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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5]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 - 모차르트 <레퀴엠>

실제로 레퀴엠을 의뢰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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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재 음악가는 자기 죽음을 예감했을까? 다른 이의 죽음을 추도하는 곡을 의뢰받았지만, 분명 자신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모차르트는 죽음을 앞두고 어떤 소리를 전하고 싶었을까? 악보 속에 담겨 있을 그의 목소리를 떠올려가며 레퀴엠을 들었다.

이 화창한 봄날에 <레퀴엠>이라고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극 중 살리에르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고백한다. 작곡하느라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르는 익명의 사내를 보낸다. 그가 모차르트에게 거금을 제시하며 마지막 레퀴엠을 시한 내에 작곡해달라고 주문하는데, 그걸 작곡하다가 그만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결국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했고, 익명의 사내를 위해 만든 곡이 그의 장송곡으로 흘러나온다. 극적인 장면이다. 살리에르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면 참으로 음악적인 살인이고, 음악가다운 결말이다. 하지만 이건 작가가 지어낸 극 중 설정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에게 장송곡을 의뢰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칼 뵘이 지휘하는 모차르트 <레퀴엠>

“프란츠 폰 발자크 백작이 죽은 아내를 추모할 목적으로 작곡을 의뢰한 곡이었어. 모차르트가 죽고 나서 백작이 이 곡을 자신이 작곡한 곡이라며 직접 지휘하기까지 했지. 이 레퀴엠은 모차르트가 죽기 전에 작곡했다는 점, 그게 하필 장송 미사곡인 레퀴엠이라는 점, 게다가 ‘미완성’으로 남겼다는 점까지, 드라마틱한 사연은 모두 가진 곡이야.”

이 천재 음악가는 자기 죽음을 예감했을까? 다른 이의 죽음을 추도하는 곡을 의뢰받았지만, 분명 자신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모차르트는 죽음을 앞두고 어떤 소리를 전하고 싶었을까? 악보 속에 담겨 있을 그의 목소리를 떠올려가며 레퀴엠을 들었다.

“선배, 그나저나 이 화창한 봄날에 웬 레퀴엠이에요. 레퀴엠이면 장송곡 아니에요?” 이번 주 미션 곡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받아들자마자, 어쩐지 비극적이고 우울한 감상이 밀려드는 것 같아 나는 난색을 보였다.


또 다른 삶, 죽음을 추모하는 노래 <레퀴엠>

“레퀴엠은 안식이라는 뜻이야. ‘진혼곡’이라고도 부르는데, 장례 미사용으로 쓰이는 곡이기 때문에 종교음악으로 분류돼. 수백 년 전 유럽에서는 일상생활과 종교생활은 분류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었잖아. 그러니 음악뿐 아니라 미술, 문학 등 예술작품 역시 종교의 영향 아래 있었어. ‘미사’처럼 종교 행사를 위한 곡이거나 기도곡, 수난곡처럼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음악을 종교음악이라고 분류해.”

그러니까 당시의 일상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유럽 중세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에서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삶만큼이나 중요했을테니, 클래식에서 종교나 죽음을 소재로 한 곡이 많다는 말씀.

이렇게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단순한 의미의 끝이나 이별이 아니라 좀 더 종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가톨릭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날이자, 축복을 받는 날이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고, 부활로 이어지는 또 다른 삶, 영생의 맥락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장송곡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는 식의 노래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 죽음을 추모하는 곡은 다양한 색깔, 다양한 방식이 가능했다는 거다. 물론 종교곡 특유의 엄숙함과 장대함은 기본으로 갖춘 상태에서. “그래서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레퀴엠을 들으면 어쩐지 정화되는 기분이 들어.”

“종교음악 중 최고봉을 꼽으라면 바흐가 작곡한 <마태수난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워낙 길고 분위기도 엄숙해서, 처음에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지. 종교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비교적 멜로디가 귀에 잘 들어오는 <알레그리 미제레레>나 <그레고리안 성가> 같은 걸로 시작해보는 게 좋을 거야. 모차르트 덕분에 우리도 <알레그리 미제레레>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


천재라는 신화 속에 박제된 모차르트


1000년 동안 교황청에 봉인되었던 음악 <알레그리 미제레레>

“<알레그리 미제레레>요?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인가요?”라고 물어보려다가 찾아봤다. 작곡가 알레그리 씨한테 실례를 범했다. 그러니까 교황청 전속 작곡가였던 알레그리(allegri)가 작곡한 미제레레(Miserere)인 거다. <알레그리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을 라틴어로 노래하고 있는 곡인데, 시스틴 성당에서 성 금요일 저녁예배 때 아카펠라 합창단이 이 곡을 불렀다.

