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일 과거사를 고민하다
‘답사기’ 일본편은 단순히 일본의 문화유산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어떤 관계였고, 고대 일본문화에 우리 한반도인들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발로 눈으로 확인하고 쓴 책이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일본편에서 1권 ‘빛은 한반도로부터’(규슈)는 일본이 고대문화를 이룩하는 데 한반도 도래인이 전해준 문명의 영향,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터를 잡고 눈부신 자기 문화를 만들어낸 감동적인 이야기를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답사한다.
글ㆍ사진 엘프에디터
20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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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는 현재의 고전(古典)이다. 발간 20년 동안 33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임은 이를 증명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는 그의 책을 지탱해 준 힘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국내 여행을 갈 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를 경전처럼 지닌다. 이 책의 저자 명지대 유홍준 석좌 교수 교수는 평생 갈고 닦은 미술사를 사회적인 실천의 방향으로 발화해온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문화유적지를 두루 다니며 20년 간 일곱 권의 책을 낳았다. ‘낳았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필자 역시 이 책을 읽었기에 가능하다. 해산의 고통을 이긴 결과, 저자는 일반적인 기행서의 저자들의 행로 그 이상을 밟아가고 있다. 그는 학자이지만 매스컴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문화재 관련직을 수행하면서도 스스로 괴롭다고 여긴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펙’도 감당하지 못하는 ‘열정’의 소유자다. 이제는 바다를 건너,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으로 진출했다. ‘유홍준의 일본 속의 한국문화유산답사기’는 일본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섬, 규슈에서 시작한다.


첫째날(12월 11일, 수요일)

한국에는 함박눈이 쏟아지던 12월 11일 아침, 한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답사단이 일본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다. 이번 여행은 창비 출판사 주최로 일본 관광청의 후원을 받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1’의 북규슈 지역 답사를 재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유 교수와 일본 답사에 함께했던 23년 경력의 박인숙 가이드가 이번 답사에도 우리와 동행했다.


-요시노가리 역사공원(pp.25~59)

높은 경쟁률을 뚫고 행운의 기회를 누리게 된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독자들을 반긴 것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였다. 발길을 재촉해 첫 번째 답사 장소로 향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가는 유적지의 첫 번째 주인공은 사가현에 위치한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이다.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약 700년의 야요이 시대의 유적지다. 매표소를 지나니,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들판과 군데군데 목조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모습은 기원후 3세기 말기를 복원한 것이다. 하늘엔 먹구름이 드리웠고 비는 여전하지만, 답사의 첫 장소이니만큼 의욕적으로 답사에 임했다.


다행히 한국어가 가능한 안내원을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요시노가리 공원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었다. 먼저 간 곳은 지배층의 것으로 짐작되는 남내곽이다. 망루 네 채와 함께 약 20동의 건물이 복원되어있는데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인 독자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 남쪽 편에 있는 마을은 망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일반인들이 살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집은 반 지하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허리를 굽히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의 모습을 재연한 장면이 펼쳐진다. 반 지하 형태인 까닭은 온도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구조이기 때문이란다. 벼농사를 하던 시대지만 귀족들은 농사일을 하지 않았기에 창고가 없는 것이고, 불을 땐 흔적을 보아 난방이나 소등을 했을 것이다. 건물의 형태가 다들 비슷하지만 주변 건물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추정을 하는데, 입구에서 가장 먼 집이 왕의 거처이며, 남쪽부터 북쪽으로 갈수록 중요한 지역이다. 여러 건물 중 새가 얹혀진 건물이 있는 데 이곳은 신의 대리자의 집으로 추정된다. ‘도리이’라고 불리는 이 생소한 표시는, 2박 3일 동안 자주 볼 수 있었는데, 한국의 솟대(민간신앙을 목적으로 또는 경사가 있을 때 축하의 뜻으로 세우는 긴 대)나 홍살문(궁전ㆍ관아(官衙)ㆍ능(陵)ㆍ묘(廟)ㆍ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기둥만 있었던 것을 다른 지역에 존재하였던 것을 짐작하여 새의 모양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일행들은 남내곽을 지나 제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이 있는 북내곽, 왕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이 매장되어있던 북분구묘, 전시관에 있는 청동기, 토기 등의 유물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청동검과 토기들이 국사 교과서에서 보던 것과 얼추 비슷하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한 구절,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문화란 생명체와 같아서 움직이고 흘러가고 변모한다는 책의 한 구절이 오래 남는다. 그치지 않는 역사논쟁으로 현재, 한일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원활하지 않다. 그러나 함께 흘러온 시간을 무시할 수도 없고, 잘못된 것을 그냥 흘러가게 들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알려고 노력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때마침, 하늘에 넓게 펼쳐진 무지개에 마음을 빼앗겨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첫 날부터 비가 온다고 투덜대었지만,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린다. 망루에 걸쳐 드리워진 그날의 무지개는 평생 본 것 중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


