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겨울을 강타한 록밴드 ‘사랑과 평화’의 「한 동안 뜸했었지」는 잊을 수 없다. 딱 1년 전 ‘산울림’의 「아니 벌써」도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충격에 있어서 이 곡 또한 못지않았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동안 뜸했었지, 웬 일인가 궁금했었지’ 대목을 소리 높여 흥얼거렸다. 사람들은 이 곡의 재미와 동시에 밴드의 실력을 알아봤다. 전주만 들어도 ‘프로’연주자들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만큼 ‘사랑과 평화’는 펑키 리듬을 표현해내는 숙련된 연주력과 노래로 충격파를 불렀다.
‘사랑과 평화’는 밴드마저 트로트에 경도된 시절에 난 데 없이 ‘펑키(Funky)’ 사운드를 가요에 심는, 돌발적 도발적 밴드였다. 최이철(59)은 그 시절,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평화’의 전성기를 이끌고 간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기억된다. 홍대 상상마당에서 만난 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사랑과 평화’ 그리고 그 이전의 밴드 ‘서울 나그네’ 시절을 추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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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뜸했었지」가 1978년에 늦을 가을에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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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0월28일 날 앨범이 나왔어요. 이제는 전설이 된 TBC ‘쇼쇼쇼’ 프로였죠. 전우중씨가 PD로 있을 때, 3번 방송을 나갔는데 그 다음부터 정신이 없더라고. 사람 혼을 빼더라고요. 하루에 2시간 밖에 못 자고, 이불을 갖고 다니면서 활동을 했을 정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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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와 그 전신인 ‘서울나그네’의 라인업이 거의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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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데, 건반이 한 명 더 늘어났죠. 원래는 김명곤이 했는데 그 후에 이근수이라고 한 명을 더 쓰게 되었어요. 그 때 멤버가 나(보컬, 기타), 김명곤(키보드), 이근수(키보드), 김태흥(드럼), 이남이(베이스) 이렇게 다섯 명이었는데 벌써 셋이 죽었잖아요. 이근수랑 나만 남고. 김태흥씨도 1983년에 자동차사고로 떠났고. 베이스는 그 이후로 많이 바뀌었어요. 이남이씨는 나중 신중현씨(엽전들)랑도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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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서울나그네’가 있었고, 1978년 10월 ‘사랑과 평화’로 나오기 전까지 약 2년간의 공백동안 ‘산울림’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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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과 평화’의 활동 개시에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나요. 산울림은 아마추어인데다가 학생들이었지요. 그 정도 시차는 아니고 동시에 나왔을 것이에요. 산울림이 1977년에 처음으로 「아니 벌써」로 나왔을 때 트레이닝이나 좀 하고 나오지(웃음) 그런 생각은 했는데. 나중에 네 팀이 같이 다녔어요. 우리(사랑과 평화), 산울림, 김트리오, 와일드 캣츠였죠. 그리고 조금 뒤에 나오긴 했지만 ‘송골매’랑도 같이 다녔고. 난 항상 산울림 음악을 높이 사요. 그 친구들 음악 실력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 친구 음악이 나와 딱 한번 들어도 산울림 색깔이 분명했다고 이야기하죠. ‘음악은 이게 중요한 것!’이라고 애들한테 지금도 그렇게 말하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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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산울림 음악을 인정한다는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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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가사도 그렇고. 음악도, 편곡상이나 볼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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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나그네’ 시절을 들려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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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서울나그네’는 좀 말한 것처럼 사랑과 평화 1집 멤버에서 이근수만 없던 4인조였어요. 노래는 김명곤과 내가 둘이 했고. 옛날에 동아방송에 김병후 PD라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방송국 스튜디오를 빌려줘서 거기서 연습을 했어요. 매일 동아방송에 가서 연습하고 친해지다 보니까 나중에 방송 로고송 같은 것도 만들어주고 그랬는데. 밑에는 동아일보고 위에는 방송국이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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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왜 ‘서울나그네’를 눈여겨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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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형이 라디오 진행을 했잖아요. 장희형이 우리를 소개시켜 준거지. 