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 혹독한 태풍이 훑고 지나간 덕분일까. 여름내 기세등등하게 타올랐던 태양이 한풀 꺾인 오후, 조용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의 표정은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낮고 여린 음성에 섞인 남도의 억양은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최소한의 사랑』을 세상에 내 놓은 여름내 유난스런 복통으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는 말에 막연히 2년만의 신작에 대한 작가의 부담감을 가늠해 본다. 전작인 『풀밭 위의 식사』를 세상에 내 놓은 이후 그녀는 모교의 강단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대략 1년간은 강의에 몰두했고 그 후 1년은 틈틈이 작품을 써가며 꽤나 분주하게 보냈다.
“2010년 5월부터 모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마산에서 작품을 썼어요. 사실 소설의 공간은 접경지대 북쪽 끝인데, 소설을 쓸 때는 남쪽 끝에서 쓴 거죠.”
작가 전경린을 두고 다양한 각도의 시선과 평이 존재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통해 치유와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최소한의 사랑』은 유기적으로 얽히고 이어진 독특한 인물들과 평범하지 않은 풍경, 사건들이 작가의 판타지적 기법과 특유의 감성으로 조합되며 전작을 뛰어 넘는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고민과 사색의 농도 역시 짙어졌다. 질문 하나 조차 허투루 넘기지 않고 짧은 고민 후에 가까스로 입을 여는 작가의 진지함이 남다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선이 필요한 시기
소설은 주인공 희수와 그의 오빠가 새엄마를 요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녹내장으로 흐릿해진 시야에 알츠하이머까지 겹치며 오락가락한 정신의 새엄마를 요양원에 홀로 두고 떠나야하는 희수의 불편한 심정을 붙잡는 것은 새엄마의 한마디였다. 바로 새엄마의 딸, 의붓동생인 유란을 찾아달라는 것. 희수의 마음 한편에는 유란에 대해 묵은 죄책감이 있다. 오래전 아버지와 재혼한 새엄마가 데리고 온 동생 유란을 오빠와 함께 놀이로 위장해 성당에 버리고 온 후부터 시작된 죄책감이었다.
유란은 그 이후 새엄마와 떨어져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의 외도와 호주로 떠나버린 딸로 인해 힘겨움이 겹친 와중에 희수는 결국 새엄마의 유언과 같은 부탁을 외면하지 못하고 동생의 흔적을 따라 북쪽의 소도시로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엄청난 추위와 유란이 떠나있는 빈 집이다. 희수는 마치 유란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듯 집에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유란을 기다리는 한편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은연중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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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사랑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요, 어떻게 만들어 진 제목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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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모두가 굉장히 손실과 상실을 겪는 시대죠. 전락하는 계층이 생겨나는 마이너스 시대에요. 이럴 상황을 보며 ‘우리, 혹은 내 자신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현실은 뭘까. 무엇을 잡고 우리는 다시 살기를 시작하고 일어설 수 있나’를 생각을 했어요. 이런 시대에 타자들 간의 경계는 어느 때 보다 복잡해지고 있죠. 다문화가정에서부터 새터민 같은…….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최소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최소한의 사랑’은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선을 생각할 수 있어야 정말 최소한의 평화라도 구상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속에서 만들어 진 제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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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서 판타지적인 요소들, 인물들이 눈에 띄는 것도 특징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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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또 현실을 소설로 표현해내기 위해서, 어쩌면 진실을 위해서 동원하게 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죠. 어느 정도 판타지적인 기법들은 사실 저한테 새로운 것은 아니었어요. 『염소를 모는 여자』때부터 있었고 많은 소설에서 간간이 있었죠. 이번에는 반짇고리 파는 노인이란 인물을 만들어 내면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어떤 존재를 한 번 그려보려 했어요. 반짇고리 파는 노인의 존재와 그 움직임, 노인이 찾아 헤매고 있는 그 무엇 등을 판타지 적인 요소를 통해 소설 전체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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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한여름에 출간을 택했는데 책 속의 계절은 굉장히 춥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로 시원한 느낌도 들었는데 그런 것도 의도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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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더라고요. 