‘꽃보다 경단’ 이라는 일본의 옛말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한국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을 맞은 답사단은 찬 메밀과 더운 메밀, 그리고 튀김으로 마무리한 메밀정식을 대접받았다. 식사 중에도 박인숙 가이드의 해설은 계속된다. 유홍준 교수는 ‘먹는 즐거움’을 여행의 큰 즐거움이라 생각해, 답사 중 관광식당은 되도록이면 피했다는 후문이다.


-히젠 나고야 성(pp.61~87)

다음 장소는 히젠 나고야 성(肥前 名護屋城)이었다. 흔히 일반 상식으로 알고 있는 혼슈 지방의 나고야(名古屋)와는 한자어 표기부터 다르다. 그 설명을 하기 위해서 나고야성이 만들어진 배경을 알아야 한다. 나고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심침략을 위해 계획한 것으로, 2만 8천여 명을 동원하여 1년 6개월 만에 지었다. 침략을 위한 기지로서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부산까지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맨 꼭대기에 일본 성의 상징인 천수각을 지은 것은, 먼 바다 위 배에서도 나고야성을 볼 수 있게 하려는 히데요시의 야심이 담겨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나고 히데요시가 죽자, 히젠 나고야성은 순식간에 빈 터로 전락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성의 모습은 비뚤비뚤 쌓여있는 남은 성벽과 우거진 숲, 현해탄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천수각 터가 전부였다. 먹구름까지 몰려와, 음산한 기운마저 더했다. 성의 모습을 상상하기보다는,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자연이 만든 숲을 눈에 담으며 천수각 터까지 올랐다.


열심히 나고야성 꼭대기에 올랐지만, 현해탄을 보며 잠시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생각해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모두들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들썩거릴 정도의 센 바람에 저 멀리 검은빛의 현해탄을 겨우 카메라에 담고 허겁지겁 내려왔다.

나고야 성터 옆에는 1993년 개관한 ‘사가현립 나고야 성 박물관’이 있다. 한국어 안내 팜플렛은 물론 한국어 설명까지 있어 한국인 관람객이라면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한다. 임진,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의 피해가 있었고, 이 때 이입된 조선의 문화, 문물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설명이나, 거북선과 조선통신사의 활약을 기술해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한국과의 관계를 비롯해 침략과 문화 전승에 대한 설명이 퍽 솔직하다. 일본의 과거사 은폐, 미화에 익숙했던 이들이라면 신기하다고 여길 부분이다.

첫 날의 일정은 이것으로 끝났다. 원래는 이마리 도자기 마을까지 봐야 하지만, 시간이 지체된 터라 일찍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가 있는 곳은 온천으로 유명한 우레시노 마을. 규슈에 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온천과 료칸이 즐비해있는 곳이 사가 현의 우레시노 시다. 안내책자를 보면 일본의 3대 미용온천 중의 한 곳으로, 식염과 탄소를 함유한 알칼리성 온천수를 자랑하는 지역이라는 설명이다. 노천탕에서 반신욕을 하고 유카타를 입은 답사단은 식당으로 모였다. 이날 준비된 가이세키 정식은 일본식 정식으로, 에도시대부터 시작된 연회요리다. 음식마다 재료와 요리법, 맛이 중복되지 않도록 구성하는데, 맛은 물론이고, 모양과 빛깔의 담음새까지 생각하는 음식임이 느껴진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이니만큼, 제철 해산물 요리와 잘 숙성된 회가 일품이다. 잘 대접받은 기분이다. 한국보다 해가 47분 빨리 지는 일본의 밤은 그렇게 무르익었다.




둘째날(12월 12일, 목요일)

-이마리 (pp.178~190)

오늘은 본격적으로 도조 이삼평의 발자취를 좇는다. 시작은 어제 미처 가지 못한 이마리(비요의 마을)부터였다. 사가 현 이마리 시는 일본의 아리타야키가 수출된 항구가 있는 곳이고, 비요(秘窯)의 마을, 오카와치야마(大川 山)은 나베시마 가마가 있던 곳이다.


