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족이나 연인이 잔인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게다가 범인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태연하게 풀려난다면? 아마 복수하고 싶을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이 받은 상처와 고통 그 이상을 안겨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생각만으로 그친다. ‘폭력’이 일상이 아닌 삶을 살았다면, 실제로 복수까지 도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안전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문명인의 숙명이다. 거대한 자연의 틈바구니에서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수렵을 하고, 경쟁자와 다투며 살아갔던 역사는 이미 잊었다.
간혹 복수를 이루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존 그리샴의 데뷔작 『타임 투 킬』은 강간을 당한 흑인 소녀의 아버지가 복수를 하고 재판을 받는 이야기다. 문제는 그 지역이 미국의 남부라는 것. 여전히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이 심각한 미국 남부에서 백인이 흑인을 강간하거나 폭행했을 때, 불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꽤나 많다. 소녀의 아버지도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범인들이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키웠다. 그래서 법정에 정의가 없다면, 자신이 정의를 이루겠다고 나섰다. 『타임 투 킬』에서는 그의 변호를 맡은 신출내기 변호사가 갖은 위협을 이겨내고 승리를 따내지만, 보통 복수를 하고난 후의 대가는 의외로 크다.
사적인 복수를 엄격히 금하는 현대사회이기에, 가해자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해도처벌은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범죄소설 등에서는 사적인 복수를 대행해주는 집단이나 조직이 흔히 등장한다. 엄밀히 따지면 ‘자경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와 정의를 보장해주지 못할 때, 시민들이 직접 무장을 하고 무력으로 정의를 구현한다. 미국 사회에서 특히 자경단이 발달한 이유는 서부 개척시대의 경험이 크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살던 북미대륙에 침입하여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인디언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특히 서부지역으로 간 이주민들은 혼자 또는 마을의 힘만으로 인디언과 싸워야했다. 근본이 잘못된 것이긴 했지만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무력을 택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경단은 존재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무력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구현하려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영화 <저스티스>에서는 복수를 대행해주는 조직이 나온다. 백만장자가 뉴올리언즈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자경단을 만들었다.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복수는 나름 가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확장된다. 자의적인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방해하는 사람들도 죽여 버린다. 그 순간 복수가 아니고, 정의 수호도 당연히 아니고, 과잉폭력이며 범죄가 된다. 배트맨이 늘 고뇌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사적인 복수를 위해 수트를 입고 밤마다 거리에서 범죄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닐까? 정의를 수호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자신의 폭력적인 욕구를 분출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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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 허위츠의 『살인위원회』에서는 특수부대 출신의 팀 맥클리가 주인공이다. 영화판에 뛰어들어 <더 록>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던 그렉 허위츠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살인위원회』를 흥미진진한 극적 구조로 매끄럽게 구성한다. 연방법원의 부집행관, 존 맥클리. ‘살인’의 프로페셔널이자 지금도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특수 임무를 하는 맥클리는 언제든 ‘자경단’으로 변신할 태세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7살짜리 딸이 하필 생일날 납치되어 강간 토막 살해되고, 범인이 자백을 했음에도 법절차의 허술함 때문에 풀려나게 만든다.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사회의 정의를 지켜야 할 ‘법’은 책임을 방기했다. 그렇다면 희생자의 가족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낙심한 맥클리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법의 허점으로 풀어준 살인자들을 처단할 살인위원회가 있다는 것이다. 살인위원회의 일원들은 모두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당했지만 범인은 무사히 풀려나 활개치고 있는 억울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회적인 복수를 하겠다면서 ‘살인위원회’를 만들었다. 살인위원회는 일단 몇 개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맥클리에게 딸을 죽인 범인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한다. 타인을 위한 복수를 대신해준다면, 살인위원회는 당신에게 범인을 깜쪽같이 죽일 기회를 제공해 주겠다는 것이다. 결론은 <저스티스>와 비슷하다. 그들의 자의적인 ‘정의’ 추구는 스스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다. 힌두의 신 아수라는 원래 정의를 수호하는 역할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의를 수호한 결과는, 엄청난 폭력과 형벌이었다. 그래서 아수라는 파괴의 신으로 전락했고 두 개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
복수는 그저 복수일 뿐이다. 거기에 ‘정의’를 붙이면 너무 거창해진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이 사회, 세계의 정의를 지킨다는 착각에 빠지면 그 순간부터 복수는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폭력에 불과해진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생각하자. <맨 온 파이어>로 영화화된 A. J. 퀸넬의 『크리시』가 화끈하면서도 공감이 간 이유는 오로지 죽은 소녀를 위한 복수이기 때문이다. 목적도 단순하다. 범죄조직이 소녀를 죽였다. 그러니까 나는 범죄조직들을 괴멸시킬 것이다. 다른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스타 트렉>의 클링곤에게는 ‘복수는 차갑게 식혀야 맛있는 음식’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은 복수의 순간은 차가운 이성이 지배할 때라는 것이다. <저스티스>처럼 아내가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워있을 때 복수의 선택을 하지 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복수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때 실행하라는 것. 복수는 뜨거운 것이 아니라, 차갑고 엄정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어벤저』의 주인공인 덱스터 같은 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골 마을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덱스터는 베트남전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았던 동굴수색대 출신이다. 파나마의 갱단과 연루된 불량배들에게 딸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진 후, 덱스터는 전문적인 ‘어벤저’로 일하기 시작한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가해자가 외국으로 도망쳐 손을 쓸 수 없을 때, 신출귀몰한 솜씨로 그를 잡아와 미국의 법정에 세우는 비밀 대리인이 된 것이다. 자신이 복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었고, 실행에 옮겼다. 때로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어벤저’가 된 것이다. 정의 같은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복수를 대신해 주기 위해서.