추워죽는 줄 알았다고(웃음). 그런 건 아니고 학교에 매여 있다 보니까 방학을 통해서 책을 낼 수밖에 없었어요. 움직임이 좀 자유로워야하니까요. 그런데 폭염에다 런던올림픽이 겹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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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이후에 한 달 가량 지났는데 독자들과는 만남의 자리를 가져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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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간간히 접하곤 했는데, 사실 제 소설은 그렇게 가볍게 읽는 소설이 아닌 것 같아요. 독자들에게는 대개 묵직하게 깊숙이 다가가는 것 같더군요. 어떤 독자는 아주 어려울 때, 뭔가 절망했을 때, 이게 끝이다 싶을 때 제 소설을 읽으면 이상하게 생명력이 다시 솟는다고 하는데 정작 그 힘을 뭐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더군요. 그런 독자들이 좀 많은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제도의 끝에서든, 현실의 끝에서든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만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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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이용해 출간을 하셨다고 하시지만. 본격적으로 집필을 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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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소한의 사랑』은 『풀밭 위의 식사』 보다 먼저 쓰려고 준비를 했던 작품이에요. 이 소설의 공간이 접경지대다 보니까 잘못 만지면 낡은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어떻게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로 새로운 방향에서 만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래서 계속 여기 잡았다가 놓고 저기 잡았다가 놓고 돌리고 돌리다가(웃음) 일단 두고, 『풀밭 위의 식사』를 작업을 해서 먼저 나온 셈이죠. 그리고 한 1년 전쯤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 시작은 오래됐는데, 이 소재 자체가 참 만지기 쉽지 않았어요.
공간에 대한 기억들
세상이 동태궤짝처럼 얼어붙는 것 같았다. 12월 초에 벌써 한파주의보가 발령된 것이었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추위였다. …(중략)… 무심한척하려고 해도 북쪽의 주택에서 맞는 추위는 내게 충격적이었다. 바깥과 다름없이 벽을 밀고 들어오는 추운 공기는 얼음같이 단단한 습기를 머금고 송곳처럼 살을 파고들어 뼛속에 스몄다. 뼈까지 추워지자 추위는 급작스럽게 외로움으로 변했다. 추운 것인지, 외로운 것인지 둘이 애초부터 같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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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즈음부터 몇 년 간 파주에서 지내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작품에서도 남다르게 묘사 돼 있을 정도로 추위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셨던 것 같아요. 작가님은 “공간에 영감을 받는 편”이라고 하셨는데 파주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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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추위가 아주 인상적으로 표현이 됐다고 이야기들을 하시는데, 저는 남쪽 출신이고 줄곧 남쪽에서 산 사람이었어요. 파주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은 남쪽 끝에서 제가 갈 수 있는 북쪽 가장 끝까지 올라갔던 경험이었거든요. 그러니 파주의 추위가 충격이긴 했죠. 바람 한 점 없이 사람을 얼리는 추위였기 때문에……. 사실 접경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가진 곳이죠. 그런데 가끔 그 너머를 생각하면, ‘여기가 이렇게 충격적이고 사람을 죽일 것 같이 추운데 저 너머는 어떤 추위일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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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출신인 작가가 북쪽 가장 끝까지 가서 산 것은 일종의 시도 같은 것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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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인 시도는 아니었지만, 잠재적인 욕구가 있긴 했던 것 같아요. 공간에 대한 욕망이 있다 보니까. 서울에서 7년을 살고 그 후 파주에서 한 5년을 지냈는데…….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은 살아가는 어떤 지점에서 어떤 일로든 자기 소외를 겪는 것 같아요. 그 소외가 일어나는 지점에서 뭔가가 단절 된 채로 얼어붙어 버리면 그 너머로 갈 수 없고 그래서 저마다 내면에 얼어붙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 공간을 (소설을 구상하며) 접경지대라는 외부의 공간으로 배치를 한 거죠.
