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공부하기 위한 주요 교과서라고 하면 역시 사서오경이 떠오른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중용은 송나라 시대에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된 책으로, 특히 주희가 쓴 중용장구가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개인의 내면 세계를 철학적으로 다룬 중용은 사서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책으로 인식된다. [동양고전, 2012년을 말하다]에서는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과 이기동 교수와 난해하기로 유명한 중용을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천국을 믿습니까?
“여러분,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라는 이기동의 질문은 솔직히 뜬금없었다. 현대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 판단한다면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기동은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에 물음을 던졌다. 이기동은 역사는 계절처럼 순환하는 것이며, 하늘의 논리와 땅의 논리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순환한다고 말한다. 하늘의 논리가 강한 시대는 정신을 강조하는 시대이며, 땅의 논리가 강한 시대는 반대로 몸을 중시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하늘의 논리와 땅의 논리 중에 어떤 것이 더 강한 시대일까? 땅의 논리가 강한 시대다. 몸과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는 시대.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를 상징한다.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천국의 유무를 묻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애초에 천국이 있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기동은 땅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경쟁이 삶의 원리가 된다고 말한다. 경쟁은 물질적인 발달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교감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주변 사람을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기동은 현대 사회에 만연해있는 경쟁적인 삶을 동물애호와 연애를 통해 설명한다.
“경쟁의 논리가 강해지면 친구가 없어집니다.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축하한다고 말은 하지만 입은 비틀립니다. 반대로 친구에게 나쁜 일이 있으면 안타깝다고 말은 하지만 입은 웃습니다. 그래서 친구랑 놀지 않고 집에 일찍 들어갑니다. 집에 일찍 들어가서 개하고 놉니다. 개는 스트레스를 주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죽어도 울지는 않지만, 개가 죽으면 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연애를 할 때도 경쟁적으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10억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열심히 사귑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30억을 가지고 있다면 바꿔야 합니다. 잘못하면 20억이 날라갑니다. 그런데 30억을 가진 사람하고 사귀기 위해서는 10억을 가진 사람과는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헤어져야 하냐 양심에 걸리거나 찝찝해서는 안 됩니다. 쿨하게 헤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연애를 하고 있어도 외롭습니다. 내가 그 사람은 언제 바꿀지, 그 사람이 나를 언제 바꿀지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결혼을 한다고 해서 안심이 되지는 않습니다. 불안하니 재산을 공동명의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는 한 집에서 살아도 외롭고 불안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땅의 논리는 현대 문명을 크게 발전 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측면이 발달됨과 동시에 외로움과 쓸쓸함도 강해졌다. 그래서 이기동은 이제는 땅의 논리에서 하늘의 논리로 다시금 순환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기동은 한국이 참으로 신기한 나라라고 말한다. 한국은 땅의 논리가 중심이 되는 나라이면서도 마음에 대해서 꾸준히 신경을 쓰면서 살아온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기동은 이제 한국이 세계의 리더로 급부상하리라고 예견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마음을 찾아라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벗어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가려진 데서 가장 드러나고, 작은 것(마음속)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신중히 노력한다. 희노애락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중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상황에 알맞게 되는 것을 화라 한다. 중이란 천하의 큰 뿌리이고, 화란 천하의 어디를 가나 통하는 도리이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 중용 수장 (中庸 首章)
그렇다면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하늘에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하늘에 가야 하는데,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하늘에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기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기동은 사람을 만나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찾아오게끔 하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내가 천국으로 가도 되지만, 천국을 나에게 끌어와도 되는 것이다. 중용은 천국을 나에게 끌어내리는 책이다. 그래서 이기동은 중용을 ‘천국에 가는 길잡이’라고 정의 내린다.
천국을 나에게 끌어오는 것은 마음가짐에 달렸다. 이기동은 천사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천사이고, 도둑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도둑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하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천국이 된다. 이기동은 하늘은 부모와 같다고 말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희망하는 것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자식이 계속 사는 것이다. 이기동은 하늘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계속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하늘은 사람에게 계속 지시를 내린다. 사람은 하늘의 명령을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식사로 설명하면 배가 고프면 하늘에서는 밥을 먹으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 지시는 우리에게 공복감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성(性)은 마음(心)과 생(生)이 합쳐진 글자이다. 성은 살고 싶은 마음이다. 만물이 살기는 바라는 하늘의 마음이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살고 싶은 마음과 같다. 그것이 바로 본성이다. 이기동은 사람이 본성대만 살면 하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고, 하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자신 마음 속에 있는 본성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선생님, 본성이 보이지가 않아요
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하늘 마음으로 살면 되고, 하늘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 마음 속에 있는 본성을 따라가면 된다. 문제는 자신 마음 속에 있는 본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기동은 본성을 산속 깊이 존재하는 옹달샘에 비유한다.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옹달샘은 고여있는 물이 아니다. 물길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옹달샘을 못 찾으면 물길을 찾으면 된다. 이처럼 이기동은 성(性)을 옹달샘에 비유하며 그 옹달샘으로 흐르는 물길을 도(道)라고 설명한다.