비요의 마을 초입, 주차장에서 내리니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집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아리타에서 백자 생산을 하게 된 나베시마 번주(쉽게 말해 그 지역 영주)가 도자기 생산의 보안을 위해 선택한 곳이 바로 이 마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깊은 산골에 위치해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약 800여 명의 조선도공들이 이 깊은 산새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천천히 곳곳을 둘러보며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돌로 잘 닦아놓은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묘지 비석을 모아놓은 곳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번요 시대의 이름 없는 도공들의 묘석을 모아 놓은 ‘도공무연탑’이다. 도공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화려한 일본 자기 문화는 있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장소가 갖는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도공무연탑을 뒤로 한 채 본격적인 마을 탐방에 나섰다. 언덕 양쪽으로 도자기 가게가 줄지어 있고 저마다 야심차게 진열해놓은 화려한 도자기는 방문객의 발길을 붙잡았다. 일행들은 이곳저곳에서 도자기를 찍고 감상했다. 가격은 다소 높은 편. 색감은 과감하고 모양은 아기자기하다. 몇 군데를 둘러보던 답사단은 발길을 서둘러 마을 높은 곳에 있는 나베시마 가마터와 전망대까지 가보기로 했다. 가마 유적은 신경 쓰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웠다. 전망대 역시 바닥에 깔린 타일은 뜯겨지고 하얀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올라오는 데 답사단말고는 다른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유교수님처럼 여러분도 올라가보시죠”

가이드 박인숙 씨는 모든지 직접 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식사는 일본 전통의 방식대로, 도자기도 맘에 드는 것은 구입해보고, 어느 장소에 가든지 사람들에게 사진을 남기기를 종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는 그녀의 말은 무조건 듣는다.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비요의 마을의 정경은 숲이 우거진 한국의 지방 어느 산골마을과 흡사하다. 하지만 수 백 년 전, 이 마을에 살았던 한국인 도공들과 그들이 지금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주는 이 장소에는 힘이 있었다.

비요의 마을 탐방을 마치고 20분 거리의 이마리 항구로 향한다. 이마리 항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도자기가 다시 유럽으로 수출되는 지점이다. 지금은 고즈넉한 시골마을로만 보이는 이곳이 예전에는 포구(浦口)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상생교 양족으로 흐르는 이마리 강과 한 쪽에 비치된 메이지유신 시대의 흑백사진이었다. 상생교 양쪽 끝에 자리한 큰 도자기 모형은 알록달록한 꽃무늬로 화려함을 자랑한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시대 이후 이마리에서 제작되어 유럽으로 수출된 ‘이마리야끼’인 것이다.


“여러분, 185페이지 좀 펴보실래요?”

이마리 마을을 뒤로 하고 버스에 탑승한 일행에게 박인숙 가이드가 말한다. ‘이마리야끼’에 대한 설명 부분을 그녀가 낭독하기 시작했다.

“아리타야끼가 이마리 항구를 통해 국외로 나가면서 아리타야끼를 통칭 이마리야끼라고 했는데, 이를 시기적으로 초기 이마리, 고 이마리, 이마리로 구분한다. 1616년 이삼평이 백토광산을 발견하고, 1650년대까지 약 30년을 초기 이마리야끼라고 부른다. 1650년대 유럽과 동남아시아에 대대적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여 에도시대까지 이어진 도자기를 고 아미라야끼라고 하며, 중국, 유럽의 취향이 반영된 것들이 많다. 이 때의 것들은 일본엔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옛 고(古)자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시대 이후 이마리에서 제작된 도자기를 이마리야끼라고 부르고 있다.”


-아리타(pp.125~178)

