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전설 속 청년은 딸기를 드시고 싶다는 노모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딸기를 구하겠다고 집을 나선다. 그 후부터 노모는 혼자 어떻게 지내는지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고, 청년의 파란만장한 여정만이 화면에 펼쳐진다. 청년은 길을 가다가 발에 가시가 박힌 아기 호랑이도 치료해주고,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업어다가 강을 건네주기도 한다. 밤에는 어여쁜 여인으로 둔갑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목숨이 위태로워지지만, 다행히 아까 그 호랑이와의 인연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한다.
노모와 둘이서만 살던 청년은 딸기를 구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구실로 생전 처음으로 산골 마을에서 내려와 세상의 이모저모를 골고루 경험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도 만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결국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딸기를 구해 돌아간다. 그리고 그 딸기를 드신 노모는 신기하게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효성에 감복한 산신령이 청년의 딸기에 신비한 효험이 깃들게 했다나. 내용은 뭐 이런 식이다.
갖은 역경을 겪은 후에 구해온 딸기가 영험을 지니듯, 여행을 다녀온 청년 역시 이제 떠나기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여행은 사람을 변성시키기 때문이다.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노모가 딸기를 먹고 싶다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뿐인 자식이 부모로 인해 발목이 묶이지 않게 놓아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난 늙고 병들었으니, 넌 네 길을 떠나라’고 말하면 절대로 못 떠날 효자이기에, 말도 안 되는 딸기를 구해오라고 시킨 것이다. 거기엔 자유롭게 너른 세상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종종 여행에 빗대어 말해진다. 언젠가 타로카드 연구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인생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점쳐주는 타로카드의 첫 번째 카드는 봇짐을 메고 길을 나선 여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실의 모든 것을 버리고 깨달음을 위해 길을 나선 이 여행자는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 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바보(The Fool)’라고 불린다. 바보는 눈앞을 전혀 바라보지 않고 시선을 하늘에 둔 채 가고 있다. 바로 발 앞에는 절벽이 놓여 있는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그 절벽으로 몰고 간 것인지 알기 어려우나, 개 또는 고양이가 바보의 한쪽 다리를 물어뜯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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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카드로 보는 점에서 이 바보 카드를 뽑으면, 점쳐 주는 이가 지금 발을 들여놓은 일이 혹 어리석은 충동에 의한 것은 아닌지, 무모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하라’고 해석해준다. 그리고는 다소 알 수 없는 말들을 덧붙인다. “당신은 지금 현실을 도피하려는 거예요. 현실을 맞닥트리기 두려워 길을 나선 거죠. 물론 길을 나선 덕분에 당신은 현자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지요. 하지만 자칫 방심하다가는 절벽에 떨어지고 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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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대면을 잠시 유보시키는 도피적 여행은 신혼여행의 풍습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영국의 풍속화가 브로트놀(Edward Frederick Brewtnall, 1846~1902)이 그린 그림을 보자. 날씨 좋은 날, 해변에 접한 호텔에서 아침을 먹으며 함께 지도를 펼쳐보는 신혼부부의 모습이 샘나도록 행복해 보인다. “우리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결혼이라는 현실에 뛰어들기 전에 신랑과 신부는 잠시 낙원으로 도망쳐온 셈이다. 그것이 바로 신혼여행이다.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그 낙원에는 시간도 느리게 가니 바쁜 일도 없고, 먹을 것이 넘치니 돈을 벌거나 아끼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 현실을 생각나게 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다. 단지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있기는 하다. 그 두 사람은 자신이 누렸던 낙원에서의 삶을 망각하고 이제 거친 현실과 맞설 강인한 아담과 이브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신의 아들, 딸로서 완벽하게 보호받던 삶을 일단락 짓고, 이제는 그녀의 남편으로 또 그의 아내로서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행은 반드시 신혼여행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시 태어남’의 뉘앙스를 풍긴다. 서구에서 여행의 기원은 중세시대의 성지순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순례라는 길고 먼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단지 중세인들의 신앙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현실 속의 소망을 빌기 위해 현실을 피해 아주 멀리 떠난다는 것이다. 중세라는 금욕주의적인 시대에는 순례만이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성스러운 여정이라는 구실 아래 순례자는 노동 및 가족 부양 등 각종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는 억압적인 일상 속에 향락의 기회를 갑작스레 활짝 열어놓은 셈이었다. 사실상 순례는 중세 사람들에게 놀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일종의 긴 휴가였던 것이다.
순례자는 여행 도중 하룻밤 사랑도 만나고, 종교적 금욕에서 벗어나 술도 마시고 유흥도 벌이고, 객기를 부리다가 목숨마저 위태로워지는 온갖 이상한 일에도 휘말리게 된다. 그러는 도중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이렇게 외쳐댄다. “구해주세요. 이번만 구해주시면 돌아가서 정말로 제대로 착하고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결국 돌아올 무렵 그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져 집으로 향하게 된다.
실제로 사회학자들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의 낯선 모험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오즈의 마법사』에서처럼, 소원을 빌기 위해 마법사에게 가는 동안 갖은 모험을 겪으면서, 어느덧 서서히 그 소원 속의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딸기를 찾는 동안 청년은 마을의 효자가 되고, 바보는 깨달음을 얻은 현자가 되는가 하면, 놀기 좋아하던 평신도는 신앙심이 절실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일상을 떠나 길 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모험의 힘이다. 그러니 모험을 두려워 말고 한 번쯤 훌쩍 떠나보실 것을 권한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한껏 강인해져서 돌아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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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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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here
2008.12.12
nadja2
2008.12.11
손녀딸
2008.12.11
작년 이맘때쯤, 하던일은 전부 털어버리고 남미로 떠났었습니다.서른 세시간동안 비행기 안에 있으면서 계속 머리에 빙빙 돌던것이 바로 바보카드였거든요.
저는 바보카드가 지닌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게 좋아요. 위험에 빠지던, 주의력이 떨어지건, 다시 떠날 수 있다는 그 순간의 에너지가 마음에 들거든요. 그리고 무념무상, 듣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런 바보만의 순수함도 좋구요.제가 주로 보는 덱에서는 심지어 딱 한걸음만 더 걸으면 넘어지도록 지팡이가 다리 안쪽까지 들어와 있거든요.^^ 가끔 <광대>라고 표현하는 덱도 있듯이...뭐 넘어지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도 웃으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하고..하여간 마음속으로 늘 '그림 보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타로도 좋아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1인으로써 반가워서 끄적여봤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글 많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