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모차르트 <레퀴엠 d단조 K.622>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 d단조 op.626>의 작곡을 의뢰받은 것은 1791년 늦은 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찾아와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요청하지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5)에서는 그 사내를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의 신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에쿠우스>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을 토대로 제작됐는데, 오랫동안 세간을 떠돌았던 ‘모차르트 독살설’을 드라마의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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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날은 1791년 12월 5일입니다.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가 초연되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사실 모차르트는 생애 마지막 해에 들어서면서 잔병치레를 자주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과로로 인해 면역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추정되지만, 그 자체로 죽을병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일한 것이 결국 화근이었습니다. 급기야 병증이 폭발하고 맙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혼수를 헤매다 사망했다고 합니다. 분명하지만 않지만 아마도 류머티스열로 추정됩니다. 오늘날의 의학이라면 모차르트가 결코 죽음에까진 이르진 않았겠지요. 그의 나이 겨우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이틀 후 장례식이 치러졌지요. 참으로 초라한 장례였습니다. 친구 열 명과 가족 여섯 명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아내인 콘스탄체는 아파서 누워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임신 중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나빴습니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고 합니다. 자,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모차르트의 묘지가 어딘지를 확인할 수 없는 비극적인 난센스가 시작됩니다. 날씨가 웬만했으면 그날의 문상객들은 시신을 실은 마차를 뒤따랐겠지요. 한데 눈보라가 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마부가 급하게 마차를 몰았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친구들은 운구 마차를 뒤따라가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아내인 콘스탄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과오를 저지릅니다. 장례가 끝난 뒤에라도 남편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을 텐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서야 두번째 남편인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무덤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때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시신을 매장했던 인부가 세상을 떠난 뒤였던 것이지요. 콘스탄체는 1809년에 재혼했으니, 적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20년이 거의 흘렀을 무렵입니다. 게다가 뒤늦게 무덤을 확인하려고 했던 이유도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그녀의 두번째 남편은 덴마크의 외교관이었는데, 모차르트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수집가였습니다. 훗날 모차르트의 편지들을 토대로 평전을 쓰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 실패한 무덤 찾기는 전 남편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도 많은 여행객들이 빈 3구의 성 마르크스 묘지, 모차르트가 누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좁고 가난한 공동묘지를 찾아가지만, 어디가 과연 모차르트의 무덤 자리인지는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 d단조 op.626>의 작곡을 의뢰받은 것은 1791년 늦은 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찾아와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요청하지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5)에서는 그 사내를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의 신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에쿠우스>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을 토대로 제작됐는데, 오랫동안 세간을 떠돌았던 ‘모차르트 독살설’을 드라마의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연극과 영화는 어느 날 모차르트를 찾아왔던 그 ‘검은 남자’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군림했던 살리에르(1750~1825)의 하수인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날 모차르트를 방문했던 사람은 빈의 음악애호가였던 발제크-슈투파흐(1763~1827) 백작의 하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백작이 같은 해 2월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추도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했던 것이지요. 거금을 주고 그 곡을 사서 자작곡으로 발표하려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작곡인 것처럼 꾸며서 곡을 받으려면 당연히 돈을 더 줘야 했을 겁니다. 당시 백작이 모차르트에게 약속했던 금액은 50두카텐이었다고 하는데, 이게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일까요? <내 인생의 클래식> 2013년 3월 18일자에서 ‘두카텐’이라는 화폐 단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당시 대학교수 평균 연봉의 다섯 배쯤을 받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대충 감이 잡히시지요? 1791년의 모차르트는 갖가지 잔병에 시달리며 과중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백작은 약속된 금액의 절반을 선수금으로 주기까지 했습니다.
가여운 모차르트! 그는 생애 마지막 해에 최후의 피아노 협주곡인 27번 B플랫장조를 완성해 초연했고, 현악5중주 6번과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썼습니다. 열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소품들을 작곡했고, 가곡과 아리아, 프리메이슨을 위한 칸타타 두 곡, 아름다운 선율의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두 편의 오페라가 있지요. 모차르트는 뭐니뭐니해도 당시의 오페라계에서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1791년 중반에 손을 댔던 <마술피리>의 작곡을 잠시 멈추고 <티토황제의 자비>를 먼저 완성해 상연한 다음, 곧바로 <마술피리>를 최후의 오페라로 완성해 무대에 올립니다. 두 오페라의 완성과 초연은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걸쳐 이뤄졌습니다. 그야말로 숨쉴 틈 없는 작곡 스케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 개의 대작(두 편의 오페라와 레퀴엠)에서 받았을 과로와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겠지요.
