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가 덜 된 남자, 유혹한 여성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떠나다 - 『푸른 작별』
맥기는 그냥 불만에 가득 찬 무뢰한이 아니다.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의 매력은 무엇보다 맥기에게 있다. 맥기는 냉소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인생의 고독을 알면서도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제임스 본드의 느물거림 대신 이지적이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인상으로 사건들을 해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맥기는 이 세상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글ㆍ사진 김봉석
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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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 맥기. 마이애미의 보트 선착장에 정박한 요트 ‘버스티드플러시’에 살고 있는 남자. 정식 탐정은 아니고,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아주고는 이익의 절반을 가진다. 돈이 들어오면 유유자적 살아가다가 빈궁해질 즈음이 되면 다시 일을 찾아 나선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인 것 같지만, 늘 생각처럼 인생이 살아지는 건 아니다. 문득 찾아온 아름다운 여인의 말에 귀 기울이다가 덜컥 일을 맞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인 감정에 휘말리기도 한다.

‘버스티드플러시’는 포커를 좀 쳐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똑같은 문양 다섯 개 가 들어오면 플러시가 된다. 풀하우스보다는 하나 밑이지만, 비교적 높은 패이기에 판을 흔들 정도는 된다. 버스티드플러시는 플러시에 하나가 모자란 상태이지만, 상대는 나의 히든 카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심리와 기 싸움이다. 블러핑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치밀하게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여 오판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상대의 패도 꿰뚫어봐야 하고. ‘버스티드플러시’는 맥기가 포커 판에서 돈을 따 요트를 장만하게 된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맥기의 이런저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난 버스티드플러시야말로 근본적으로 반체제적인 인간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최적의 요새임을 깨달은 바 있다. 더러운 풍문이며 질문에 시달릴 가능성도 적고, 다음 만조가 오면 언제든 유유히 떠날 수 있다.

트래비스 맥기는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누릴 건 대체로 다 누리고 있다. 나름의 방식대로 돈도 풍족하게 벌고, 수많은 여인들이 언제나 산재해 있고, 자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맥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4년. 제임스 본드의 첫 영화인 <007 살인번호-닥터 노>가 상영된 해가 1962년이니, 맥기의 캐릭터가 어디에서 흘러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정부의 비밀요원인 제임스 본드와 달리, 트래비스 맥기는 반영웅이다. 그는 체제를 불신하고, 오로지 자신의 인생만을 응시한다. 하드보일드의 전형적인 주인공들과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맥기의 무대는 우울한 회색의 도시가 아니라 한없이 쨍한 하늘과 바다가 펼쳐진 마이애미다. 여자에게 한없이 부드러운 신사, 그러나 결코 여성의 응석을 받아주지는 않는 차가운 야수.

적당히 볕에 탄 미국인의 전형. 골격이 드러나는 널찍하고 신뢰가는 얼굴....물론 폭력적인 방향으로 자극받으면, 지옥 중에서도 으슥한 한 귀퉁이에서 올라온 무언가 같다는 이야기를 곧잘 듣는다.

트래비스 맥기를 창조한 존 D 맥도널드는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2차 대전에 참전한다. 종전 직전 쓴 소설이 잡지에 실리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맥도널드는 1964년 『푸른 작별』에서 트래비스 맥기를 선보이며 1985년 스물한 번째 작품인 『외로운 은빛 비』(The Lonely Silver Rain)로 끝을 맺는다. 예정된 마지막 편이 아니라 맥도널드의 죽음으로 더 이상 맥기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맥도널드의 대표작은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와 <케이프 피어>라는 제목의 영화로 두 번 만들어진 『사형 집행인들』(The Executioners)이다. 그레고리 펙과 로버트 미첨이 주연을 맡고 J. 리 톰슨이 연출한 1962년작과 로버트 드 니로와 닉 놀티가 나오고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1991년작 중에서 반드시 봐야할 영화는 전자다.

『푸른 작별』은 맥도널드의 개인적 배경이 진하게 깔려 있는 작품이다. 2차 대전 당시 전장에서 불법적으로 검은 돈을 모은 군인들이 등장하고, 그 돈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갈취한 남자가 나온다. 그 남자, 주니어 앨런은 그야말로 야수 같은 남자다.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로. 앨런은 여자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희생물들이 무너지고 파멸하는 광경을 즐길 뿐이다. 여성을 유혹하고, 그녀들을 나락으로 밀어 넣고 떠나버린다. 그 가학적인 즐거움에 앨런은 도취해 있다.

주니어 앨런은 오히려 진화가 덜 된 부류였다. 놈은 아직 동굴에서 제대로 벗어나지도 못한 채, 타인을 망가뜨릴 뿐이었다. 대다수의 인간을 가운데에 놓고 우리 인류의 분포를 종형 곡선으로 나타내면, 로이스와 앨런은 그 양극단에 각기 위치할 것이다. 인간이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로이스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미래였다. 예민한 감성은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받아들여야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주니어 앨런 같은 종자가 너무도 많이 널려있다.

맥기는 앨런 같은 이들을 너무나 싫어한다. 하지만 그가 싫어하는 것은 야수만이 아니다. 경영학을 공부하며 자본주의의 실체를 파악하기라도 했던 건지, 맥도널드는 맥기를 통해서 현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을 드러낸다.