이 노래를 듣고 감명받은 교황은 이 곡을 시스틴 성당 내에서만 연주하고 부를 수 있도록, 악보를 반출시키지 못하게 했다. 밖에서 연주하면 파문이라고 엄포를 놓아 무려 1000년 동안 <미제레레>는 봉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열네 살짜리 모차르트가 이 곡을 듣고는 두 번 만에 쓱싹쓱싹 필사해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바티칸이 숨기고 싶어 했던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다.

“모차르트는 대부분 곡을 이렇게 작곡했대. 머릿속에서 이미 완성한 곡을 써내려가는 방식으로. 보통 사람들이 A ☞ B ☞ C로 사고한다면, 모차르트는 A ☞ C가 도출되는 거지.”


많은 음악과 더불어 수많은 천재적 일화를 남긴 모차르트의 삶은
지금까지도 영화, 뮤지컬 등 많은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문외한인 나로서는 어떻게 이 길고 복잡한 구조의 노래를 한 사람이 창조해냈을까 싶어 모든 작곡가가 단연 천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클래식계에서도 천재로 손꼽히는 사람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다. 모차르트, 하면 온갖 천재적인 일화가 뒤따라 나오기 일쑤다.

“글자도 모르는 아기가 악기를 척척 연주해 여섯 살 나이로 연주 여행을 떠나고, 한국 나이로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작곡을 시작해서 소나타, 교향곡을 쓱쓱 써냈지. 12살에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얘기고. 가르치는 선생님도 이 천재를 보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해. 가는 데마다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던 신동이지.”

어째서 천재들의 삶은 요절로 끝나는 걸까? 요절의 운명을 스스로 알고 태어나는 순간, 마치 ‘준비, 시작!’ 호루라기가 울리듯 남들보다 엄청난 집중력과 능력을 발휘하는 걸까? 아니면 무리한 재능으로 기운이 소진되어 요절하게 되는 걸까? 모차르트가 오래 살았더라면,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쏟아냈을 것이고, 우리는 ‘신의 선물’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모차르트는 미완성의 곡을 남기고 요절함으로써 천재라는 신화 속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죽음에 관한 한 편의 오페라 같은 레퀴엠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하는 장면이 극적으로 표현됐다.
악보 위에서 모차르트는 완성된 <레퀴엠>을 듣는다.

모차르트 레퀴엠은 음산한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여 영원한 안식을’이라고 노래하는 성가대의 목소리가 낮게 시작되는데, 그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음산했던 분위기는 환하고 따뜻하게 밝혀져 있다.

동굴 속에서 촛불을 켰는데, 어느 순간 그 빛이 동굴의 어둠을 압도해버린 느낌이랄까. 죽음이라는 것이 표면적으로 보기엔 그저 두렵고,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드디어 삶의 종착지에서 만나게 되는 쉼과 안식이라고 성가대가 도닥이는 것처럼 들린다.

“레퀴엠을 죽은 사람의 미사라고 생각해보면, 처음에 시작송으로 시작해서 신의 심판을 듣고, ‘죄인이지만 불쌍하게 여겨주소서’ 노래한다고 생각하면 돼. 왠지 암울하고 스산할 것 같지만, 레퀴엠이라도 해도 작곡가마다 느낌이 매우 달라. 미사곡이니만큼 형식은 정해져 있지만 말야.

신의 심판을 상징하는 Dies Irae(진노의날)을 베르디는 스피커가 터질 듯이 합창과 북소리로 표현하고, 포레는 남자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통해 평화롭게 영혼을 달래주듯 표현해. (궁금하면 포레의 <피의 예수>를 들어봐. 영혼이 세탁되는 기분일 테니.) 모차르트는 자신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이라 그랬을까? 뭔가 애절하고 애처롭게 들리지. 그러면서도 미사곡 특유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고 말야.”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하는 장면이 참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병에 걸려 창백해진 그가 희미하게 손동작으로 악보를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며 노래를 전할 때, 완성된 레퀴엠이 그의 손동작, 입술에 맞춰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완성되어 들렸을 음악이다. 이어 모차르트의 상여가 나갈 때 웅장한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데 이 부분이 바로 레퀴엠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Lacrymosa(라크리모사)’, 눈물의 날이다. 찬송가같이 경건한 느낌과 동시에 신비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는 ‘Lacrymosa’ 직전에 시작되는 6악장 ‘Confutatis(콘푸타티스)’가 가장 인상적이다. 저주받은 자들, 혹은 사악한 자들을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라는 의미의 ‘Confutatis’은 박력 있는 합창으로 시작하는데 정말 막 심판이 떨어져서, 나를 이쪽으로 저쪽으로 누군가 끌고 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 사이사이에는 천사의 목소리처럼 여자 소프라노들이 구원을 청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즉 악마와 천사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듯한 6악장을 듣고 있으면, 종교음악이 아니라 마치 죽음에 관한 한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서정적인 칼 뵘의 레퀴엠


