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고 귀가 섬세한 이들이 영화를 본 뒤 찾는 사람이 있다. 《씨네21》 취재팀장이자 여러 현장에서 GV 모더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김소미 영화기자다. 그의 첫 책이 나왔다. 웹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사만 하더라도 1,300편이 넘지만 첫 책은 기존의 글을 묶는 대신 모두 새로 썼다. 왜 그랬을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 이야기는 어린시절 저화질 VHS로 본 <주온>이 당시 거칠었던 현실의 표면과 작용하며 불가피하게 매혹과 안도를 안겨준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이 켜지기 전에』는 그가 어떻게 혹은 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를 거쳐 영화에 관해 말하고 쓰는 사람이 되었는지에 관한 궤적을 더듬거리며 되짚어보는 에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다른 방식의 소개도 가능하다. 가령 뒷모습. 김소미는 뒷모습에 매혹되어 있는 듯하다. 책 표지에 사용된 작품은 에드워드 호퍼의 <Solitary Figure in a Theater>이다. 불이 켜지기 전 어두운 극장에 홀로 남은 이의 뒷모습. 영원히 볼 수 없는 얼굴 뒷면의 뚜렷한 검은 실루엣을 (책의 부제이기도 한) ‘영화가 끝나고 남겨진 마음들’의 형상이라고 불러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질문”하면서 필름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 소년을, 김소미는 애정한다고 여러 번 밝혔다. 소년에게 책의 한 챕터를 할애할 정도로. 그 소년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에 등장하는 양양이다. 김소미가 책에 썼듯 그는 <하나 그리고 둘>의 영문 제목이자 양양의 이름을 업무 계정으로 사용한다. 그러니 이번 인터뷰를 청하기 위해 김소미에게 메일을 쓰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담으려는 양양과 영화가 끝나고 남겨진 마음의 실루엣을 활자의 채에 담아보려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닮았다고.
첫 책 『불이 켜지기 전에』 작업을 마친 후기를 들려주세요.
영화 기자 일을 하는 동안 제 스스로 의식한 기대와 제약들이 있는데 첫 책을 쓰면서는, 적어도 쓰는 동안만큼은, 어둠 속에서 오직 저 자신과 씨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소중했습니다. 어떤 새벽에는 피로나 압박감보다도 해방감이 훨씬 커서 천천히 춤을 추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간을 잊지 말자고, 작업을 모두 마친 뒤 어렴풋이 다짐했던 것 같아요. 한 주치의 진심과 체력을 골고루 소진한 목요일 새벽에 주간지 마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요. 역시 책도 비슷했습니다. 모든 것은 책의 첫장과 마지막장에 들어있을 뿐, 출간 당일부터 지금까지 제 삶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또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 많은 글을 써 오셨죠.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글을 묶어 매만지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새로운 글로 첫 책을 채우셨습니다.
마음산책에서 감사한 제안을 주신 덕인데요. 비비언 고닉, 조앤 디디온, 레슬리 제이미슨, 세라 망구소, 캐롤라인 냅처럼 영미권 여성 작가들의 에세이를 탐독하는 것이 제가 쉼에서 추구하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라는 점이 이 책을 쓰는 동안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담백한 글이 나오지를 않고 에세이 대문호의 자취를 향해 발톱만큼이라도 내딛고 싶은 욕구가 덜컹거려서 한동안은 마감 기한을 지키지 못한 채 고전하는 모습으로 편집자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는데요. 건조하게 직업 산문으로 시작해서 차츰 사적인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마음의 행장을 가벼이 꾸리는 시간을 거쳤습니다. 리뷰와 비평쓰기처럼 영화에 기대지 않는 글쓰기의 무거움과 자유로움 모두가 저를 살린 시간이었어요. 아, 그동안 쓴 글을 엮은 책도 나올 예정입니다. 채널예스에 연재한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속 영화 이야기를 개고하고 있어요.
책을 펼치면 “언젠가 옆자리에 앉아 함께 영화를 본 모든 관객에게”라는 헌사가 나옵니다. 서문 또한 어둠 속에서 함께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느끼는 공동체의 감각을 다루고 있고요. 관객을 향한 매혹에 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사실 제게 영화 보기는 철저히 혼자를 위한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어둠 속에서만큼은 영화와 나, 일대일의 독자성을 보장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종종 무대나 스크린 앞에 서서 객석을 바라보게 하는 이 직업을 갖게 된 뒤로 공동체로서의 객석, 혹은 관객성에 대해 골몰하게 된 것 같아요. 자발적으로 어둠 속에 들어와 빨리 감기도 불가한 영화 보기를 즐기(견디)는 사람들, 생산성 시대의 자발적 쇠퇴로 향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까지 여겨집니다. 나아가 ‘대화’에 참여하기로 하는 사람들도요. 얼마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차이밍량(<무소주> <너의 얼굴> <안녕, 용문객잔> <애정만세> 등) 감독은 말하더군요. “나는 다음 생엔 감독도 배우도 하지 않겠다. 오로지 관객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 고요. 우리가 어떠한 역할이나 의무, 불운으로 더럽혀지더라도 평등하게 빛을 보장받는 자리가 관객의 자리입니다. 그 성질에 대해 개별 작품만큼이나 면밀하게 앞으로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불이 켜지기 전에』의 제목이 결정되기 전, 이동근 편집자가 제안한 제목의 첫 번째 후보가 ‘관객의 자리’였다는 점도 밝혀두고 싶네요.
