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제도에 대한 의문 - <셰임(Shame)>
이 영화는 외피에 드러낸 허무의 냄새와 우울의 감성만으로도, 하늘의 별들을 자신의 육체까지 끌어당겨 놓을 인력(引力)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과민한 캐릭터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가령,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은 마치 애인처럼 등장한다. 현대 사회의 인물들이 모두 외롭고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기행을 일삼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그 보다 좀 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201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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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보일지 모르는 이 칼럼에도 나름대로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유쾌하고 재밌게 쓰려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의 평과 상관없이 ‘내가 재밌게 보고 훌륭하다 여긴 영화’만 쓴다는 것이었다. 이 두 원칙을 그럭저럭 지켜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오늘은 첫 번째 원칙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재미를 포기할 만큼, 오늘 쓰고자 하는 영화는 훌륭하다. 비록 내가 진지하고 분석적인 글을 써서 지구상에 남아있는 나의 모든 독자 13명이 실망하고 떠나더라도, 이 영화의 격에 맞는 평 하나쯤은 기록돼야 한다는 게 나의 심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엄숙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현재 유통되는 <셰임>에 대한 거의 모든 평은 극찬일색이다. 고맙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 극찬의 화살이 다른 과녁에 맞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 구조를 띠고 있다. 물론 표면에 드러난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만 보더라도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이 영화는 외피에 드러낸 허무의 냄새와 우울의 감성만으로도, 하늘의 별들을 자신의 육체까지 끌어당겨 놓을 인력(引力)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과민한 캐릭터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가령,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은 마치 애인처럼 등장한다. 현대 사회의 인물들이 모두 외롭고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기행을 일삼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그 보다 좀 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현재까지 생산된 이 영화에 대한 지배적인 감상과 평은 이러하다.
주인공에게 문신처럼 달라붙은 육체적 욕망과, 이를 해갈하기 위해 시도하는 휘발성 강한 성적 행위들, 주인공은 이것이 ‘수치(Shame)’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는 오늘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성에게 뜨거운 점액 같은 시선을 묻히고, 이를 거부하지 않는 상대 역시 그에게 자신의 결핍된 욕망을 드러낸다. 자신의 손가락에 (결혼) 반지가 껴져 있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영화는 덧없는 공기와 시린 영상만으로도 관객을 어느 정도 만족 시키고 있다. 그러나 언급했듯, 이것은 이 영화의 외피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의 내피가 ‘가족제도에 대해 근원적 의문을 제기한다’고 가정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현대인의 허무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수면 위를 흐르는 물결이고, 수면 아래서 휘몰아치는 정서는 바로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다. 남자 주인공은 여동생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둘이 어린 시절 관계를 가졌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주인공이 성에 탐닉하는 것에 ‘수치’를 느끼지만, 근원적으로는 동생과의 관계를 다시 욕망하고 있다는 것에 ‘수치’를 느끼는 것이다. 동생은 백치 같은 여성이며, 주인공은 동생의 백치미에 이끌려 행위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 행위를 지속할 수 없기에 의미 없는 성행위와 자위에 탐닉한 채 살아간다. 마치 다른 객체(사람이든, 사물이든)와의 행위가 유일한 응급치료제인 것처럼(그래서 영화는 초반에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해 언급하고, 주인공은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한 인물처럼 그려진다). 적어도 내가 느낀 영화는 그러했다. 아마 감독이 좀 더 직접적인 작법을 추구했다면, 제목으로 Love Affair(정사)의 색채를 투영할 수 있는 Family Affair를 택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주의 깊게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것이다. 