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이 라자냐에 빠진 날
아스날과 토튼햄.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이 두 팀이 부딪치는 날,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경기, '북런던 더비'가 펼쳐진다.
글ㆍ사진 hungarida
2014.03.19
작게
크게

어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들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축구팀과 사랑에 빠지면, 연인보다 조금 더 끈적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른바,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 나의 팀이 매일 승승장구하며 행복하고 평화로운 연애가 지속되면 참 좋을텐데, 뻔한 스포츠 만화처럼 현실에서도 어김없이 라이벌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긴다. 이때 내가 순순히 상대팀의 승리를 인정하고 박수쳐줄 것을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하며 상대를 향해 매우 불편한 감정에 휩싸일 뿐이다. ‘다음에는 당한만큼 돌려주리라’ 이를 박박 갈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이야기할 우리의 라이벌은 그런 라이벌이 아니다.

라이벌. 국어사전의 정의를 빌리자면,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 리그 우승을 향해 경쟁하는 강팀은 모두 아스날의 라이벌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별난 ‘라이벌 아닌 라이벌’이 하나 있다. 라이벌이 아닌 이유는, 언제나 우리가 승리하니까(사실은 가끔 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인 이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하는 상대니까. 클럽 앰블럼에 '닭'이 새겨져있는 그들의 이름은 ‘토튼햄 핫스퍼’. 아스날과 토튼햄.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이 두 팀이 부딪치는 날,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북런던 더비’가 펼쳐진다.


[출처: Arsenal Legends - Thierry Henry, BBC Match of the Day] 

아스날과 토튼햄이 처음부터 이렇게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갈등의 시작은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아스날 홈구장은 런던 남동쪽 플럼스테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리적인 이유때문에 관중 수입이 신통치 않았다. 결국 북런던의 하이버리로 경기장을 옮기게 되었고, 이 결정에 토튼햄은 분노했다. 왜냐하면 하이버리는 토튼햄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으로부터 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스날과 토튼햄은 가장 근접한 이웃인 동시에 로컬 라이벌로서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북런던 더비’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치열한 더비 경기 중 하나가 되었다.

워낙 사이가 안좋은 두 팀인지라 서로간의 선수 이적도 극히 드물었는데, 2001년에 토튼햄 팬들을 충격에 빠트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토튼햄의 주장이자 핵심 선수였던 솔 캠벨이 재계약을 미루고 있었고,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날 수는 있어도 아스날과는 계약하지 않을 것” 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문제는, 캠벨이 결국 아스날행을 택했다는 것. 아스날 팬들은 라이벌의 주장을 뺏어왔다며 토튼햄을 조롱했고, 이에 일부 과격한 토튼햄 팬들은 그를 ‘유다’ 라고 부르며 살해 협박까지 했다. 캠벨은 아스날로 이적 후, 토니 아담스와 함께 단단한 중앙 수비를 구축했고, 바로 그 시즌 아스날에서 프리미어 리그와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상상해보라. 우리팀의 주장이었던 선수가 라이벌 팀으로 넘어가 대활약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얼마나 속터지는 일인가.


[출처: Sky Sports] 

서로간의 깊은 감정의 앙금과는 별개로, 아스날과 토튼햄의 싸움에서 승자는 늘 아스날이었다. 1995년 이후, 현재까지도 토튼햄은 최종 리그 순위에서 아스날 위에 올라선 적이 없다. 그런데 중간에 딱 한 번, 토튼햄이 아스날을 넘을 뻔한 적이 있었다. 2005-06 시즌, 리그 한 경기를 남겨두고 토튼햄은 4위, 아스날은 5위. 토튼햄은 마지막 경기였던 웨스트햄전을 이기면 그대로 4위를 확정짓는 상황이었다. 4위는 챔피언스 리그, 5위는 한 단계 아래의 UEFA컵을 의미하므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위해 4위 자리는 아스날, 토튼햄 모두에게 절실했다.

드디어 아스날을 추월할 11년 만의 거사를 앞둔 경기 전날 밤, 토튼햄 선수단은 평소대로 저녁 7시쯤 런던 카나리 와프의 메리어트 호텔에 모였다. 호텔 측은 선수들을 위해 특별한 뷔페를 준비했고, 대다수의 선수들이 라자냐를 먹었다. 그런데 새벽 5시, 토튼햄의 주전 선수 10명이 갑작스런 구토와 설사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비즈, 타이니오, 킨, 도슨, 캐릭, 레논, 체르니, 데이븐포트, 바나드, 리. 그 중에서도 캐릭의 증세가 제일 심했고 걷는 것조차도 어려워했다. 이에 토튼햄의 회장 다니엘 레비는 프리미어 리그 측에 경기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프리미어 리그 최고 경영자였던 리차드 스쿠다모어는 클럽간 합의한 결정에 맡기되, 때에 따라서는 클럽을 처벌하거나 승점을 삭감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토튼햄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잘 서있지도 못하는 10명의 선수를 데리고 중요한 경기를 치러서 4위에 오를 기회를 날리느냐, 혹은 승점 삭감을 감수하고 경기를 연기시키느냐. 어느 쪽으로든 챔피언스 리그에서 뛸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팀이었던 웨스트햄은 경기를 연기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다음 날로 미뤄지는 것은 원치 않았고, 3시 경기를 7시로 연기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다. 토튼햄도 4시간 정도면 선수들이 회복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이때는 낮이었고 웨스트햄 팬들이 경기장 주변에 모여들어 있었다. 경찰은 갑작스레 경기 시간을 4시간이나 연기하면 이들을 안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고, 2시간만 연기하는 것만 허락했다. 토튼햄 입장에서 2시간을 연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예정대로 경기는 오후 3시에 시작되었다. 결국, 토튼햄은 패했고 아스날은 승리하면서, 두 팀의 순위는 토튼햄 5위, 아스날 4위로 극적으로 뒤바뀌어 운명의 여신은 또다시 아스날을 향해 웃었다.