또 다른 문제는 깊은 산속에 물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안 보인다는 거다. 이는 물이 딴 데로 새고 있기 때문이다. 물이 길을 따라서 흐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고 있기 때문에, 물길이 망가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이 잘 흐르도록 길을 잘 수리해서 원래대로 돌리면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길이 망가져 성이 딴대로 새고 있다. 고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수도(修道)이며, 이를 교(敎)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은 마음의 길을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만을 가르쳐왔다. 그렇기에 이기동은 한국의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하지만 그것은 땅의 논리에서 남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이기는지에 대해서만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의 정의가 여기 나와있지요? 바로 수도입니다. 마음의 길을 수리하는 것이 아니면 교육이 아닙니다. 진짜 교육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짜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마음의 길을 닦아라
우리의 감정은 계속 흘러나오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지하수처럼 마음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기동은 이를 하늘마음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 하늘마음은 동식물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이를 천심(天心)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천심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두 같아야만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어하고, 졸리면 잠을 자고 싶어하듯 말이다. 하지만 세상을 잘 둘러보면 사람의 성격은 가지각색이다. 어째서 이럴까? 이기동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의식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한다. 의식은 인간이 경험한 내용을 기억이란 방법으로 저장하고, 기억은 나라는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나라는 개념이 생기면 너라는 개념도 생기게 마련이다. 너와 나의 분별이 없었지만 분별이 생기고 만 것이다. 사람에게 나라는 개념이 생기면 내 것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 중심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계산을 하게 되고, 계산을 하려는 생각은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성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감정인 아(亞)다. 아(亞)에 마음(心)을 더하면 악(惡)이 된다. 악이란 본성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피곤하면 본성에서 쉬라고 명령을 하지만 악한 마음은 쉬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한다. 배고프면 본성에서 밥을 먹으라고 명령을 하지만 악한 마음은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기동은 하늘의 마음을 계속 어기게 되면 천벌이 내리게 된다고 말한다.
악(惡)이 생기게 되면 선(善)이란 개념도 생기게 마련이다. 천사나 악마라면 아마 선한 방향 혹은 악한 방향으로만 행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란 선한 마음이 전혀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기동은 악마라도 선한 마음의 길이 아주 조금은 남아있다고 말한다.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의 길을 망가트렸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분명히 흔적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기동은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내서 마음의 길을 수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제 마음의 길이 흘렀던 흔적은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은 하루 종일 같은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어떤 때는 선하고 어떤 때는 악하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이 가장 선해 보일 때는 잠을 잘 때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잠을 자는 모습만큼은 대부분 평온하다. 이기동은 잘 때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욕심을 이끌어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기동은 잠이 들기 직전, 마음의 욕심이 가라앉은 시점에 선한 마음의 길이 복원된다고 말한다.
이기동은 군자를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 오히려 더 조심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 더 조심할까? 혼자 있을 때 천심이 더 잘 들리기 때문이다. 군자는 천심이 들리는 순간에 집중하고 더욱이 조심조심하게 된다.
선생님, 하늘마음은 한마음이군요
사람의 마음에는 크게 조화를 이루는 마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마음 두 가지가 있다. 이기동은 하늘마음은 한마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조화를 잘 이루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옆에 있는 친구의 높은 학점을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면 한마음이고, 기분이 나쁘다면 욕심이라는 것이다. 이기동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자신의 마음을 테스트해보기를 권했다.
이기동은 세상만물이 하나라고 말한다. 하늘마음으로 살면 세상만물과 갈등 없이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욕심만 챙기다 보면 조화가 깨지게 마련이다. 많은 경우 욕심은 우리의 본성을 대신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슬프게도 욕심은 부리면 부릴수록 점점 거대해져 간다. 결국, 욕심에 끌려 다니며 욕심의 노예로 살게 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하지만 자기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산다면 만물이 올바르게 자란다.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바뀐다.
사자는 사슴을 잡아먹는다. 이런 세상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기동은 이를 거꾸로 바라보기 때문에 좋지 않게 보이는 거라고 말한다. 바른 마음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자 없이 사슴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사슴의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사슴이 먹을 풀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니 사슴은 멸종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자가 사슴을 잡아 먹기 때문에 사슴의 개체 수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렇기에 종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개체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기동은 모든 사슴을 하나로 본다면 자신을 잡아먹는 사자도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기동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이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생을 한다는 것이다. 이기동은 사람이 모두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중용하면 양극단의 의견에서 균형을 잘 잡는 현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기동의 중용강연은 이런 일반적인 중용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적지 않은 참석자들이 이에 대해서 이기동에게 물었다. 이기동은 물론 중용에 그런 내용도 있지만 결코 핵심은 아니라고 말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절하려는 힘은 결국 마음가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고 잘못된 방향에서 바른 방향으로 길을 수리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중용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정준민
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있는
ljh2540
2015.02.10
우리나라와 일본비교를 많이하네요
마치 일본교수같아요!!!!
중국에서 시작한거 아닌가요???
일본인의 장점에 대해 강의해서 거슬려서
이사람 뭔가 검색했더니 역시 어이없네요...
EBS아침강의들었습니다.괜히들었네요.
free27
2012.11.22
voler08
201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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