스티브 맥퀸은 절대 직접화법을 구사할 사람이 아니다. 그라면 표면적 오해를 받더라도, 이중적 구조를 띤 제목인 ‘Shame(즉, 수치)’를 택했을 법하다(물론, 나의 상상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는 남자의 자동응답기에 옛 애인인 듯한 여성이 “제발 전화를 받으라”며 독촉하며 시작한다. 다음날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응답기에 남겨진다. 남자는 회사에서 자위를 하고, 클럽에서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보낸다. 이것만 본다면 남자는 여자를 소비하고 폐기한 후, 자신의 현재 성적 욕망에만 집착한 중독자처럼 보인다. 이 날도 클럽에서 만난 여성과 관계를 가진 후, 집에 와보니 누군가가 와 있다. 남자의 집엔 ‘그 누군가가’ 틀어놓은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음악은 마치 대사처럼 말한다. "I want your love.” 나는 당신의 사랑을 원한다고. 관객이라면 누구라도 옛 애인이 남자의 집에 불쑥 찾아왔다고 여길 법하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은 야구 배트(!)를 집어 들고 마치 강도를 찾듯 집안을 뒤진다. 찾아온 이는 사랑을 갈구하는데, 이를 맞이하는 이는 위협 받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침입자’를 화장실에서 찾아낸다. 한 명의 여자가 샤워를 하다 들이닥친 남자를 보고 놀라고, 남자 역시 그 여자를 보고 놀란다.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음모까지 노출한 체, 되레 “왜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고 따진다. 남자는 부아가 난 듯 수건을 여성에게 던지며 “왜 왔느냐?”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여성은 옛 애인이 아니라, 주인공의 여동생임이 영화는 십여 분이 지나고 알려준다. 감독은 왜 관객에게 이렇게 선명한 오해를 제시할까. 나는 이 장면을 ‘방금 느낀 이 명백한 오해의 인상을 잘 기억해달라’는 일종의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신호를 감지한 채 영화를 보면, 이 남매가 나누는 대부분의 대사들이 메타포로 점철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날 욕망에 따라 하룻밤을 추구하는 직장 상사는 근사한 클럽에 가자고 주인공에게 말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여동생이 노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곳에서 여동생은 서글프게 <뉴욕 뉴욕>을 노래한다.
뉴욕에 자신을 만나러 온 여동생의 이 노래를 부르자 남자주인공은 눈물을 흘린다. 그는 가사에 담긴 여동생의 마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 여동생은 보란 듯이 아침에 자신에게 했던 행동(자신이 쓴 모자를 오빠에게 씌어준 것)을 그대로 남자의 직장 상사에게 반복하고, 심지어 그의 집에서 상사와 하룻밤을 보낸다. 남자는 괴로움과 배신감을 억누르며 달리기를 한다(아아, 달리는 심정. 나도 잘 안다. 나도 자주 달린다). 그리고 이 남자는 계속 의미 없는 만남을 추구하고, 관계를 짓고, 행위를 한다. <뉴욕 뉴욕>의 가사처럼 여동생과는 다시 해낼 수(make it) 없다는 것을 알고, 흑인 직장 동료와의 연애를 해보려 한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하다. 당연하다. 그에겐 동생이 아닌 누구와의 사랑도 불가능하다. 결국 그는 흑인 직장동료와의 관계가 실패하자, 곧장 동생과 같은 인종인 백인 창녀를 불러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정서를 유지하며 감독이 궁극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은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여동생이 유일하게 관계를 가지는 주인공의 직장 상사는 유부남이고, 주인공이 지하철에서 헌팅을 하듯 만나는 여성도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 남자가 유일하게 연애 비슷하게 하는 흑인 여성도 사실은 ‘별거중’인 유부녀다. 그리고 남자는 그 여성에게 묻는다. “평생 어떻게 한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느냐고. 그건 부자연스럽지 않느냐고. 그것이 오히려 인위적이지 않느냐고.”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남자가 품고 있는 정서는 동생 때문에 과연 가족이 무슨 공동체이기에,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감정의 허용범위가 무엇이기에 자신이 수치를 느끼고, 다른 허무한 관계에 탐닉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가족이라는 금기로 괴로워하고, 따라서 자신이 금기를 깰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자 게이클럽에 가서 남자와 상관을 하고, 동양여성과 백인여성과 동시에 잠자리를 갖기도 한다. 그 때 절정에 다다를 즈음 그의 표정은 마치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우울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개인의 애정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을 때 빚어지는 슬픔과 좌절이 그의 얼굴에는 담겨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이 모두 해결된다. 대사는 메타포이고(여동생-“난 오빠를 도와주려해” 남자-“니가 도울 수 있는 게 뭔데? 넌 나를 가라앉게 하고 있어. 짐이 될 뿐이라고!”), 여주인공의 팔에 그어진 무수한 자살 시도의 흔적 역시 벽에 부딪힌 둘의 관계를 암시한다.