“어떤 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변방으로 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이 실은 중심임을 알아차린다”(55쪽)는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영화를 보고 쓰는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며, 한편으로 수치가 결국 사랑이었음을 혹은 열망이었음을 깨닫는 시간을 피하지 않고 통과합니다. 어떤 수치는 자긍심으로 되돌아오기도 하고요. 하지만 실은 수치는 응시하기 어려운 감정 중 하나입니다. 왜 부러 뒤돌아 수치를 들여다보기로 하셨나요?
그렇게 봐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수치심을 말할 때 겨우 조금 솔직해지는 것 같습니다. 픽션과 에세이, 영화와 문학을 가리지 않고 제가 주인공과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고 느낀 순간은 대체로 그들이 자기 수치심을 드러낼 때였어요. <헤어질 결심>의 사랑이 왜 애절할까요. 두 주인공이 자길 낮춰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도 같아요. 스스로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다”고 하고, 섭섭한 얼굴로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묻기도 하고. 어리석음과 후회의 역사, 콤플렉스의 ‘다시 쓰기’가 제가 사랑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빚어낸 초상들의 동력이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내면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는 따라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요.
한편으로는 절실한 자기고백의 유행이 완전히 끝났다고 느끼는데요. 아무튼, 취약성을 보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운 현실임은 분명하므로 활자와 이미지를 빌려서나마 부끄러운 것, 분열적인 것, 나약한 것을 투영하는 작업이 제게는 여전히 재밌습니다.
주간지 영화기자로서 매주 동료와 함께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숱한 마감을 통과하며 경험적으로 체득하게 된, 동료와 함께 일할 때 중요한 태도 혹은 자세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전혀 실천해 오지 못했기 때문에 당당히 말하기가 부끄러운데요. 최근 들어 자꾸 다짐하게 되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상대를 새삼스럽게 보고 대하자는 것인데요.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 때, 부탁과 거절을 할 때, 결과물에 반응할 때, 하물며 오가는 길에 마주쳐 서로 가볍게 목례할 때조차 일터에 스며든 관성과 호흡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산뜻해지고 새삼스럽게 친절해지기를 바라요. 부지런히 상대의 재능과 적성에 주목해 주면 더 좋겠죠. 소리내어 칭찬하는 일에 겸연쩍게 굴지도 말고요. 과로하는 상황일수록 서로의 피로나 고됨에 관하여 그 절대적 정도를 저울질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는 더 잘 쓰고 더 쉽게 쓰기보다 더 생생하게 쓰고 싶다”(178)고 하셨습니다. 불이 켜지기 전의 어둠을 응시하며 시작한 이야기가 생생함에 관해 말하며 끝나가는 것이, 영화를 경유한 모종의 환생처럼 느껴졌습니다. 기자님이 생각하시는 ‘생생하게 쓰기’란 무엇일까요?
때로 가독성을 잃더라도 대상에 가닿는 어조와 형식을 찾아나가는 시도. 저로서는 겨우 그 정도입니다. 작품을 삼킨 채 글 쓰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까닭입니다. 이번 책에서도 언급했던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피닉스> <트랜짓> <운디네> <어파이어> 등)가 언젠가 직접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곤 합니다. 베를린이 습지를 메운 도시개발의 산물임을 상기시키는 어느 물의 정령에 관한 영화 <운디네>를 보면, 숏의 흐름마저 액체적이라는 사실이 황홀하게 다가오는데요. 페촐트 감독을 인터뷰할 때 저는 그 유려함의 비밀을 어떻게든 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는 기자의 우문에 “형식이 내용에 전염된 영화를, 나아가서 서로를 전염시키는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는 간단하고도 아름다운 지론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뒤로 글쓰기가 난처해질 때마다 페촐트의 말에 제 입장을 대입해 봅니다. 제 글은 ‘저의 글’이기 이전에 ‘영화의 글’이므로 대상에 정확하고 세밀하게 전염된 결과이고 싶다고요. 그러다보면 간혹 생생해질 수 있지 않을까 (무턱대고) 소망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 ]
<패터슨>의 성냥갑입니다. 네모나고 견고한 작은 상자예요. 라벨은 남색과 흰색으로 쓰여 있고요.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에서 매일 규칙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에겐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갑)”이기도 한데요. 나중에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게 해주는 사물로서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해요. 성냥갑 표면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며 느낀 촉각, 색감, 그 밖의 여러 물리적 성질들이 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거꾸로 드러내기에 좋아하는 소재에요. CGV 큐레이터로 비평 활동을 전개할 때 동료가 선물한 이른바 한정판 굿즈인데요. 저는 자주 패터슨다운 일상을 희구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때 공연히 불을 켜보기도 하고 향초를 피우기도 합니다. 라이터와 달리 잠잠한 표면을 그어서 불꽃이 일순 피어나는 성냥만이 주는 신비로움과 힘도 좋습니다.
