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통영과 사랑에 빠진 이유
이별에서 비롯된 슬픔은 차갑고 매섭게 내 정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 감정으로부터 떠나고 싶었고, 떠나야만 했다. 낯선 공간에 서서, 타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나를 바라보는 것. 그렇게도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어쩌면 여행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 연유로 통영의 포구를, 한산도의 작은 오솔길을 걷게 되었다.
201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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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도 시도 갈아야 제 맛!
통영 강구안 포구만큼 다채로운 곳도 없다. 도심 속 포구답게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활어 시장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을 드나드는 배로 포구의 물결은 잦을 때 없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갓 잡아 올린 물매기와 아귀의 펄떡거림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포구에서 5분 정도 언덕을 오르면 동피랑 마을이 나온다. 골목 곳곳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동화책을 펼친 듯하다. 양팔을 크게 벌리기에도 좁은 그 길을 끝까지 오른다. 초고층 빌딩 아래에선 높기만 했던 하늘이, 여기선 제법 낮다. 한눈에 들어찬 포구에 절로 숨이 깊어진다. 내 안으로 통영의 바다가 들어온다.
통영의 옛 이름은 ‘진남’, 강구안 포구 역시 진남 포구라고 불렸던 곳이다. 포구는 입구가 좁은 항아리처럼 외부에선 그 안을 잘 볼 수가 없다. 남쪽의 망을 보는 산이라 이름 붙은 남망산이 입구를 막으며 방패와 방파제 역할을 해내었다. 군사요충지였던 만큼 포구에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기리는 거북선이 정박해 있다. 포구에 앉아 드나드는 배와 사람들의 발걸음만 보아도 충분한 휴식이 된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톱 가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다. 포구의 모퉁이에서 50년 동안 톱을 만들어온 강갑중 할아버지는 시인으로 더 유명하다. 그가 지은 시의 대부분은 노래로 만들어졌다. ‘한 송이 꽃이라도’, ‘기다림’, ‘굴까는 통영아가씨’ 그의 솜씨를 보고 있으면 톱도, 시도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제 맛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주름이 펼쳐지고 접힐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강구안 포구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향기를 가지게 되었다.
포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나폴리 모텔이다. 통영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해 관광객들에게는 익숙한 숙소다. 이곳을 비롯한 통영 일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김연수 소설가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으로 통영의 옛 명칭인 ‘진남’을 다시 살려냈다. 그보다 먼저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이 진남을 다뤘다. 포구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생가로 가기까지 문화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작곡가 윤이상 음악 거리를 비롯하여, 유치환 시인의 우체국까지. 통영은 축복받은 도시임에 분명하다.
실토
2008년의 일이니 제법 오래된, 가까운 기억 하나. 나는 무심결에 통영으로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에 한 결심인지, 운임표를 바라보며 한 결심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어디론가 떠나야했고, 그때 나를 이끈 건 통영이었다. 가방 속에는 카메라와 삼각대,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과 두꺼운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정오 즈음 통영시에 도착했고, 곧장 시내버스를 타고 강구안 포구에 들어섰다. 바닷가에 살아온 나였지만, 통영이라는 도시, 그것도 포구를 낀 도심은 낯선 풍경이었다. 분주한 어민들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었다. 걷다보니 여객선 터미널이 나왔다. 안내소에서 지도를 구해 펼쳤다. 목적지는 없었다. 나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이나 지도를 살폈다. 나는 지도 안과 밖을 동시에 헤맸다.
결국 가장 빠른 배편을 끊었다. 한산도로 떠나는 배였다. 출항하는 배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니 문득 떠나간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나는 통영이, 한산도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냥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었다.
그 즈음 나는 이별했다.
괜찮아.
인간은 누구나 이별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육체와도 이별을 해야 한다. 우리는 어제와 이별하고 난 후에야 오늘을 만날 수가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이별을 하고 있다. 故김광석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하지만 이별의 최초는 만남이다. 막 태어난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만남이다. 우리는 오늘을 만나고, 내일을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만난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의 시 「휴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순간은 오는 걸까 가는 걸까?’ 오는 것은 만남이고 가는 것은 이별이다. 우리의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그러니, 괜찮아.
괜찮아?
괜찮은 척 둔갑한 몹쓸 내 심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떠나.
이별의 노래
이별에서 비롯된 슬픔은 차갑고 매섭게 내 정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 감정으로부터 떠나고 싶었고, 떠나야만 했다. 낯선 공간에 서서, 타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나를 바라보는 것. 그렇게도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어쩌면 여행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 연유로 통영의 포구를, 한산도의 작은 오솔길을 걷게 되었다.
제승당에서 가벼운 목례를 하고, 이순신 장군이 즐겨 쏘던 활터를 구경하기도 하며 나는 조금씩 여행자의 모습이 되었다. 아왜나무에서 핀 붉은 열매를 유심히 관찰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곤 배 시간에 맞춰 포구로 돌아와 다시 걸었다. 밤이 깊도록 나는 걷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밤이 새도록 통영의 곳곳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보니, 산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나뭇잎 밟히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비탈길에서 이제는 걷는 것이 유일한 일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걸었다. 그렇게 나는 이별의 슬픔을 조용히 묻어두었다.