그렇다고 장희형이 우리를 제작하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명동의 ‘로열 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하던 때, 누가 들어오더니 탁자에 모자를 탁자에 딱 올려놓고 콧수염 기른 양반이 술도 안 시키고 우리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에요. 한동안 그러다가 또 그냥 가. 그러더니 언제는 나를 딱 부르더라고. 그때가 1974년으로 ‘서울나그네’ 하기 전에 ‘영 에이스’라는 팀에서 연주하고 있을 때였지.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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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장희씨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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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를 불러서 그런 거죠. 거기서 있다가 나중에 명동에서 ‘서울나그네’로 업소에서 공연을 하는데 거기도 매일 오셨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저를 보고 “너 스타 되는 거 한 번 보고 싶다, 레코딩 한번 하자.”고 그래요. 그런데 그때 레코딩 하는 밴드가 주위에 어디 있어요?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장희 형이 집까지 찾아와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엔 “합시다.” 그랬죠. 그러고 나서 레코딩을 시작했는데 아마 1978년 2월부터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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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만드는데 소요된 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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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걸렸죠. 우리는 멤버가 작곡을 다 했으니까. 그리고 그 때는 2채널이잖아. 틀리면 전부 몽땅 다섯 명이 들어가서 다시 연주하고 노래해야했으니까. ‘원 테이크’였단 거지. 다들 워낙 잘하니까 연습 조금 해보고 들어가면 거의 한방에 끝나다시피 했어요. 다만 작곡하는 시간이 있다 보니까 오래 걸렸죠. 그 때 주위에 ‘데블스’, ‘템페스트’같은 팀들이 있었는데 솔직히 우리는 그런 팀의 음악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냥 트로트스타일을 싫어했어요. 「한동안 뜸했었지」를 편곡했을 때도 최대한 뽕짝 냄새가 안 나게 하려고 전주랑 간주 부분도 신경을 많이 썼죠. 주위 사람들은 우리가 괴상한 음악 한다고 싫어했어요. 아줌마들이 뭐라고 했냐면 바가지 엎어놓고 긁는 소리 같다는 거야. 베이스 소리가 그렇게 나왔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신경 안 썼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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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중들의 열띤 반응에 흡족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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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뜸했었지」를 발표하고 나서 2달 활동했는데 그해 연말 TBC에서 7대가수상을 받았잖아요. 너무 바빠지게 된 거야. 음악도 다 재미도 없어지게 되고. 전에 음악 했던 미8군은 자유롭잖아요. 빨개 벗고 연주하기도 하고. 나중에 멤버들 모아놓고 음악도 재미없고 그러니 미8군으로 다시 들어가자 그랬더니 다들 나보고 미친놈이래.(웃음) 한창때 「한동안 뜸했었지」를 하루에 네다섯 번 불렀으니까 얼마나 지겨웠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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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 1집에 수록된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연주를 하는 팀이 있나 경이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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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이 그 때 건반을 치는 것을 보면 무슨 벌레가 연주하는 거 같아. ‘따라라라라라라’ 하면서. 그 친구가 아코디언을 또 잘해요. 자기 아버지 것으로 연주했는데 손가락이 날라 다녔어요. 예스(Yes)의 「Long distance runaround」는 정말 죽였지. 명곤이한테 고마운 게 또 뭐냐면 조용한 곡을 할 때 실력이 나오는 거야. 스탠더드 재즈 같은 것. 나나 멤버들도 옆에서 연주하다보니까 같이 하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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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명곤씨는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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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은 처음에 만났던 게 1974년도일거야. 대구에 있던 명곤이 옆방에 살았는데 소주를 네다섯 병 혼자 마시고 있는 거야. 하루는 연주를 보니까 정말 잘하는 것이에요. 아버지가 전주MBC 악단장이었다 하더라고. 동갑(1953년생)이고 서로 알아보니까 친해졌어. 그러다보니 우리 멤버들(영 에이스)보다 명곤이랑 더 친해진 거야. 코드워크에 밝은 친구였고 그러다보니 그룹 알기를 우습게 알았지. 내가 하루는 시간 좀 내봐라 해서 내 방에 데리고 가서 헤드폰으로 버디 마일스(Buddy Miles)노래를 들려줬어요. 그때 뭉치게 된 거지. 결국에는 베이스로 김태욱, 명곤이(건반)랑 나(기타)랑 김태흥(드럼) 4인조로 뭉쳤어요. 1972년에. 김태흥씨는 나랑 처음 음악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같이 했어요. 그때부터 미8군에서 음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인기 참 많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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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뜸했었지」는 이장희가 만든 곡은 분명한데 편곡자는 누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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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씨가 작사 작곡을 하고, 편곡은 내가 했죠. 