(소설과 연결해보면) 주인공인 신희수에게는 여동생을 유기하는 그 시점에 자기 소외가 동시에 일어난 거예요.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리고 우두커니 있는 그런 상태……. 그러다가 여동생을 찾아간 것을 계기로 오빠와의 벽을 허물어보려 노력해요. 새엄마의 관계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요. 자기가 버린 이복여동생의 행방을 찾는 것은 일종의 구원성이라고 할 수 있죠. -
접경지대라는 공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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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이런 접경지대는 오늘날 현실에 분명히 있어요. 이렇게 결핍대고 고립되고 생명감이 박탈된 상태로 얼어붙어 적대감만으로 대치하고 있는 지점이죠. 현실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것처럼 사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도 이런 공간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주인공의 내면의 공간’과 ‘우리 현실의 접경지대’, ‘우리 모두의 무의식속에 공간’ 그 세 가지 지점을 동시에 생각해 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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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희수가 웬일인지 생전 겪어보지 못한 접경지대까지 동생을 찾으러 갔고 그 곳에서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도 그와 같은 맥락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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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지대는 상반된 공간이 아니고 사실은 자기 내면에 어떤 단절로 소외 돼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죠. 그 자신의 심리적 공간으로 이동해 간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곳에서 뭔가 자기 소외를 해결하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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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연중에 작품 곳곳에서 분단이라는 우리나라의 실제 상황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상실감 혹은 단절을 부각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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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접경지대 특성이나 분위기 그리고 그 곳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생활모습을 통해 그런 것이 드러났어요. 그런데 사실 분단이 되고 접경지대가 생겨난 것이 이제는 대략 60여 년 전의 일이잖아요. 그리고 지난 세기부터 이어진 역사는 우리도 감당하고 있고 북한 사람들도 감당하고 있는 똑같은 상황이죠. 60년의 시간동안 우리의 시대는 정말 여러 번 변했어요. 너무 많이 변해서 지금 너무나 다른데 유독 그곳은 60년 전 그대로 너무나 관념적으로 고착돼 있는 거예요. 공포나 원한이나 불신이 고스란히 남아있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여기 이것이 현재의 현실인데 왜 지금 표현하지 않나. 글 쓰는 사람은 지금 이 현실을 새롭게 표현하고 의미부여를 새롭게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건데 왜 이런 작업이 전혀 없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접경지대를 소재로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람은 만남을 통해 변화를 경험한다
남편의 외도상대는 남편 와이셔츠의 단추를 의도적으로 잘라놓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희수에게 상처를 입힌다. 남편 역시도 퉁명스러운 반응으로 다시 한 번 상처를 입힌다. 반면 동생을 찾아 간 북쪽 접경지대 소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녀에게 위안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주인공이 각각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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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는 집을 떠나게 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자각하게 되는데요. 작가님 또한 타인과 만남에서 그런 감정적 교류를 하시는 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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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타인과 교류해서 소설과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우죠.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누구나 이따금은 그런 만남을 겪게 되거든요. 그런 경험 속에서 자기 머릿속에 어떤 부분이 열리기도 하고 약했던 부분이 강해지기도 하죠. 패턴이 조금씩 변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세계와 자기 사이에서 그런 작업을 기다리기도 하고 만나기 위해 나서기도 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소설은 사실 어느 하나의 대상과 만남을 통해 시작되는 경우가 많죠. 닫혀있던 것이 삐꺽 열리는 것을 통해서…….