그들이 배운대로라면, 명랑하고 성실하게 주변에 잘 적응해서 살면 세상은 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그래서 그들 모두는 미숙한 채로, 자신감에 차 미소를 지으며 전문가들의 세상에 들어선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모든 게 삐거덕거리고 엉망이 되었으며, 지긋지긋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아무것도 모르고 첫걸음을 디디는 이들에게 우리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저 코앞에 대고 꿈이라는 당근만 흔들어 댈 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미안하지만 넌 아무 것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뒤늦게 진실을 밝힌다. 근사하게 지어놓은 학교들에서는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남지 못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근사한 곳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맥기는 그냥 불만에 가득 찬 무뢰한이 아니다.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의 매력은 무엇보다 맥기에게 있다. 맥기는 냉소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인생의 고독을 알면서도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제임스 본드의 느물거림 대신 이지적이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인상으로 사건들을 해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맥기는 이 세상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난 감정적 자극을 좀처럼 제어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를 경계한다. 물론 경계하는 것은 그 외에도 많다. 신용카드, 소득공제, 보험, 퇴직연금, 예금 계좌, 경품 쿠폰, 시계, 신문, 담보 대출, 설교, 기적의 신소재, 탈취제, 체크리스트, 시급제, 정당, 공공 도서관, 텔레비전, 여배우, 청년 상공회의소, 가장행렬, 진보, 천명론.

맥기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근거 없는 믿음에 취해 허청이며 선을 넘어가 버린다. ‘이 숨막히는 맹목적인 믿음은 어디서 비롯한 것인가? 비정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생생히 경험한 여자가, 이 넓은 세상이 괴물로 가득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이 굴다니.’ 맥기는 한탄하면서도 그들을 돕는다. 기본적으로 맥기 시리즈는 선의로 가득 차 있고, 맥기는 투덜거리면서도 나름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개고생을 한다.

존 D 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대중소설이다. 이 소설 안에 대단한 인생의 잠언이 담겨 있거나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고전에 속할 정도로 시간도 오래 흘렀기에, 맥기의 말과 행동들이 그리 신선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다. 성과 폭력의 적당한 어우러짐도 전형적이다. 그러나 대중소설로서 맥기 시리즈의 가치는, 무엇보다 맥기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감행하는 갖가지 모험담에 있다. 우리가 왜 계속해서 007 시리즈를 보겠는가. 『푸른 작별』을 덮고 나면 맥기의 또 다른 모험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어딘가에서 보던 것 같은 이야기들이 또 익숙하게 펼쳐지겠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변함없이 소설과 영화들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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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작별
존 D. 맥도널드 저/송기철 역 | 북스피어
트래비스는 탐정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세상에는 반쯤 합법적인 도둑질이 넘쳐난다. 그를 찾아오는 자들은 탐정도, 경찰도 찾아줄 수 없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보수는 잃어버린 액수의 절반. 부담스러운 비용이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의뢰인들은 언제, 어디서건 튀어나온다. 그날 역시 조용하게 보낼 수 있었던 저녁이었다. 그의 곁에 머무르던 댄서 추키 맥콜이 새로운 의뢰인을 소개하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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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D 맥도널드 #푸른 작별 #트래비스 맥기 #버스티드플러시 #케이프 피어 #사형 집행인들
1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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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ghee0412

2012.12.04

흥미로운 소재의 소설이네요. 지금 당장이라도 읽고 싶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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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23

2012.12.03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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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2012.11.30

흥미율 돋는 소설인듯.. 방학때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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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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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D. 맥도널드

191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새런에서 태어나 총기제조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한다. 시러큐스 대학에 다니던 중 그곳에서 만난 도로시 프렌티스와 스물한 살에 결혼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장교로 입대한다. 제대 직전인 1945년, 아내에게 보낸 단편 소설이 《스토리(Story)》지에 실리자 제대 후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986년 일흔 살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범죄 소설에서 SF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특히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이언 플레밍의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더불어 미국의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시리즈물로 손꼽힌다. 마이애미 바히아마르 해변에 정박해 둔 하우스보트 ‘버스티드플러시’에서 살아가는 트래비스 맥기는 사설탐정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은밀한 사정으로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것을 되찾아 주고 그 절반을 대가로 받아 생활한다. 이 시리즈는 1964년 『푸른 작별(The Deep Blue Good-by)』 로 시작하여 1985년 스물한 번째 작품인 『외로운 은빛 비(The Lonely Silver Rain)』로 끝이 아닌 끝을 맺는다. 1962년 미국 추리작가협회(MWA)에서 그랜드마스터의 칭호를 받았고, 1984년에는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의 열여덟 번째 작품인 『녹색 살인광(The Green Ripper)』로 전미 도서상(U.S. National Book Awards) 추리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사형 집행인들(The Executioners)』은 〈케이프 피어(Cape Fear)〉란 제목으로 1964년과 1991년에 두 번 영화화된다. 1964년 작은 J. 리 톰슨이 감독을, 그레고리 펙과 로버트 미첨이 주연을 맡았다. 리메이크된 1991년 작에는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을 맡고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하여 지금까지도 스릴러 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