그런데 재킷에 잘못 나왔어. 그래서 장희형에게 따졌지. “형, 밤새 동안 잠도 안자고 내가 편곡해서 만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도 했지만, 판도 다시 찍고 해야 하니까 귀찮아서 그대로 나온 거죠. 그래도 그 형이 양심이 있는 분이라 저작권 협회에 이야기해서 편곡자는 제 이름으로 되어있어요. 「장미」, 「어머님의 자장가」도 장희형 곡이고, 편곡은 내가 하고. 나머지 곡들은 김명곤이랑 내가 작곡한 것들이고. 장희형이 그때 대마초 사건에 걸렸기 때문에 본명으로 안 하고 아들 이름인 이원호로 작곡자 명을 썼었어요. 우리도 걸려서 겪어봤지만 장희 형은 당시 3년간 연예활동 중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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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흥씨에 대해 얘기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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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 같이 살았어요. 네다섯 살 때부터. 어렸을 때 8군에 들어갔을 때 같이 드럼 치던 친구가 시원치 않았어요. 그런데 태흥이형이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Leiber and Stoller)의 「Kansas city」를 완전 다르게 연주하는 거야. “바로 저거다”해서 “같이 해볼래요?” 그랬죠. 내가 연주한 것을 봤는지 형도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더라고. 한마디로 형 드럼은 굉장했어. 더 좋았던 것은 그 형이 해병대 군악대에 들어갔다 오더니 장르 폭이 훨씬 넓어진 거였지. 펑키 스타일 곡을 무대에서 연주하면, 앨범의 곡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날아다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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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최고의 연주 라인업은 언제였다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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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 1기요. 남이형보다는 사르보랑 할 때. 나랑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사람이 김명곤과 사르보인데 사르보는 우리나라에 베이스 기타를 때리면서 연주하는 그거 퍼뜨린 인물이에요. 이탈리아 출신이었지. 미8군에 또 유명한 프랑코 노마노라는 친구도 있었지. 나이도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에요. 원래는 피아노인데 베이스도 정확하게 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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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철 기타 연주의 생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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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할지. 그저 주어진 대로 연주하는 것? 나는 음을 많이 나열하는 것보다는 그때그때마다 느낌이 다른 연주가 아닐까 싶어요. 지금도 그래 지금도. 똑같은 노래를 연주한다고 하더라도 감이 달라. 음은 똑같이 칠 수 있다고 해도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서 연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나도 어릴 때부터 코피도 흘리고 일어나자마자 기타치고 연습하고 그랬는데, 그게 내가 뭐 계획을 세우고 “이것을 떼겠다.” 하고 연습한 게 아니라 좋아서 친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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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은 1980년에 나오고 3집이 1987년에 나오지요. 공백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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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십이 깨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잘못했지 왜냐하면… 솔직히 이야기해도 되나. 옛날에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에 재벌 집 아들이 많이 놀러왔어요. 그 친구들이 오면 (이)남이 형이 술을 있는 대로 먹으니까 인사불성이 돼서 베이스를 자꾸 이상하게 치는 거예요. 그래서 “나 안 해” 그랬죠. 그러니까 남이 형이 마지막 날, 타워 호텔에서 “내가 노래하나 만들었는데 이거 한번 해보자.”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키가 뭐에요”하니까, A 키라면서 그때 ‘울고 싶어라’를 불렀어요. 코드도 간단했고. 그게 1980년도 10월 달이었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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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는 무엇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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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음반 활동을 못했죠. 그 대신에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업소를 전전했어요. 방송금지가 되어서. 1983년 대마초 사건 때문에. 1983년에서 1987년에는 음반활동을 못했고. 야간업소도 원칙적으로 안 되었는데 공개적으로만 하지 않았으면 공연은 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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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 「울고 싶어라」가 히트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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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큰애 백일이었을 때 남이 형이 찾아오셨어요. 