현실에 살고 있던 기반이 하나씩 붕괴되고 단추가 떨어져 나가듯 다 떨어져 나가는 지점에 선 희수에게는 반짇고리 노인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반짇고리 노인의 안내를 받아 주소하나 달랑 들고 어쩜 두려움도 없이 먼 곳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도 있었겠죠. 그리고 희수를 거기에 머물 수 있게 해준 큰 힘은 세상만사 상담소 소장이나 염을과 같은 주변 인물들이고요. -
희수의 남편을 비롯해 ‘염을’이나 ‘연우’ 등 남성들이 등장을 하는데, 제각각 성격은 다르지만 한편으로 조금씩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공통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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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일 뿐 아니라 현실을 감당하느라 쩔쩔매거나 꼼짝달싹 못하거나하는 거죠. 물론 상담소장은 예외지만요. 좀 신랄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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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가 남편의 단추를 달지 않은 것을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반짇고리 노인을 통해 달아버리잖아요. 그게 어떤 심리인지 궁금하네요. 외도를 한 남편이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 같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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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남편의 외도 상대인 바깥의 여자가 단추를 싹 잘라 보낸다는 게 엄청난 도전장이잖아요. 자리를 비켜라 하는 식의 표현인 거죠. 그런 것을 어떤 방법도 없이 겪어야 하고 남편은 또 태연하게 그냥 단추를 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아내로서 희수의 표현되지 않은 내면은 굉장한 고통과 압박감이 있었을 거예요. 또 그걸 달라고 해서 꾸역꾸역 달고 있을 수도 없죠. 게다가 달려고 해도 반짇고리 실과 바늘이 없는 상황이었잖아요(웃음).
전 희수를 아주 현실적인 여성을 생각했어요. 희수가 기간제 미술 교사라는 구조도 마찬가지거든요. 구조적으로 철저히 무시당하는 이 여자는 어떻게 보면 사실은 특별한 캐릭터에요. 절대로 평범하지는 않는 캐릭터죠.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 내 남자라고 소유를 주장하며 싸워서 무찔러야하는데 ‘그 사람도 존중받아야하는 사랑이 아닌가’란 생각을 하는 여자죠. 또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자신은 멀리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고요. 이는 어린 시절 의붓동생인 유란을 유기함으로서 자기 소외가 일어났고 자기 것을 악착같이 잡을 줄 모르는 캐릭터로서 희수가 가진 관용성이죠. 아마 어쩌면 반짇고리만 구했으면 단추를 차곡차곡 달았을 수도 있는 여자고 그래서 노인을 집으로 데리고 와 단추를 달게 하고 재워서 보냈겠죠. 그런 태도는 사실 희수의 남편이 접경지대에 찾아왔을 때도 나타나거든요. -
반짇고리를 구하기 힘들어하는 희수의 모습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 돼 있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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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웃음). 실은 실제로 제가 반짇고리를 사려고 찾아다닌 적이 있었거든요. 한참을 찾아다녀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도저히 구할 수 없었거든요. 내가 이런 구조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 내 옷을 스스로 수선할 수 없게 하는 구조에 살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죠. 단추를 달려면 세탁소에 아저씨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사실 이런 구조에 브레이크를 걸 순 없지만 비인간적인 면을 느낀 셈이에요. 우린 삶에 어떤 감각을 박탈하는 구조에서 살고 있는 거죠. 이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사랑을 할 수없는 불모성과 굉장히 관계가 있어요.