“모차르트가 이 곡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죽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쥐스마이어라는 그의 제자가 완성했어. 일반적으로는 레퀴엠 전체를 연주하지만, 깐깐하게 따지는 사람들은, 딱 모차르트가 작곡한 부분만 연주하기도 해.

모차르트 레퀴엠은, 영화 덕분에 많이 알려졌고, 감상하는 데 어려운 곡은 아니라서 이것만이 명반이다,라고 꼽기 보단 여러 가지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어. 그 중 취향에 맞는 음반을 선택해 봐. 나도 한때 이 곡에 빠져서 레퀴엠 앨범을 열심히 수집한 적이 있었어. 열 개 음반을 들으면, 열 개가 다 다른 매력으로 좋더라고.”


그중에서 선배가 꼽아준 앨범은 칼 뵘, 헤레베레, 번스타인이 지휘한 레퀴엠이다. 칼 뵘? 낯익은 이름이다 싶었는데, 지난주에 <피가로의 결혼>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했던 그 지휘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첫손에 꼽는 것은 칼 뵘의 레퀴엠이야. 지난주에 <피가로의 결혼>을 설명하면서, 칼 뵘의 연주가 살짝 느긋하게 연주하며 서정적인 느낌이 있다고 했지? 그 스타일이 레퀴엠에서 딱 맞아 떨어져. 레퀴엠에 출연하는 성악가 중에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 역을 했던 에디트 마티스가 있어. 순수하고 청아한 느낌의 에디트 마티스가 레퀴엠에서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지.”


레퀴엠,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


이렇게 푸릇푸릇한 숲속에 앉아 <레퀴엠>을 들었다

봄날의 레퀴엠을 듣는다. 선배 말대로 봄날의 어지러운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남의 일인 양 모른 척하고 있지만, 삶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죽음에 관해 생각해본다. 죽음이라는 것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있을 수 있는지 레퀴엠을 들으면서 새삼 발견했다. 두려움, 진노, 공포뿐 아니라 환희, 안식, 평화……. 그러니까 인간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었다. 추도를 위한 곡이 이토록 사랑받는 까닭일 것이다. 화창한 봄날에 들어도 마음에 평온하게 와 닿는 까닭이기도 하고.

공포나 심판을 표현한 부분에서 남성 소프라노의 외침은 나의 두려움을 대신 외쳐주는 것 같다. ‘모두가 겪는 일이고, 나에게도 올 일인 건 알지만, 두려운 건 두려운 거잖아!’ 하고 들렸다면 감정이입이 과한 걸까? 이내 따라오는 천사 같은 여성 소프라노의 위로와 남녀 성가대의 합창은 죽음을 앞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결국, 레퀴엠을 듣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일 테니,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레퀴엠은 남은 자의 슬픔, 남은 자의 애통함을 위로하고 남아있는 삶을 격려하는 곡인지도 모르겠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2번째로 선택된 음반

   필립 헤르베헤 : <모차르트 레퀴엠>

클래식 관련된 글을 읽다보면 "원전연주(정격연주)"라는 단어를 접할 때가 있다. 바로 악기와 연주법을 최대한 작곡가 활동하던 시절과 비슷하게 하자는 것이다. 필립 헤르베헤는 원전연주의 대표주자의 한사람으로, 특히 종교음악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다. 마침 올 6월에 한국의 대표 소프라노 임선혜와 함께 내한하여 레퀴엠을 공연한다니 꼭 이 음반을 들어보고 가자.

이 음반도 들어보세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 <베르디 레퀴엠>

레퀴엠이 불쌍하고 우울한 장송곡이라고 생각된다면, 이 곡을 들어보자. 오페라에서도 블록버스터급 작품을 쓰던 베르디는 역시나 레퀴엠에서도 스케일이 크다. 드라마틱한 구성에 미사보다는 "망자를 위한 오페라"라고 평한 이도 있다. 국내 한 CF에도 등장한 "진노의 날"은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오는 북소리와 합창이 일품으로, 마치 진짜 심판의 날이 온 것 같다. 여러 연주 가운데서도 압도감은 줄리니의 연주가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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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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