그나저나, 감독 스티브 맥퀸은 왜 이렇게 간접화법을 구사할까.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직접적으로 말하는 순간,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저잣거리의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그것 때문에 이 주인공들은 상처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껍질 속에 숨긴 채 달팽이처럼 살아간다. 비록 끈적끈적하다는 오해받을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스티브 맥퀸은 끝내 이 영화의 퍼즐 조각을 근사한 곳에 적절하게 배치해놓았다. 두말할 필요 없이, 명작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엄숙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현재 유통되는 <셰임>에 대한 거의 모든 평은 극찬일색이다. 고맙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 극찬의 화살이 다른 과녁에 맞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 구조를 띠고 있다. 물론 표면에 드러난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만 보더라도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이 영화는 외피에 드러낸 허무의 냄새와 우울의 감성만으로도, 하늘의 별들을 자신의 육체까지 끌어당겨 놓을 인력(引力)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과민한 캐릭터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가령,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은 마치 애인처럼 등장한다. 현대 사회의 인물들이 모두 외롭고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기행을 일삼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그 보다 좀 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현재까지 생산된 이 영화에 대한 지배적인 감상과 평은 이러하다.
주인공에게 문신처럼 달라붙은 육체적 욕망과, 이를 해갈하기 위해 시도하는 휘발성 강한 성적 행위들, 주인공은 이것이 ‘수치(Shame)’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는 오늘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성에게 뜨거운 점액 같은 시선을 묻히고, 이를 거부하지 않는 상대 역시 그에게 자신의 결핍된 욕망을 드러낸다. 자신의 손가락에 (결혼) 반지가 껴져 있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영화는 덧없는 공기와 시린 영상만으로도 관객을 어느 정도 만족 시키고 있다. 그러나 언급했듯, 이것은 이 영화의 외피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의 내피가 ‘가족제도에 대해 근원적 의문을 제기한다’고 가정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현대인의 허무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수면 위를 흐르는 물결이고, 수면 아래서 휘몰아치는 정서는 바로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다. 남자 주인공은 여동생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둘이 어린 시절 관계를 가졌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주인공이 성에 탐닉하는 것에 ‘수치’를 느끼지만, 근원적으로는 동생과의 관계를 다시 욕망하고 있다는 것에 ‘수치’를 느끼는 것이다. 동생은 백치 같은 여성이며, 주인공은 동생의 백치미에 이끌려 행위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 행위를 지속할 수 없기에 의미 없는 성행위와 자위에 탐닉한 채 살아간다. 마치 다른 객체(사람이든, 사물이든)와의 행위가 유일한 응급치료제인 것처럼(그래서 영화는 초반에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해 언급하고, 주인공은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한 인물처럼 그려진다). 적어도 내가 느낀 영화는 그러했다. 아마 감독이 좀 더 직접적인 작법을 추구했다면, 제목으로 Love Affair(정사)의 색채를 투영할 수 있는 Family Affair를 택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주의 깊게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것이다. 스티브 맥퀸은 절대 직접화법을 구사할 사람이 아니다. 그라면 표면적 오해를 받더라도, 이중적 구조를 띤 제목인 ‘Shame(즉, 수치)’를 택했을 법하다(물론, 나의 상상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는 남자의 자동응답기에 옛 애인인 듯한 여성이 “제발 전화를 받으라”며 독촉하며 시작한다. 다음날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응답기에 남겨진다. 남자는 회사에서 자위를 하고, 클럽에서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보낸다. 이것만 본다면 남자는 여자를 소비하고 폐기한 후, 자신의 현재 성적 욕망에만 집착한 중독자처럼 보인다. 이 날도 클럽에서 만난 여성과 관계를 가진 후, 집에 와보니 누군가가 와 있다. 