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이 소설은 주인공 난쟁이네 가족을 통해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통해 좌절과 애환을 다룬 연작 소설이다. 줄여서 ‘난쏘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1975년에 발표한 작품 〈칼날〉을 시작으로 1978년 〈에필로그〉까지 12편으로 완성되었다. 1979년 제 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극단 세실에 의해 1979년에 채윤일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고, 1981년에는 이원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13.06.05
1978년 6월 5일,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우리 인문주의와 심미적 이성의 한 절정을 보여준 한국문학의 대표작이다. 1978년 6월 초판이 발행된 이래 2005년까지 무려 150쇄를 돌파하며 최인훈의 『광장』과 함께 우리 문단 사상 가장 오래도록 팔린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뫼비우스의 띠〉, 〈우주여행〉,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시〉 등을 모은 작품이다.
조세희는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 마르게 아파서 소리지르는 때가 있는데,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역사요, 그 자신이 너무 아파서 지른 간절하고 피맺힌 절규가 『난쏘공』이었다고 말한다. 긴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난장이들의 소리에 젊은이들이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난쏘공』이 시대 문제의 핵심, 인간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난쟁이네 가족을 통해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통해 좌절과 애환을 다룬 연작 소설이다. 줄여서 ‘난쏘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1975년에 발표한 작품 〈칼날〉을 시작으로 1978년 〈에필로그〉까지 12편으로 완성되었다. 1979년 제 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극단 세실에 의해 1979년에 채윤일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고, 1981년에는 이원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80년대에 루카치의 리얼리즘 문학론의 입장에서 ‘노동운동을 감상적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혁명적 전망을 차단한다’며 노동자 팔아먹는 지식인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조세희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출판 30년후 자신의 소설을 비판하던사람들이 보수진영으로 투항한 걸 보면 쓸쓸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 작품 이후로 장기간 침묵하다가 1983년에 『시간여행』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 중 〈칼날〉에 등장하는 ‘신애’를 주인공으로 그린 작품이다. (출처: 예스24, 위키백과)
아래는 2009년 채널예스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우리 인문주의와 심미적 이성의 한 절정을 보여준 한국문학의 대표작이다. 1978년 6월 초판이 발행된 이래 2005년까지 무려 150쇄를 돌파하며 최인훈의 『광장』과 함께 우리 문단 사상 가장 오래도록 팔린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뫼비우스의 띠〉, 〈우주여행〉,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시〉 등을 모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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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주인공 난쟁이네 가족을 통해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통해 좌절과 애환을 다룬 연작 소설이다. 줄여서 ‘난쏘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1975년에 발표한 작품 〈칼날〉을 시작으로 1978년 〈에필로그〉까지 12편으로 완성되었다. 1979년 제 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극단 세실에 의해 1979년에 채윤일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고, 1981년에는 이원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80년대에 루카치의 리얼리즘 문학론의 입장에서 ‘노동운동을 감상적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혁명적 전망을 차단한다’며 노동자 팔아먹는 지식인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조세희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출판 30년후 자신의 소설을 비판하던사람들이 보수진영으로 투항한 걸 보면 쓸쓸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 작품 이후로 장기간 침묵하다가 1983년에 『시간여행』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 중 〈칼날〉에 등장하는 ‘신애’를 주인공으로 그린 작품이다. (출처: 예스24, 위키백과)
아래는 2009년 채널예스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한반도에서 1970년대란 여러모로 의미가 깊습니다. 모든 것이 빨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전까지 적막에 가깝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별칭이던 한국은 급속한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합니다. 공장 굴뚝의 연기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피어올랐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공장은 더 많은 생산량을 위해 공장을 키우고 또 일손들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시골에서 농사짓던 수많은 처녀 총각들이 구름처럼 서울로 밀려들었고, 복작복작한 달동네를 이루어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폭발적 경제성장, 근대국가로의 발돋움, 산업사회로의 진입 거시경제지표로 설명되는 이런 70년대의 변화 뒤에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개개인의 미시적 일상에서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력과 인지에 한계를 가진 인간은 주로 그 시간의 흔적을 거시적 지표로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어 자칫 세세한 개인들이 만들어 온 역사는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게 경제학과 사회학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구석을 그려내고 역사로 전하는 것이 문학의 또 다른 역할일 것입니다. 1975년도에 처음 발표된 소설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적어도 개발 시대의 한국 70년대를 증언하는 중요한 텍스트로 자리 잡습니다. 화려한 성장의 외양 뒷면에 존재하는 그림자 같은 우리의 70년대를 『난쏘공』은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도 않고, 얼굴에 노기를 띠며 열변을 토하지도 않은 채 그저 담담하고 조용하고, 때로는 무슨 환상에 빠진 듯한 몽롱한 목소리로 70년대의 실상을 증언합니다. 마치 견디기 어려운 큰 고문을 겪은 뒤 청문회 자리에 다시 선 증언자처럼, 그 몽롱한 목소리에는 온통 고통과 시련이 묻어나고 있고, 그 맥락을 알기에 독자들의 눈은 그만큼 씁쓸한 기운을 받습니다. 소설은 서울 어느 재개발 대상지역에 사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려집니다. 어느 날 구청에서 날아온 철거 통지를 받으면서 달동네의 가족은 위기를 맞습니다. 옛 건물을 때려 부수고 새로 올릴 아파트 입주권 딱지는 받았지만, 입주비를 도저히 낼 수가 없는 현실 속의 도시빈민인 주인공 가족은 결국 딱지를 사러 오는 외지인들에게 딱지를 팔고 떠나야만 하는 운명을 맞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인 아버지는 난장이입니다. 백십칠 센티미터라는 키를 가진 아버지는 그 키만으로도 이미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위치이고, 그렇기에 남들이 말하는 좋은 직장이 아닌 허드렛일로 간신히 달동네에서의 가족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입니다. 철거라는, 주거권 자체가 위협받는 최악의 상황에 닥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말 그대로 도시 하층민의 삶조차 위협받는 궁지에 몰리며, 그나마도 몸이 아파 일을 못 나가는 환경에 놓이면서 그의 아들딸들이 주변 공장에 나가 생업을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남들 학교 다닐 나이에 공장 일을 시작하게 된 난장이의 아들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차갑습니다. 늘 친한 친구였던 주인집 명희네 어머니는 이제 철거라는 상황 앞에 돈을 재촉하는 주인집 아줌마일 뿐이었고, 동네 딱지를 몽땅 사들이는 재벌 2세 남자는 그저 태생부터 자신들과 다른 세상에서 시작한, 같은 인간 부류가 아닌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 어제까지 살던 집이 헐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던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들은 분노와 체념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며, 그나마의 감정조차도 다 드러내지 않은 채 소설은 여운만을 가득 담은 채 말을 줄여 버립니다.