[출처: 데일리 미러, 텔레그라프, 데일리 메일 캡쳐] 

당시 토튼햄의 감독이었던 마틴 욜은 말하길, “무슨 음모가 깔려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고, 클럽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커다란 뷔페였고, 수많은 접시와 스테이크, 치킨, 각종 음식들이 있었다. 새벽 5시쯤, 선수들이 아프기 시작했고, 아침이 되자 6, 7명이 아프게 되었다. 오후 1시, 클럽 회장과 비서는 이 일을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아팠기 때문에 환경 건강 담당관도 호텔을 방문했다. 과거에 두세명의 선수가 아팠던 적은 있으나, 같은 날에 10명이 아팠던 적은 처음이다. 어떤 방해 공작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모르는 일이다.”

잉글랜드 보건국은 호텔 음식의 샘플을 가져가 조사했지만 음식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선수들의 증상이 노로바이러스로 인한 바이러스성 장염이라는 것만 밝혀졌다. 이후, 당시에 토튼햄 선수연던 조니 잭슨은 ‘라자냐 게이트’는 과장된 것이며, 실제로 아팠던 것은 마이클 캐릭 한 명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누가 아팠고 안아팠고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결과는 변함없이 토튼햄이 드라마틱하게 또다시 아스날에게 밀렸다는 것이고, 두고두고 놀릴 수 있는 좋은 이야기거리까지 생겼다. 특히, 이 사건을 기념(?)하여 토튼햄 팬들을 조롱하는 <라자냐> 응원가도 만들어졌다. 아스날 팬들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토튼햄을 조롱할 때 광범위하게 불려진다고 한다.



Lasagne woooah! (라자냐 오오오!)
Lasagne woooah! (라자냐 오오오!)
We laughed ourselve to bits (우리는 엄청 웃었지)
When Tottenham got the s**ts (토튼햄이 X을 먹었을 때)


[출처: BT Sport] 


돌아보니 내가 아스날과 연애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인 것 같다. 한끝 차이로 아스날이 아닌 그 옆동네의 토튼햄과 눈이 맞았다면, 라이벌 팬들의 조롱까지 더해져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아스날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느껴왔는데, 역시 행복은 상대적인 것인가 보다. 아스날을 넘어보겠다는 토튼햄의 바람은 올해도 이뤄지기 어려워보인다. 우승권에서 경쟁중인 아스날은 토튼햄과 이미 차이가 벌어져 더 위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2014년의 첫 ‘북런던 더비’의 승부도 토마스 로시츠키의 놀라운 골에 힘입어 아스날의 1:0 승리. 월요일 출근의 부담 때문에 이 멋진 골을 직접 보지 못하고 잠을 청한 나의 선택은 조금 아쉽지만, 어쨌든 라이벌을 꺾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축구팀과 사랑에 빠진 그들은 팀과 운명 공동체가 된다. 아스날의 라이벌은 나의 라이벌이 된다. 라이벌의 팬들도 나의 라이벌이 된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가 읽기 싫어지고, 아델의 노래를 잘 안듣게 되고, 주드 로의 영화가 점차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도 그들 모두가 토튼햄 팬이기 때문일까. 유치해도 어쩔 수 없다. 그깟 공놀이는 당신이 우리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질문한다.

“축구 좋아하세요? 혹시 어느 팀 좋아하세요?”




[관련 기사]

-아스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챔스’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웨일스에서 온 그대
-네 마리 토끼를 좇는 모험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스날 #토튼햄 #북런던 더비 #라자냐 #솔 캠벨
2의 댓글
User Avatar

부레옥잠

2014.03.25

저는 국대 경기정도만 챙겨보는 사람인데 슬슬 이쪽도 발을 들여놓아볼까요? 왠지 헤어나올 수 없을 거 같아서 두렵지만..
답글
0
0
User Avatar

doh12

2014.03.19

Once a gunners! Always a gunner!
답글
0
0
Writer Avatar

hungarida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주변에 흔한 보통의 서울 남자. 아스날과 12년째 연애중. 트위터 아스날 가십(@AFC_Gossip)에서 아스날 소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