1995년, 봉사활동을 하러 보스니아에 간 미국인 청년이 세르비아 준군사조직을 이끄는 조란 질리치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2차 대전의 참전용사이자 부호인 청년의 외할아버지 스티븐 에드먼드는 행방불명된 손자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벤저에게 의뢰한다. 프레데릭 포사이드는 『어벤저』를 『크리시』 같은 스릴러로서만 그리지 않는다. 『자칼의 날』로 유명한 첩보소설의 거장답게 프레데릭 포사이드는 『어벤저』를 복수 이야기인 동시에 탁월한 첩보소설로서 그려낸다.
로이터 통신과 BBC를 거친 저널리스트 출신의 프레데릭 포사이드는 기본 자료에 충실하며 예리하게 분석한 국제정세의 모든 것을, 소설 속에 완벽할 정도로 치밀하게 녹여 넣는다. 첩보소설의 필수품목인 각종 병기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다. 덱스터의 과거를 그릴 때에는 베트남의 역사와 베트남전의 실상을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확실하게 짚어낸다. 호치민의 죽음 이후 베트남의 내정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글에서의 전투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소설만 읽어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유고슬라비아가 분해되며 내전으로 치닫는 과정도, 어떤 신문이나 잡지의 분석기사보다도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준다.
『어벤저』는 단순한 복수극인가, 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어느 순간 복수극이 현재 가장 치열한 첩보전의 핵심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스티븐 에드먼드는 자신의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충분히 미국 정부조직을 움직일 위치에 있다. 그의 돈이 아니라, 무고한 젊은이를 죽인 전범을 응징해야 한다는 정의감에 사로잡힌 정부 관리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FBI 국장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 조란을 보호하고 있었다. 미국 최대의 적인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한 계획에 반드시 조란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다. 거대한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작은 악은 풀어줄 수도 있고 사소한 정의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송골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CIA 요원 폴 데브루의 신념이다.
국제 정치가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은 중동의 정치, 경제를 둘러싼 첩보전을 다룬 <시리아나>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과 약소국의 관계는 대등한 게임이 아니라 힘의 우위에 근거한 일방적인 첩보전이다. 『어벤저』도 동일한 현실을 보여준다. 국제사회 특히나 분쟁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철저한 파워게임이고 첩보전이다. 『어벤저』는 국제정치의 후안무치함을 폭로하는 동시에 어벤저가 조란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탁월한 스릴을 안겨준다.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훌륭한 국제정세 강의는 기본이고 어벤저의 멋진 침투 공작과 액션까지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배경 설명을 빼도 『어벤저』는 충분히 일급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을 만큼 생생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첩보소설이다.
어쨌거나 『어벤저』를 보고 나면 속은 시원해진다. 이렇게 복수를 감행해주는 ‘해결사’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복수는, 지극히 개인적인 정의일 뿐 공동의 정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그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나 그 지인들이 복수를 꿈꾸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살인’을 상상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복수를 원한다면, 아주 차갑게 식힌 후에 선택해야만 한다. 단지 복수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뒤에 나에게 닥칠 수많은 고뇌와 허무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물론 현실적인 형벌까지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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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저 프레더릭 포사이스 저/이창식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중 하나인 보스니아내전 당시 무고하게 죽어간 한 젊은 청년과 오사마 빈 라덴, 그리고 CIA를 둘러싼 음모와 이에 맞선 어벤저의 복수를 그린 작품.
'어벤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활약한 미국의 단발 복좌 뇌격기로, 베트남전 땅굴 수색대 출신인 현직 변호사이자, 현상금 사냥꾼인 주인공의 암호명이기도 하다. 『어벤저』는 1940년대의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1990년대의 걸프전과 보스니아내전까지, 현대사상 굵직굵직한 전쟁의 현장을 숨 가쁘게 넘나들며 알카에다와 UBL(우사마 빈 라덴)의 탄생까지를 다루고 있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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