지금 가는 곳은 ‘아마리야끼’의 선조 격인 일본 자기의 발생지 아리타(有田). 인구 약 만 오천 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은 도조 이삼평과 연관된 주요 유적지가 산적해있는 주요한 지역이다. 본격적으로 도조 이삼평에 대한 인물탐구가 시작됐다. 삼, 사 십분 가량을 남쪽으로 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아리타의 이즈미야마 자석장이다. 작은 비석에는 한국어로 짧은 글귀가 새겨져있다.
‘일본 자기의 발상지인 아리타의 역사는 17세기 초반 조선인 이삼평 도공이 여기 이즈미야마 산에서 도석(자기의 원료)를 발견한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400년 동안 하나의 산을 도자기로 바꾸었다”고 말해지고 있는 이즈미야마 자석장은 1980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자석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색색의 도자기 조각이 콕콕 박혀있는 타일이 깔려있어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곧 눈앞으로 펼쳐지는 움푹 파인 웅덩이와 그것을 둘러싼 황금빛 흙더미와는 비교할 수 없다. 바로 이곳에서 캔 고급 자석이 방금 방문한 비요의 마을에 건너가 나베시마 번요에 의해 이마리야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이곳을 자이언 캐니언과도 비교할 수 없노라고 기록한 바 있다. 백 퍼센트 동의할 순 없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한 그 곳과 오랜 시간 사람의 채석활동과 관리로 만들어진 이곳에는 묘한 접점이 있다. 직접 눈으로 본 자석장의 모습을 사진에 오롯이 담을 수 없음이 아쉽다. 현장의 힘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즈미아먀 자석장 근처에는 작은 신사 하나가 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유홍준 교수의 발굴로 책자에 실리게 되어 많은 이들에게 소개되었다. 우리 역시 그 수혜자들이었다. 이 신사의 이름은 석장 신사(石腸神社), 일명 고려 신사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위치와 이름으로 알 수 있듯 도공들과 광산의 석공들이 세운 곳이며, 이번 일정에서 방문하게 되는 첫 번째 신사이기도 했다. 본전 옆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이삼평의 조각상이 있다. 모습과 자태가 마치 신선을 연상케 한다. 그 옆에는 고려(高麗)신(神) 이라고 새겨진 작은 돌이 하나 있는데, 한글 안내판을 통해 이 신사에 봉납된 여러 돌사당 중 하나인 ‘고라이진’임을 알 수 있었다. ‘고라이’는 일본이 한국을 부르던 명칭, 고려였다. 이 곳뿐 아니라 세이로쿠라고 불리는 곳에도 에도시대 초기 오름가마 터 근처에 ‘고라이진’이 세워 져있다고 한다.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공들과 그 후손들의 자취다. 본전 앞에서 박인숙 가이드의 신사에 대한 설명이 쏟아진다. 덕분에 어제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에서 알게 된 ‘도리이’의 존재를 이곳에서도 확인하게 됐다. 박인숙 가이드는 추운 겨울임에도 몸소 데미즈야에서 손을 씻는 행위를 재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이삼평이 만든 최초의 백자 가마, ‘덴구다니 가마터’와 이삼평의 묘소다. 좁은 마을길을 걸어가면 가마터와 이삼평의 묘소가 있다. 이삼평의 묘가 있다는 곳에 도착한 답사단은 잠시 혼란에 휩싸였다. 줄잡아 몇 백 개의 묘 중에 이삼평의 묘소를 찾지 못했던 것. 곧 왼쪽 뒤편에서 표지판을 발견한 이가 일행을 부른다. 역시 한글어로 제작된 안내판이 비치되어있었다. 이삼평의 묘는 1959년 윗부분이 잘려나간 채 발견되었고, 1967년 이삼평의 무덤임이 확인되어 마을의 사적으로 지정하였다는 설명이다.


윗부분이 잘린 채 발견된 이삼평의 묘비

이삼평과 도공들은 아리타에서 ‘이즈미야마 자석장’을 발견하고 이 마을에서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의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마터가 있다. 한국에서도 가마터를 가보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닌데 일본까지 와서 가마터를 보게 된 것이다. 현장을 가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쉽게 설명하자면, 언덕에 깊고 넓은 계단이 수 십 개 늘어서있는 광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십 여개의 가마들을 지나 맨 꼭대기 계단까지 오르면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고생 끝에 마을의 아기자기한 풍경을 감상하는 기쁨이 덤으로 주어진다.


덴구다니 가마터 꼭대기에서

계단모양의 터 옆에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붙어있어, 당시 어떤 모습으로 도자기를 구웠는지 이해할 수 있다. 표지판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이 한 권의 책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부분을 놓쳤을까.


(다음 편에 계속)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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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 유홍준 저 | 창비
‘답사기’ 국내편이 우리 국토의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면서 아끼는 마음을 고취시키는 데에 일조했다면, 이번에 출간된 일본편은 일본의 문화유산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문화적 우수성을 확인하고 상호교류하고 섞이면서 발전해가는 문화의 진면목을 깨우쳐준다고 할 수 있다. 미술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조예가 깊은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일방적인 역사 인식이나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쌍방적인 시각, 더 나아가 동아시아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 미래 지향적인 시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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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규슈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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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9o9p

2013.12.29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 문화를 답사하는 기회는 삶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도자기 산업이 발전된 일본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랠수 있었네요
2박 3일 답사기 동안 취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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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에디터

지금은 남의 목소리를 듣고 정리하는 일을 합니다. (트위터 @tappings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