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 100년 만에 드라마틱하게 부활하다 - 바흐, 마태수난곡 BWV 244
<마태수난곡>은 오라토리오 스타일의 수난곡입니다.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독창, 합창, 관현악이 모두 등장합니다. 하지만 무대 연출이나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페라에 비해 합창의 비중이 더 크고, 합창과 아리아 사이에 줄거리를 설명하는 해설자, 다시 말해 ‘복음사가’가 등장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201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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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수난곡 악보(Matthaus-Passion, BWV 244) [출처: 위키피디아] |
바흐(1685~1750)의 종교음악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손꼽히는 곡은 아마도 <마태수난곡>일 겁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1809년~1847)이 100년 만에 이 곡을 다시 연주해 ‘잠자던 바흐’를 부활시켰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음악사적 ‘상식’입니다. 자, 그런데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 악보를 과연 어떻게 발견하게 된 걸까요?
어떻습니까? 굉장히 드라마틱하지요? 물론 영화적 설정입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는 <마태수난곡>이 아니라 바흐의 또 다른 작품인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와 관련해 존재합니다. 어떤 이가 버터가게의 허드레 종이 속에서 바흐의 악보를 발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 ‘발견자’는 자신이 발견한 악보가 바흐의 친필인 것으로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아내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필사본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마태수난곡>과 정육점 고기 포장지는 ‘실제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터넷 곳곳에 이 장면이 ‘사실’로 둔갑해서 떠돌아다닙니다. 인터넷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사실 저는 이런 현상이 좀 우려스럽습니다.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한 억측들이 마치 실제 상황인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들이 왕왕 있습니다. 그런 억측들을 퍼 나르는 사람들도 문제겠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일부 성악가나 연주자들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아니면 아예 지어내는 경우입니다. 일부 기자들이 그것을 ‘검증 없이’ 받아쓰고 네티즌들은 또 퍼 나릅니다. 그래서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은 거짓부렁인 경우가 심심찮게 있습니다. 예컨대 ‘누가 누구를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어마어마한 천재’라고 평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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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더라도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의 전곡 악보를 입수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바흐가 세상을 떠난 후, 교회음악 악보들은 대부분 둘째 아들인 카를 필립 에마뉴엘 바흐가 물려받지요. 그 다음에는 테너 가수이자 고서적 수집가인 G. 푈샤우가 그것을 몽땅 사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멘델스존의 가정교사였던 프리드리히 첼터(1758~1832)와 친밀한 사이였지요. 멘델스존의 스승인 첼터는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 음악 교육가였습니다. 베를린을 근거지로 활약했던 북독일 악파의 중심인물이었지요. 그는 베를린 징아카데미(Singakademie, 오늘날의 베를린 필하모닉도 이 단체에서 파생된 오케스트라입니다)의 지휘자로서 하이든의 <천지창조>와 <사계>를 베를린에서 초연했던 주인공입니다. 1829년에 베를린왕립도서관이 건립될 때, 음악 부문의 자료 확보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그는 바흐의 열렬한 신봉자였습니다. 어린 제자 멘델스존에게 바흐의 음악을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 악보를 천신만고 끝에 ‘발견’했다는 상상력은 별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멘델스존이 이 곡을 초연 100년 만에 ‘다시 연주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안하던 일을 해낸 것이지요. 심지어는 바흐 신봉자였던 스승 첼터마저도 연주를 반대했습니다. 그렇게 길고 고루한 음악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진 곡을 누가 들으러 오겠냐는 우려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원곡 악보에 자신의 첨삭(添削)을 가미해 1829년 3월 1일에 마침내 무대에 올렸습니다. 1829년은 <마태수난곡>이 초연됐던 1729년(1727년 설도 있음)으로부터 꼭 100년이 되는 해였지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애초에 연주를 반대했던 스승 첼터마저도 자신의 친구 괴테(1749~1832)에게 이날의 연주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자랑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흐 사후에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던 <마태수난곡>은 그렇게 부활합니다.
바흐가 작곡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수난곡’은 모두 두 곡이지요.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이 있습니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걸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수난곡’(Passion)이란 교회의 수난주간에 연주되는 음악입니다. 그렇다면 ‘수난주간’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로마군대에 붙잡혀 십자가에서 처형되기까지, 지상에서 겪은 고난을 기리는 주간이지요. 말하자면 부활절보다 조금 앞서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가 수난주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날짜가 조금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잘 아시는 분이 계시면 댓글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어쨌든 <마태수난곡>은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기본 텍스트로 삼고 있는 ‘극적(劇的)인 음악’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술된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바흐 시대에 활약했던 작사가 프리드리히 헨리치(1700~1764)가 좀더 시적으로 변형시켜놓은 텍스트가 많이 등장합니다. 크게 보자면 1부와 2부로 나뉘지요. 1부는 예수가 자신의 고난을 예언하는 장면에서부터 로마군대에게 붙잡히기까지의 과정입니다. 2부는 체포된 이후의 과정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을 거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마침내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합창과 아리아로 펼쳐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안식’을 기원하는 엄숙한 합창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지요.
이런 종교적 극음악을 오라토리오(Oratorio)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태수난곡>은 오라토리오 스타일의 수난곡입니다.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독창, 합창, 관현악이 모두 등장합니다. 하지만 무대 연출이나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페라에 비해 합창의 비중이 더 크고, 합창과 아리아 사이에 줄거리를 설명하는 해설자, 다시 말해 ‘복음사가’가 등장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Kommt ihr Tochter, helft mir klagen(오라 딸들아, 나를 슬픔에서 구해다오)」
「Wir setzen uns mit Tranen nieder(우리는 눈물에 젖어 무릎을 꿇고)」
「Erbarme dich, mein Gott(나의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서도 언급했듯이 <마태수난곡>은 대곡(大曲)입니다. 모두 68곡(신전집은 78곡)으로 이뤄졌고 연주시간은 어림잡아 3시간에 달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1부의 첫번째 합창과 2부의 마지막 합창, 그리고 <마태수난곡>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베드로의 눈물어린 노래 ‘Erbarme dich, mein Gott’를 들어보겠습니다. 1부의 첫 합창 제목은 ‘Kommt ihr Tochter, helft mir klagen’입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오라 딸들아, 나를 슬픔에서 구해다오’입니다. 2부의 마지막 합창은 ‘Wir setzen uns mit Tranen nieder’이지요. 번역하자면 ‘우리는 눈물에 젖어 무릎을 꿇고’입니다. 음악의 시작과 대미를 장식하는, 웅장하면서도 비극적인 합창입니다.
예수를 세 번 부정했던 베드로가 통한의 심정으로 부르는 아리아는 39번째(신전집에서는 47번째) 곡으로 등장하지요.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나의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입니다. 솔로 바이올린과 독창이 심금을 울리는 알토(여성) 아리아입니다. 극중 화자는 베드로인데 왜 알토가 부를까요? 그런 의문을 가질 분들이 당연히 있을 겁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흐가 그렇게 정해놓은 겁니다. 덕분에 한층 더 애절한 분위기를 풍기지요.
p.s. 1. 바흐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많은 조언을 주시는 강해근 교수님(전 한양대 음대 학장)께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 주말마다 저한테 시달림을 당하는 후배, 음반비평가 박제성님의 ‘객관적 조언’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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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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