사실 제가 작가지만 책 하나를 사기 위해 서점가기도 너무 어렵고 결국 인터넷을 통해 주문을 하고 기다려야하는 구조에서 살고 있거든요. 반짇고리를 살수 없다는 것은 사랑을 하고 싶어도, 회복시키고 싶어도 시킬 수가 없는 구조라는 것이죠. 다행히 판타지처럼 노인이 나타나서 단추를 다 달아주고 남편은 아내가 달아 놓고 떠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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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를 찾아 온 남편이 선물한 목걸이가 끊어진 것을 발견했을 때 희수의 심정 묘사 부분도 인상적인데요. 단추가 떨어진 부분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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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평범한 여자들은 태도를 그렇게 분명하게 하는 건 아니고 이럴 수 있으면 이렇게 하겠다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진실이 사물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거죠. 소설적 장치로 사물이 대신 말을 하게 한 거죠. 여자가 처한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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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경우도 15년 만에 만난 옛사랑 희수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상황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한편으로 냉정하게 느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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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회사를 그만두고 여자 옆에 잇는 남자는 별로 없잖아요(웃음). 또 그런 남자를 원하지도 않고요. 세계의 구조 자체가 비정한 거죠. 남자들은 어떤 커다란 구조에 속한 부속물들이 된 셈이에요. 그러나 한편으로 연우가 떠나는 것은 희수가 연우의 마음을 거절하며 아무 일도 안 일어나 게 만든 부분도 있어요. 단절되고 얼어붙어 있는 심리적 공간인 접경지대에서 희수로서는 15년 만에 만난, 어느 정도 미련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불가능한 불모성, 회복되지 않는 불구성이 있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거부하며 차가움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이죠.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는 ‘주인공과 연우가 왜 사랑을 안하냐’고 묻기도 해요(웃음). 저도 아쉬웠어요. 그러나 사랑하게 하면 소설에서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너지고 힘을 잃어버리니까 안하고 버티는 힘으로 지탱했던 것 같아요. -
등장인물 구도를 봤을 때 대부분의 남성과 새엄마, 희수, 유란 등 여성 등장인물은 무의식적 가해자 대 피해자 구도로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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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가해자가 될 만큼 강한 남자는 없었던 것 같아요. 자기들도 어쩔 수 없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뚜렷하게 가해자로서 구도를 잡지는 않았어요. 단, 남자의 삶과 여자의 삶에 다른 구조는 분명히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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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희수와 유란은 전혀 상반되지만 어떤 시점에서는 동일인물로 착각이 되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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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좀 의도한 바도 있고, 희수가 유란의 집에 와서 유란의 물건을 쓰면서 유란의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유란이 살던 공간에 살게 하며 동일화 시킨 측면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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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가 유란을 찾아서 접경지대로 갔고, 힘겹게 친구들을 만나 유란의 상황을 알게 됐음에도 멈추고 기다렸다는 게 좀 의아한데요.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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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가끔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었어요. 뭔가 잘못한 사람이 너무 당당하게 ‘잘못했어, 용서해줘’ 이러는 건 정말 다시 상처를 주는 행위거든요. 진정 용서를 받고 화해를 시도할 수 있는 자세는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신희수는 ‘나 여기 와서 기다리고 있어,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식의 방식을 택한 거죠. 그게 오히려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보다 아름다운 화해방식이 아닌가 싶어요.
저도 개인적으로도 누가 그런 식으로 나한테 접근해오면 속으로 ‘용서를 받으려면 강제 노역이라도 하던지(웃음)’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우린 살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잖아요. 상처를 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토록 상처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사회에서는 이상하게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야 된다’는 식으로 도식화 된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신희수의 방식이 화해를 제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며칠 안남은 방학기간 동안 그녀는 독자들과 크고 작은 만남을 이어갈 생각이다. 그리고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학생들과 마주하며 언제나처럼 틈틈이 글을 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올 연말 혹은 다음해 초쯤에는 새로운 창작집이 나올 듯하다. 열정과 고민이 담긴 그녀의 창작은 앞으로도 많은 독자들에게 위안과 치유로 다가 갈 것이다.
- 최소한의 사랑 전경린 저 | 웅진지식하우스
『최소한의 사랑』은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아니 사실은 일부러 버렸던, 배다른 여동생 유란을 찾아 나선 희수의 여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수십 년 동안 모든 가족들이 없는 사람 취급했던 유란. 죽어가는 새엄마의 부탁으로 그녀의 행방을 찾아 나선 희수는 그녀가 북쪽 끝, 접경지대의 한 도시에 있음을 알고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유란은 자신이 지내던 집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의 흔적만 남긴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희수는 유란의 방에서 지내며, 유란을 기다리며, 유란이라는 타인의 삶을 흉내 내기 시작하는데……
황정호
최선을 다해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언제나 꿈꾸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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