결국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11월 하순에 앓아누운 모차르트는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애통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라크리모사’(Lacrimosa, 눈물의 날)의 작곡을 8마디에서 중단한 채 급기야 눈을 감고 맙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을 잠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선 가장 앞에 등장하는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입당송)는 모차르트가 전부 작곡했습니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압권으로 손꼽히는 명장면이지요. 레퀴엠은 ‘안식’이고, 아에테르남은 ‘영원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첫머리의 가사가 이 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어서 모차르트는 2곡 ‘키리에’(Kyrie, 불쌍히 여기소서)부터 3곡 ‘세쿠엔치아’(Sequentia, 연속된 노래들), 4곡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 봉헌송)을 부분적으로 작곡했습니다. 노래 성부와 베이스, 그리고 관현악 파트의 일부를 직접 작곡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듣는 <레퀴엠>의 절반가량을 작곡하고 눈을 감은 셈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가 다급해졌겠지요. 선수금은 이미 받아 쓴 상태였고, 나머지 부분을 마저 작곡해야 의뢰자로부터 잔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콘스탄체의 부탁을 받고 마무리 작업을 최종적으로 해낸 이가 바로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1766~1803)였습니다. 그는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의 악보에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충했고, ‘라크리모사’의 9마디부터, 그리고 5곡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와 6곡 ‘베네딕투스’(Benedictus, 주에 축복 있으라), 7곡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 양)를 추가로 작곡합니다.
자, 다시 곡의 진행을 복기해보겠습니다. 가사는 라틴어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모차르트의 작곡이고, 어떤 부분이 사후에 추가된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들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1곡 인트로이투스-2곡 키리에-3곡 세쿠엔치아[모두 6부로 이뤄져 있습니다. 진노의 날(Dies irae)-고요한 나팔(Tuba mirum)-어질고 권위 있는 대왕이여(Rex tremendae majestatis)-자비로운 예수여 기억하소서(Recordare jesu pie)-저주받은 자를 부끄럽게 하소서(Confutatis maled ictis)-눈물의 날(Lacrimosa)]-4곡 오페르토리움-5곡 상투스-6곡 베네딕투스-7곡 아뉴스 데이-8곡 코무니오(Comrnunio, 영성체송. 1곡 인트로이투스와 2곡 키리에의 선율을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의 모차르트가 쥐스마이어에게 지시해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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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장례식이 치러졌지요. 참으로 초라한 장례였습니다. 친구 열 명과 가족 여섯 명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아내인 콘스탄체는 아파서 누워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임신 중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나빴습니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고 합니다. 자,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모차르트의 묘지가 어딘지를 확인할 수 없는 비극적인 난센스가 시작됩니다. 날씨가 웬만했으면 그날의 문상객들은 시신을 실은 마차를 뒤따랐겠지요. 한데 눈보라가 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마부가 급하게 마차를 몰았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친구들은 운구 마차를 뒤따라가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아내인 콘스탄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과오를 저지릅니다. 장례가 끝난 뒤에라도 남편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을 텐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서야 두번째 남편인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무덤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때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시신을 매장했던 인부가 세상을 떠난 뒤였던 것이지요. 콘스탄체는 1809년에 재혼했으니, 적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20년이 거의 흘렀을 무렵입니다. 게다가 뒤늦게 무덤을 확인하려고 했던 이유도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그녀의 두번째 남편은 덴마크의 외교관이었는데, 모차르트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수집가였습니다. 훗날 모차르트의 편지들을 토대로 평전을 쓰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 실패한 무덤 찾기는 전 남편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도 많은 여행객들이 빈 3구의 성 마르크스 묘지, 모차르트가 누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좁고 가난한 공동묘지를 찾아가지만, 어디가 과연 모차르트의 무덤 자리인지는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 d단조 op.626>의 작곡을 의뢰받은 것은 1791년 늦은 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찾아와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요청하지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5)에서는 그 사내를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의 신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에쿠우스>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을 토대로 제작됐는데, 오랫동안 세간을 떠돌았던 ‘모차르트 독살설’을 드라마의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연극과 영화는 어느 날 모차르트를 찾아왔던 그 ‘검은 남자’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군림했던 살리에르(1750~1825)의 하수인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날 모차르트를 방문했던 사람은 빈의 음악애호가였던 발제크-슈투파흐(1763~1827) 백작의 하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백작이 같은 해 2월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추도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했던 것이지요. 거금을 주고 그 곡을 사서 자작곡으로 발표하려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작곡인 것처럼 꾸며서 곡을 받으려면 당연히 돈을 더 줘야 했을 겁니다. 당시 백작이 모차르트에게 약속했던 금액은 50두카텐이었다고 하는데, 이게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일까요? <내 인생의 클래식> 2013년 3월 18일자에서 ‘두카텐’이라는 화폐 단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당시 대학교수 평균 연봉의 다섯 배쯤을 받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대충 감이 잡히시지요? 1791년의 모차르트는 갖가지 잔병에 시달리며 과중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백작은 약속된 금액의 절반을 선수금으로 주기까지 했습니다.
