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여름, 채널예스에 ‘손녀딸’이 등장했다. 문학작품 속 요리 이야기와 레시피가 담긴 칼럼(<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은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내 구미를 당겼다. 그리고 나는 글이 연재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는 날에는 이미 발동 걸린 식욕을 달래기 위해서 김치 한 조각이라도 씹어야만 했다. 그렇게 냉장고를 뒤져가며 그녀의 칼럼을 기다리고 읽었다. 동서양의 고전은 물론이고 현대소설에 이르는 작품 속의 음식과 그녀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 든 글이 좋았다. 그런 그녀의 글이 모여 드디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지난 토요일, 강남에 있는 ‘카페 어라운드 더 코너’에서 손녀딸 차유진이 독자와의 티타임을 가졌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내 코끝을, 잔잔한 음악이 내 귓가를 자극했다. 테이블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자마자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책 『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에 있는 음식들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슨 맛일까 가장 궁금했던 모카시럽 브레드(p.201)와 평소 즐겨먹는 스콘(p.298), 소풍에 종종 들고 갔던 오이 샌드위치(p.23), 달콤한 옷을 입은 허니 월넛 케이크(p.98). 음식을 보는 순간,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오늘 다이어트는 끝났다!’고 외쳤다.
책을 내고 독자와의 만남이 처음이라는 손녀딸은 “처음 사람을 만나면 많이 긴장하는 편인데, 전부 처음 뵙는 분들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떨리지 않네요. 만나기 전에 많이 긴장했었거든요.”라며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띄었다. 잠시 후, 모카시럽 브레드는 파티에 초대한 사람이 직접 썰어 손님에게 주는 빵이라며 손녀딸은 부엌으로 향했다.
손녀딸의 요리 이야기
『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를 읽으면서, 문학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녀의 이야기는 좋았지만, ‘분명’ 예전에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하지 못하는 내 기억력을 탓했다. 그냥 지나치게 되는 책 속의 음식 이야기를 그녀는 어쩜 그리도 기억을 잘하는 걸까? “어릴 적부터 먹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신기하게도 기억이 나요. 처음에는 영화와 책으로 칼럼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어요. 저는 사실 영화보다 책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책 속의 음식 이야기로 쓰겠다고 했어요. 이야기는 제가 기억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이면서 칼럼을 쓰게 됐어요.”
시간이 좀 걸려도 초콜릿을 아주 천천히 녹여주는 것이 입 안에서 얼렁뚱땅 스르륵 녹는 부드러운 초콜릿 만들기의 핵심이다.”(초콜릿 트러플 레시피 중)
“미리 곱게 다져 놓은 양파를 넣고, 2분 정도 양파가 나른해질 때까지 볶는다.”(보드카 크림소스의 펜네 레시피 중)
입 안에 넣자마자 맛을 느끼기도 전에 ‘얼렁뚱땅’ 녹아버리는 초콜릿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양파를 계속 볶다 보면 숨이 죽는데, 그 모습을 양파가 나른해졌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손녀딸의 레시피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매우 심플하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통 요리책들은 형용사가 많이 부족해요. 레시피는 요리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요리도 글과 같은 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마다 문체가 있듯 요리사에게도 그들만의 스타일이 있는 거잖아요. 요리학교 선생님들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줬어요. 재료의 질감과 음식의 맛을 표현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때론 인상을 쓰기도 하고, 팔을 크게 뻗기도 하거든요. ‘맛있어요.’ ‘매콤해요.’ ‘속이 뻥 뚫려요.’ 식의 표현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녀는 레시피를 일목요연하고, 되도록 차례에는 같이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묶으려고 한다고 한다. 너무 길면 ‘앞에 뭐라고 했지?’ 하며 종종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요리하는 방법이 다르고, 요리에는 절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레시피를 보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쌍코피 터지던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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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딸은 미대를 졸업한 뒤, 공연기획을 하다가 영국으로 요리 유학을 다녀왔다. 전공과 직업을 바꾼 그녀는 “저에게 이것 이상의 직업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현재 미술을 공부하고 있지만 요리가 너무 좋다는 독자에게 전공을 바꾸는 것은 자아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그녀 역시 직업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고. 평소에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는 의도하지 않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노라며 영국으로 요리를 배우러 떠났다. 보통은 요리를 배우러 프랑스나 이태리로 가는데 왜 영국으로 갔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처음부터 영어권의 일 년짜리 코스의 요리학교를 찾았어요. 그리고 다른 언어를 추가적으로 배우고 싶지도 않았고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불어가 느끼하더라고요. (웃음)” 그녀는 단기로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빨리 지나간 일 년.” “쌍코피 터지던, 그러나 만족스러운 일 년.”이라고 표현했다.