가끔 나는 내 슬픔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정도면 나는 통영 예찬론자인가?
통영 강구안 포구만큼 다채로운 곳도 없다. 도심 속 포구답게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활어 시장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을 드나드는 배로 포구의 물결은 잦을 때 없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갓 잡아 올린 물매기와 아귀의 펄떡거림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포구에서 5분 정도 언덕을 오르면 동피랑 마을이 나온다. 골목 곳곳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동화책을 펼친 듯하다. 양팔을 크게 벌리기에도 좁은 그 길을 끝까지 오른다. 초고층 빌딩 아래에선 높기만 했던 하늘이, 여기선 제법 낮다. 한눈에 들어찬 포구에 절로 숨이 깊어진다. 내 안으로 통영의 바다가 들어온다.
통영의 옛 이름은 ‘진남’, 강구안 포구 역시 진남 포구라고 불렸던 곳이다. 포구는 입구가 좁은 항아리처럼 외부에선 그 안을 잘 볼 수가 없다. 남쪽의 망을 보는 산이라 이름 붙은 남망산이 입구를 막으며 방패와 방파제 역할을 해내었다. 군사요충지였던 만큼 포구에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기리는 거북선이 정박해 있다. 포구에 앉아 드나드는 배와 사람들의 발걸음만 보아도 충분한 휴식이 된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톱 가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다. 포구의 모퉁이에서 50년 동안 톱을 만들어온 강갑중 할아버지는 시인으로 더 유명하다. 그가 지은 시의 대부분은 노래로 만들어졌다. ‘한 송이 꽃이라도’, ‘기다림’, ‘굴까는 통영아가씨’ 그의 솜씨를 보고 있으면 톱도, 시도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제 맛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주름이 펼쳐지고 접힐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강구안 포구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향기를 가지게 되었다.
굴까는 통영 아가씨 (작사 강갑중 / 작곡 고승하) 두 손을 불끈 쥐고 통영의 눈물이라. 굴까는 아가씨 가는 세월 모르나요. 예쁜 나이 스물두 살. | ||
실토
2008년의 일이니 제법 오래된, 가까운 기억 하나. 나는 무심결에 통영으로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에 한 결심인지, 운임표를 바라보며 한 결심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어디론가 떠나야했고, 그때 나를 이끈 건 통영이었다. 가방 속에는 카메라와 삼각대,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과 두꺼운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정오 즈음 통영시에 도착했고, 곧장 시내버스를 타고 강구안 포구에 들어섰다. 바닷가에 살아온 나였지만, 통영이라는 도시, 그것도 포구를 낀 도심은 낯선 풍경이었다. 분주한 어민들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었다. 걷다보니 여객선 터미널이 나왔다. 안내소에서 지도를 구해 펼쳤다. 목적지는 없었다. 나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이나 지도를 살폈다. 나는 지도 안과 밖을 동시에 헤맸다.
결국 가장 빠른 배편을 끊었다. 한산도로 떠나는 배였다. 출항하는 배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니 문득 떠나간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나는 통영이, 한산도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냥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었다.
그 즈음 나는 이별했다.
괜찮아.
인간은 누구나 이별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육체와도 이별을 해야 한다. 우리는 어제와 이별하고 난 후에야 오늘을 만날 수가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이별을 하고 있다. 故김광석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하지만 이별의 최초는 만남이다. 막 태어난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만남이다. 우리는 오늘을 만나고, 내일을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만난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의 시 「휴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순간은 오는 걸까 가는 걸까?’ 오는 것은 만남이고 가는 것은 이별이다. 우리의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그러니, 괜찮아.
괜찮아?
괜찮은 척 둔갑한 몹쓸 내 심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떠나.
이별의 노래
이별에서 비롯된 슬픔은 차갑고 매섭게 내 정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 감정으로부터 떠나고 싶었고, 떠나야만 했다. 낯선 공간에 서서, 타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나를 바라보는 것. 그렇게도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어쩌면 여행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 연유로 통영의 포구를, 한산도의 작은 오솔길을 걷게 되었다.
제승당에서 가벼운 목례를 하고, 이순신 장군이 즐겨 쏘던 활터를 구경하기도 하며 나는 조금씩 여행자의 모습이 되었다. 아왜나무에서 핀 붉은 열매를 유심히 관찰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곤 배 시간에 맞춰 포구로 돌아와 다시 걸었다. 밤이 깊도록 나는 걷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밤이 새도록 통영의 곳곳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보니, 산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나뭇잎 밟히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비탈길에서 이제는 걷는 것이 유일한 일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걸었다. 그렇게 나는 이별의 슬픔을 조용히 묻어두었다.
가끔 나는 내 슬픔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정도면 나는 통영 예찬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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