가여운 모차르트! 그는 생애 마지막 해에 최후의 피아노 협주곡인 27번 B플랫장조를 완성해 초연했고, 현악5중주 6번과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썼습니다. 열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소품들을 작곡했고, 가곡과 아리아, 프리메이슨을 위한 칸타타 두 곡, 아름다운 선율의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두 편의 오페라가 있지요. 모차르트는 뭐니뭐니해도 당시의 오페라계에서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1791년 중반에 손을 댔던 <마술피리>의 작곡을 잠시 멈추고 <티토황제의 자비>를 먼저 완성해 상연한 다음, 곧바로 <마술피리>를 최후의 오페라로 완성해 무대에 올립니다. 두 오페라의 완성과 초연은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걸쳐 이뤄졌습니다. 그야말로 숨쉴 틈 없는 작곡 스케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 개의 대작(두 편의 오페라와 레퀴엠)에서 받았을 과로와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겠지요.
결국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11월 하순에 앓아누운 모차르트는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애통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라크리모사’(Lacrimosa, 눈물의 날)의 작곡을 8마디에서 중단한 채 급기야 눈을 감고 맙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을 잠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선 가장 앞에 등장하는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입당송)는 모차르트가 전부 작곡했습니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압권으로 손꼽히는 명장면이지요. 레퀴엠은 ‘안식’이고, 아에테르남은 ‘영원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첫머리의 가사가 이 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어서 모차르트는 2곡 ‘키리에’(Kyrie, 불쌍히 여기소서)부터 3곡 ‘세쿠엔치아’(Sequentia, 연속된 노래들), 4곡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 봉헌송)을 부분적으로 작곡했습니다. 노래 성부와 베이스, 그리고 관현악 파트의 일부를 직접 작곡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듣는 <레퀴엠>의 절반가량을 작곡하고 눈을 감은 셈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가 다급해졌겠지요. 선수금은 이미 받아 쓴 상태였고, 나머지 부분을 마저 작곡해야 의뢰자로부터 잔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콘스탄체의 부탁을 받고 마무리 작업을 최종적으로 해낸 이가 바로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1766~1803)였습니다. 그는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의 악보에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충했고, ‘라크리모사’의 9마디부터, 그리고 5곡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와 6곡 ‘베네딕투스’(Benedictus, 주에 축복 있으라), 7곡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 양)를 추가로 작곡합니다.
자, 다시 곡의 진행을 복기해보겠습니다. 가사는 라틴어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모차르트의 작곡이고, 어떤 부분이 사후에 추가된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들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1곡 인트로이투스-2곡 키리에-3곡 세쿠엔치아[모두 6부로 이뤄져 있습니다. 진노의 날(Dies irae)-고요한 나팔(Tuba mirum)-어질고 권위 있는 대왕이여(Rex tremendae majestatis)-자비로운 예수여 기억하소서(Recordare jesu pie)-저주받은 자를 부끄럽게 하소서(Confutatis maled ictis)-눈물의 날(Lacrimosa)]-4곡 오페르토리움-5곡 상투스-6곡 베네딕투스-7곡 아뉴스 데이-8곡 코무니오(Comrnunio, 영성체송. 1곡 인트로이투스와 2곡 키리에의 선율을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의 모차르트가 쥐스마이어에게 지시해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P.S. 개인적으로 가장 즐겨 듣는 음반은 미셸 코르보가 리스본 굴벵키안 재단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연주입니다. 1975년 프랑스 Erato에서 발매한 음반입니다. 요즘 수입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추천음반 목록에 올릴 수 없어 아쉽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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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글쓴이
2013.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