도 선흘곶자왈 동백길을 소개해 주신 여행작가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 점점 우거지는 숲속을 걷노라면 자연은 오랜 시간 공들인 초록빛 아래로 아픔까지 가라앉히는 것 같다고요. 마음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면, 단지 날마다 무의식적으로 쳇바퀴처럼 오가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됩니다.
저는 이제 『대한민국 다시 걷고 싶은 길』 들고 떠납니다.
이동진
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