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대한 역사 만화 - 『나라가 불탄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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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야마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는, 1927년 봄에서 시작한다. 금융공황이 시작되고, 이미 조선과 대만을 합병한 일본의 대륙 침략이 더욱 가속화되던 시기. 상공부에 소속된 관료 혼다 유스케는 농민들이 보다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유스케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난히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명문가인 혼다 가문의 양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완벽한 신분 상승을 이룬 셈이지만, 유스케는 자신의 근본을 결코 잊지 않는다. 미츠마에 요헤이는 재벌 데이와 물산의 상속자다. 하지만 그는 회사를 물려받는 것 정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꿈은 더욱 원대하다. 자신이 대륙으로 건너가, ‘중국인이 돼서 중국인민 속에 융화되어 군벌을 세워 전 중국의 왕이 되겠다’는 것이다. 허황되지만, 요헤이는 정말로 대륙에 건너가, 장제스의 밑에 들어가 심복이 된다.

『나라가 불탄다』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유스케와 요헤이의 행적을 따라간다. 자신의 땅이 없는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위해 풍요로운 만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유스케는 만주 이주 계획을 세우고, 장제스와 함께 싸우며 신임을 얻은 요헤이는 일본군의 침략을 만주에서 멈추기 위해 군벌 장쉐량과 관동군을 만나는 등 동분서주한다. 『나라가 불탄다』는 유스케와 요헤이의 꿈이 깃든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웅대한 역사만화다.

마침내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한다. 독단적으로 행동을 시작한 관동군은 잇따라 만주의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1932년 3월 만주국 건국을 선언한다. 일본에게 만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땅이다. ‘가난한’ 일본에게는, 반드시 만주가 필요했다. 하지만 만주를 점령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참모이자 젊은 장교들의 리더 이시하라는 획기적인 생각을 한다. 물론 일본인의 입장에서. ‘중국과 일본이 대등한 동지가 돼서, 대아시아의 공영을 위해 구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이시하라는, 일본이(만주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일본은 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주국은 일만한선몽, 즉 일본인, 만주인, 중국인, 조선인, 몽고인의 다섯 민족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새로운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데에 동의한 이유 역시, 만주국이 한족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스케도, 요헤이도, 만주국이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차별이 없는 국가를 만든다면, 그 의도가 어쨌건 좋은 것이라고. 일본이나 조선의 농민에게는 자작농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고, 각 민족이 누군가의 차별을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심지어 이시하라조차 그렇게 믿었다.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전제가 있긴 했지만, 이시하라 역시 만주국의 오족협화를 믿었다. 그것이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고, 지킬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래서 만주국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국제연맹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은 만주국의 건설에 매진한다. 유스케 역시 제 1차 무장개척 이민을 자무스란 곳에 들여보낸다. 드디어 대아시아의 꿈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유스케조차도, 이미 현혹되어버렸다. 이미 만주를 본 인간은, 결코 만주를 포기할 수 없다. 그 광대한 땅의 매력을 알아버린 후에 돌아갈 수는 없다. 선한 의도였다 해도, 그것 역시 허튼 욕망이다. 만주국은 단지 일본군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차별과 박해가 연속된다. 평등이란 건, 단지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이시하라 역시 그런 흐름을 막지 못한다. 일본이란 나라는 이미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폭주가 무참하게 ‘이상’을 파괴한다.

일전에 케이블TV에서 <비운의 왕비>라는 일본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부의의 동생인 부걸과, 그와 결혼한 일본 명문귀족의 딸 히로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일본군은 만주와 일본의 친선을 위한 것이라면서 거의 강압적으로 부걸과 히로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인품에 매료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본과 만주만이 아니라 아시아 민족 모두가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만주국의 건설을 위해서 일로매진하겠다고.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그것이 서로의 행복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모든 꿈은 처참히 무너지고, 부걸은 러시아의 포로가 되어 이후 수 십 년간 히로와 딸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비운의 왕비>를 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단지 괴뢰국가라고만 믿었던 만주국. 그러나 그 만주국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나라가 불탄다』의 유스케와 요헤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만주국이 그들의 이상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아시아인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비참하게 깔리긴 했지만.

『나라가 불탄다』는 그 지난한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라가 불탄다』가 직접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묘사하면서 일본 극우단체의 공격을 받아 연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샐러리맨 김태랑』등 인기작을 내놓았던 모토야마 히로시의 명성도 소용없었다. 『나라가 불탄다』 단행본을 내면서 ‘작품에 묘사한 1920년대 중후반의 일본과 현재가 너무나 흡사하다’고 말했던 모토야마의 말이 적중하는 사건이었다. 점차 극우화하며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이, 30년대의 일본이며 바로 지금의 일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분명 일본의 정치 편향은 점차 우로 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일까? 우리가 무조건 일본‘인’을 욕해도 좋은 것일까? 망언을 일삼는 극우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나라가 불탄다』 같은 만화도 만들어진다. 극우교과서가 만들어지지만, 채택률은 10%도 되지 못한다. 일본 사회에는 건전한 상식을 갖춘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화를 할 사람, 바라보아야 할 일본인은 그들이다. 정치인이 망언을 한다고 교류를 끊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더 많은 교류를 갖고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유스케와 요헤이가 원한 것은, 다섯 민족이 동등하게 대화하고 이해하는 만주국이었다. 그것이 비록 이상에 그치긴 했지만, 지금도 여전한 이상이다. 『나라가 불탄다』는 일본이란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의 시선도 더욱 다양해져야 함을 말해주는 만화다.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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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워커

2010.07.26

잘봤습니다. 요기 좋은 책 진짜 많이 나온듯 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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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yoon1124

2010.07.26

변함없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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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w5

2010.07.26

자기계발, 경제 관련 서적으로 유명한 샘앤파커스의 대표님 동영상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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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불탄다 1

<모토미야 히로시> 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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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글 쓰는 일이 좋아 기자가 되었다. [씨네21] [브뤼트] [에이코믹스] 등의 매체를 만들었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소설, 만화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연스레 대중문화평론가, 작가로 활동하며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란마귀』 『좀비사전』 『탐정사전』 『나도 글 좀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등을 썼다. 15년 이상의 직장 생활, 7, 8년의 프리랜서를 경험하며 각양각색의 인간과 상황을 겪었다. 순탄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통과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는 그 시기를 거치며 깨달았다. 직장인과 프리랜서 모두 쉽지 않고,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 월급도 자유도 결국은 선택이고, 어느 쪽도 승리나 패배는 아니라는 것. 모든 이유 있는 선택 뒤엔 내가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남는다는 것. 다 좋다. 결국은,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2007년부터 13년간 상상마당 아카데미 ‘전방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쌍은 경험과 노하우를 이 책에 그대로 풀어냈다. 글쓰기 초보자에게 글을 잘 쓸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모든 이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 확신한다. 주요 저서에는 『전방위 글쓰기』(2008), 『영화 리뷰 쓰기』(2008),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2012), 『나의 대중문화표류기』(2015),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미스터리』(2015),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호러』(2016), 『고우영』(2017) 등이 있다. 공저로도 『클릭! 일본문화』(1999), 『시네마 수학』(2013), 『탐정사전』(2014),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웹소설 작가 입문』(2017)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