잔치다 보니까 음악 하는 분들이 많이 모이셨는데 남이 형이 다시 음악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말했죠. 그래서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겨울바다」처럼 재즈적으로 변형해서 부르던 차에, 남이 형이 「울고 싶어라」는 꼭 한번 넣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넣은 것이에요. 당시 송창의 MBC PD가 앨범을 듣더니 “방송 한 번 합시다.”라면서 「울고 싶어라」를 찍더라고.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미국 공연을 잠깐 갔다 왔는데 보니까 「울고 싶어라」가 차트 2위까지 올라가 있더라고요. 결국에는 「한동안 뜸했었지」처럼 매일 또 그 곡을 하니까 미쳐버리겠더라고. 음악 하는 친구들은 3집이 그 노래 때문에 망쳤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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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 1집은 펑키 사운드였습니다. 펑크 하는 아티스들한테도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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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늙어 죽을 때까지 록만 할 줄 알았는데. 미 8군에 주크박스가 있었어요. 그런데 미국 애들은 음악 듣는 게 거의 몇 곡만 가지고 계속 들어. 게다가 도넛판이 들어오려면 미군 부대에서는 한 1주일 만에 들어오는데,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1년 정도 걸렸어요. 우리는 금방 들었던 거야. 그때 뭐 코모도스(Commodores) 그런 팀들 많이 들었고. 훨씬 전에 소울 뮤직 중에서는 윌슨 피켓(Wilson Pickett),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을 많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을 지금 보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 매일 주크박스에 그런 노래들이 나오니까 김명곤이랑 양쪽에 앉아서 그냥 그 자리에서 따가지고 연습하는 거야. 또 실력이 있으니까 그 다음날 음악을 하고 그래서 미국 애들은 너무 좋아했지. 주크박스로 듣는 걸 실제로 해주니까.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 그룹들이 해 온 것이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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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 앨범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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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것은 1996년 6집까지였는데 나는 앨범 만들 때마다 후회하죠. “왜 이렇게 했을꼬…”하고. 그중에서 「울고 싶어라」 있는 3집. 그건 정말 좋았어요. 수록곡 중에서 「노래는 숲에 흐르고」, 「작은 섬 모두어」가 좋았어요. 요즘 들어서 공연하러 돌아다니면 직장인 밴드가 많이 보여요. 근데 보니까 그 곡들을 연주하더라고. “아니,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곡이 좋아서 알고 있었다고 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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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다 형들이었는데도 최이철 씨가 리더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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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는 확실히 흐름이 있잖아요. 그 흐름이 깨지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팀의 리더가 중요한 것이에요. 리더가 지킬 것은 지키고 중간을 잡아주고 해야죠. 대인관계는 형들이 하더라도 음악만큼은 내가 했지. 음악 가지고 싸우기도 많이 했어. 연주 끝나고 삼겹살 먹으면서도 싸우고. 남이 형이 술 마시면 그걸 잘해. 인생이야기 같은 것을 많이 하고. 그런데 그 이야기 끝까지 들어준 것은 나밖에 없어.(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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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가 「한동안 뜸했었지」를 리메이크를 했지요. 듣고 나서 느낌이 어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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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도 나오고 새롭긴 했는데, 결정적인 게 없잖아요. 코러스 ‘밤이면 창을 열고~’ 이 부분을 왜 뺐을까 싶더라고. 사실은 처음에 리메이크 한 줄도 몰랐어요. TV를 잘 안보니까. 나중에 주유소에서 기름 넣다가 알게 된 거에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더라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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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부터 시작해서 ‘서울나그네’ ‘사랑과 평화’를 거쳐 40년 동안 음악을 해온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입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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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있다면, 그렇게 ‘사랑과 평화’로 거의 반평생을 보냈는데 내가 팀을 잘못 이끌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더욱 격상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런 것이 가장 아쉽지요.
정리: 임진모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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