<패터슨> 성냥갑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기자의 마감 공간은 마감 전까지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입니다. 하지만 에세이인 첫 책은 대부분 늦은 새벽이나 아주 이른 아침에 깨어서 쓰곤 했으므로 그다지 자랑할 데 없는 제 방 작은 책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쪽 벽면에 책의 한 챕터 ‘앞면과 뒷면의 이중인화’에 언급한 에드워드 양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포스터를 크게 붙여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뒷모습을 찍는 주인공 양양이 달리고 있네요. <하나 그리고 둘>에서 감독은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영화가 발명된 이래 인류가 인생을 세 배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닌 영화와 예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직업이 종종 너무도 미약하고 한가하게 느껴져 자괴감이 들 때면 잠시 고개를 들어서, 카메라를 메고 달리는 한 소년을 봅니다.
벽면의 서재와 <하나 그리고 둘> 포스터
마감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멈춰 서서 가만히 기억을 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가능한 한 정갈히 보관해 두고 싶은 감정과 감흥을 속 깊은 곳에서 매만질 여유를 갖고 싶다거나. 마감은 이런 욕구를 사치로 분류하게 해요. 당장은 어쩔 수가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반, 분기탱천한 자세 반으로 이번 마감만 끝나면 삶을 제대로 누리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방치한 일상, 유예한 사유 같은 것을 뒤늦게라도 되찾겠다고요. 하지만 제때 쓰지 못한 일기처럼 막상 마감이 끝나면 아무것도 온전히 붙잡아지지가 않는 게 아니겠어요. 해야 할 일과 써야 할 글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긋이 현재의 가능성에 머무르는 태도. 그것을 연습하는 요즘입니다.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집니다. 작업 중 특히 재밌게 본 타인의 작업은 무엇인가요?
쉼보르스카의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를 뒤적거립니다. 일단 제목이 좋아요. 농담마저도 온화할 듯싶은 쉼보르스카의 어조로 ‘읽거나 말거나...’ 라고 이름 붙여진 책이 마음을 풀어헤쳐 주는 감이 있어요. 주간지 작업은 아무래도 정확성과 속도, 부응해야 할 격무와의 싸움일 때가 많은데요. 활자 앞에서 털을 바짝 세운 채 기세 반 허세 반 부리다가 쉼보르스카 선생이 펼친 다종다양한 독서칼럼으로 돌아서면, 마음이 한결 순연해집니다. 또 글이며 영화며 아무것도 보기 싫어지는 날에도 이 책은 어쩐지 펼칠 수 있게 돼요. 아마도 최초에 저를 사로잡았던 탁월한 서문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대목을 여기 옮겨둘게요.
“어떤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 않아도 되고, 또 원한다면 어떤 책은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낄낄거리면서 웃을 수도 있고, 어떤 대목에서는 평생 동안 기억하게 될 문장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멈춰 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테뉴가 주장한 것처럼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준다. 혹은 아주 잠시 동안만이지만 중생대 지층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도 있게 해준다...”

이 직업의 사정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꿰뚫고 있었던 게 하나 있다. 병세가 완연해진 어느 날에 아빠는 침대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나 봐."
메일함의 보도자료들에 정신이 팔려서 눈길도 주지 않는 딸이 되묻는다.
"뭐라고?"
"그럼 한번 멋지게 해봐라. 좋아하는 마음에 보답해야 하니까."
(『불이 켜지기 전에』, 128-129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박소미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고 저장해 둡니다. 그 사람들...어떤 얼굴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읽고 씁니다.

![[작지만 선명한] 삶을 도약시키는 돌고래의 책](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0/20251002-34283845.jpg)
![[인터뷰] 구병모 “광대인 제가 그러기로 선택한 것이죠.”](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0/20251001-49b7b864.jpg)
![[김혜리 칼럼] 개론](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0/20251001-77bb7701.jpg)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 우정 읽기](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9/20250930-c0b54c6c.jpg)
![[인터뷰] 윤덕원, 서서히 느슨하지만 짓고 마는 사람](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9/20250929-712e35a7.jpg)
시월Shiwol
2025.10.17
무쿠
202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