아이의 꿈이 요리사라는 주부 독자에게는 아이가 요리사가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확실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우간다로 요리를 배우러 가도 된다고 말했다.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식이나 떡 만드는 것을 배우고 싶다면 굳이 다른 나라로 건너가 공부할 필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나라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을 종종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학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 일일이 대답해주기 힘들었다고 했다. 요리가 좋아서 모인 독자들이 눈을 바라보더니 학교 이야기를 해주는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서 호텔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어요. 영국의 탕트 마리 요리학교는 일반 가정에서 요리하는 것 같이 가르치고, 이론 및 실기를 다양하게 배울 수 있어서 선택했어요. 디플로마를 따기 위해서는 몇 시간의 이론 및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해요. 주관식 문제가 150개 정도 나오는데, 외국인 학생을 위해서는 딱 30분을 더 줘요. 졸업 시험 감독으로는 교장 선생님과 나라에서 관리가 나온답니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시간이 지금의 그녀를 만든 건 아닐까.
문학? 실용? 요리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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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다 보면 사이사이에 요리의 그림 또는 문학작품 속 주인공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 책 속 사진보다 따듯함이 전해지는 이 그림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알고 보니 손녀딸이 전부 그린 것이라고. (팔방미인이구나!) 책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새로 찍기도 하고, 예전에 찍어두었던 사진을 찾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기도 했다.
“외국 서점에 가보면 ‘요리 에세이’로 분류된 책을 쉽게 볼 수 있어요. 외국 요리사들이 쓴 책을 읽으면서 요리도 인문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특히 나이젤라를 보면서는 ‘이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는 이렇게 표현할 수 없다!’고 감탄했어요.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제 책이 가끔 밑반찬 만들기 책 옆에 누워 있기도 하고, 실용 서적들 사이에 꽂혀 있기도 해요. 솔직히 이 책은 제 일상에 녹아든 요리 이야기를 쓴 거거든요. 우리나라에도 매우 좋은 요리 에세이들이 많은데, 애매하게 철학, 인문, 소설, 에세이로 분류된 것들이 많더라고요. 요리 에세이 영역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녀가 ‘문학작품 속의 요리’라는 주제로 글을 써서 신선했다. 그래서 더 관심을 갖고 글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마따나 요리는 일상이다. 일상이 화려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관점으로 그녀를 보니 왜 영국으로 떠났는지, 누구나 따라해봄 직한 레시피를 쓰는지, 일상의 한 부분을 말하듯 무심하게 글을 써내려가는 하루키의 작품이 많이 등장하는지 알 것 같다. 그녀는 한창 PC통신이 유행할 무렵, 무라카미 하루키 동호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구절, “분홍 옷을 즐겨 입고 요리를 잘하고 얼굴이 예쁘고 영리한 뚱뚱한 손녀딸”에서 ‘손녀딸’이란 닉네임을 따왔다.
맛있는 수다 한 조각, 달콤한 위로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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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티타임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쁠 텐데, 무려 두 시간이나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향신료 좋아하세요?” 대뜸 독자들에게 질문을 하는 그녀. 향신료에 대해 관심이 많아 최근에 자료를 찾고 있다고 했다. 향신료뿐만 아니라 시장 기행, 요리 유학에 관련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경성 시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시대의 음식에도 관심이 있어서 차근차근 모으고 있고, 책에 싣지 못한 글을 번외편으로 자신의 블로그(http://blog.naver.com/cplanner)에도 올릴 계획이다. “사촌언니가 일본에서 민박을 하려고 해요. 민박을 꾸리는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하고, 프로방스의 생활에 대해서 꿈꾸기도 한답니다.”
맛있는 음식과 한 잔의 술, 사랑하는 사람, 친구들과 함께하는 파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파티를 좋아하는 그녀는 평소 친구를 초대하고, 간단하지만 신중하게 짠 메뉴를 이메일로 보내주고, 파티를 준비한다. 그날에 맞는 메뉴를 정하고, 상대방의 기호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과정이 즐겁다고 했다.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힘과 시간을 소비하지만 ‘맛있다.’는 한마디에 위안을 받아요.”라며 빙그레 웃는다. 요리를 진정으로 즐기고 좋아하지 않고서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고, 읽고, 요리를 만들 손녀딸의 달콤한 내일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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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