소설 속 화자들의 서술은 무척 담담합니다. 게다가 화자들의 상상은 현실을 넘어 저 어느 강둑이나 달나라까지 넘어가 버리는 모습 또한 종종 보여 줍니다. 생존이 걸린 철거라는 주제를 두고도 소설은 문제의 핵심을 콱 물어뜯는 것보다 주위를 빙빙 돌며 정황을 뿌옇게 스케치하는 방식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냅니다. 이는 실제 철거대상이 된 세입자들의 상황이 분노만으로 가득하기도 어렵기 때문임을 암시합니다. 자신들의 삶을 강제하고 규정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압도적인 힘과 권력은 막상 맞부딪으며 싸워 보기엔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력한 힘이며, 그나마 붙잡고 싸울 만한 샅바나 멱살조차도 보이지 않는 암담함입니다. 구청에 가서 항의해도, 건설사 사장실에 쳐들어가도, 아니 어디 그냥 청와대에 쳐들어가도 답이 안나오는 철거촌의 암담함은 분노마저도 쉽게 터뜨릴 수 없는 사회의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됨을 소설은 그 화법을 통해 전달합니다. 그 구조적 모순조차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난쏘공』은 끊임없이 난장이 가족의 가족사를 조명합니다.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종의 자식으로 이어 내려져 온 난장이 가문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역사 속을 살아온 전형적인 사회 최하층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최하층을 벗어나지 못했던 가족의 역사는 가족 구성원들이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 전반에 걸친 체념의 뉘앙스에 근거가 됩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사회부터 누적되어 왔고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던 최하층이라는 사회적 계급은 당사자 스스로를 끊임없이 체념의 늪으로 끌어당기는 또 다른 족쇄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희망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도, 더 큰돈을 모아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당장의 삶을 이어 나가고 공장 점심 반찬의 무말랭이가 어제보단 간이 잘 맞기를 바라는 정도입니다. 이미 그 이상의 꿈과 희망은 구조적으로 차단된 상태이고, 끊임없이 자신들을 소외자로 몰아가는 세상에 더 큰 기대를 걸기를 거부합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라는 질문은 그래서 『난쏘공』 을 읽고 난 뒤 수많은 이들이 갖는 첫 번째 의문점이 됩니다. 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이 저 지평선 끝에 만나는 듯한 기찻길의 꼭짓점 같은 욕망으로 치닫고 있고, 개개인을 넘어선 자본과 국가는 그 욕망을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추진합니다. 닿고 나면 더 큰 것을 갈망하게 되는 욕망과 그 욕망에 기반해서 세워진 사회 질서는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가치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기에, 우리는 70년대의 현실을 스케치한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 기저에 깔린 동일한 논리에 숨 막혀 합니다. 변했다면 변했다지만, 그 한켠에는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존재했습니다. 70년대의 낙원구 행복동과 21세기의 용산 철거사태는 모두 동일한 맥락 선상에 서 있습니다. 재개발을 통한 거대한 이권이라는 욕망을 자극하는 탐욕의 덩어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21세기의 철거 현장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이제는 그 현장에 개입하는 이권세력들이 과거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건설사와 공권력뿐 아니라 요즘의 철거촌에는 재개발 조합들, 조합원과 조합원, 세입자와 땅주인, 심지어는 철거민연합 같은 단체까지 끼어들면서 말 그대로 이권의 이전투구를 보이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야 할지, 30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끝없는 모순의 굴레를 생각하다 보면 혼자 화가 나기도 합니다. 당장 또다시 불거진 철거현장의 대형 참사를 보면서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난장이는 작은 공을 쏘아 올렸다지만, 도대체 그 공의 실체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정말 우리 모두가 가슴에 품을 만한 아름다운 공 하나를 우리는 이 시대에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원본: http://ch.yes24.com/Article/View/14651) -------------------- 글쓴이 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읽기가 어느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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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경진
지구에 춤을 추러 온 화성인입니다. 여행과 영화 감상을 좋아하며, 책을 사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잘 읽지는 못하고 쌓아만 둡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게 삶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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