남자의 집엔 ‘그 누군가가’ 틀어놓은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음악은 마치 대사처럼 말한다. "I want your love.” 나는 당신의 사랑을 원한다고. 관객이라면 누구라도 옛 애인이 남자의 집에 불쑥 찾아왔다고 여길 법하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은 야구 배트(!)를 집어 들고 마치 강도를 찾듯 집안을 뒤진다. 찾아온 이는 사랑을 갈구하는데, 이를 맞이하는 이는 위협 받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침입자’를 화장실에서 찾아낸다. 한 명의 여자가 샤워를 하다 들이닥친 남자를 보고 놀라고, 남자 역시 그 여자를 보고 놀란다.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음모까지 노출한 체, 되레 “왜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고 따진다. 남자는 부아가 난 듯 수건을 여성에게 던지며 “왜 왔느냐?”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여성은 옛 애인이 아니라, 주인공의 여동생임이 영화는 십여 분이 지나고 알려준다. 감독은 왜 관객에게 이렇게 선명한 오해를 제시할까. 나는 이 장면을 ‘방금 느낀 이 명백한 오해의 인상을 잘 기억해달라’는 일종의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신호를 감지한 채 영화를 보면, 이 남매가 나누는 대부분의 대사들이 메타포로 점철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날 욕망에 따라 하룻밤을 추구하는 직장 상사는 근사한 클럽에 가자고 주인공에게 말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여동생이 노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곳에서 여동생은 서글프게 <뉴욕 뉴욕>을 노래한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전 오늘 밤 떠나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는 작은 마을의 우울이 없을 거예요. 뉴욕에서 내가 해낼 수 있다면(make it) 난 어디서도 해낼 수 있을 거예요.” | ||
이러한 정서를 유지하며 감독이 궁극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은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여동생이 유일하게 관계를 가지는 주인공의 직장 상사는 유부남이고, 주인공이 지하철에서 헌팅을 하듯 만나는 여성도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 남자가 유일하게 연애 비슷하게 하는 흑인 여성도 사실은 ‘별거중’인 유부녀다. 그리고 남자는 그 여성에게 묻는다. “평생 어떻게 한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느냐고. 그건 부자연스럽지 않느냐고. 그것이 오히려 인위적이지 않느냐고.”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남자가 품고 있는 정서는 동생 때문에 과연 가족이 무슨 공동체이기에,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감정의 허용범위가 무엇이기에 자신이 수치를 느끼고, 다른 허무한 관계에 탐닉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가족이라는 금기로 괴로워하고, 따라서 자신이 금기를 깰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자 게이클럽에 가서 남자와 상관을 하고, 동양여성과 백인여성과 동시에 잠자리를 갖기도 한다. 그 때 절정에 다다를 즈음 그의 표정은 마치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우울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개인의 애정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을 때 빚어지는 슬픔과 좌절이 그의 얼굴에는 담겨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이 모두 해결된다. 대사는 메타포이고(여동생-“난 오빠를 도와주려해” 남자-“니가 도울 수 있는 게 뭔데? 넌 나를 가라앉게 하고 있어. 짐이 될 뿐이라고!”), 여주인공의 팔에 그어진 무수한 자살 시도의 흔적 역시 벽에 부딪힌 둘의 관계를 암시한다.
그나저나, 감독 스티브 맥퀸은 왜 이렇게 간접화법을 구사할까.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직접적으로 말하는 순간,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저잣거리의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그것 때문에 이 주인공들은 상처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껍질 속에 숨긴 채 달팽이처럼 살아간다. 비록 끈적끈적하다는 오해받을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스티브 맥퀸은 끝내 이 영화의 퍼즐 조각을 근사한 곳에 적절하게 배치해놓았다. 두말할 필요 없이,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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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shoh0916
2019.02.21
seammer
2017.03.08
꾸디
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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