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눅눅한 계절을 산뜻하게, Chill한 시집들
차가운 오이 맛처럼 산뜻하고 때로는 선뜻하기도 한, 세 권의 시집.
글 : 임유영 (시인)
2025.07.01
작게
크게

사계절 뚜렷하니 철철이 먹을 것도 많지만 챙길 것도 많습니다. 여름이면 더위도 걱정이지만, 장마와 높은 습도를 떠올리면 벌써 몸과 기분이 축축 처지는 느낌입니다. 그런 날엔 감정의 농도가 너무 진한 글을 읽기도 부담스럽습니다. 어쩐지 끈적거리는 느낌이랄까요. 몸에 들러붙지 않는 여름 옷감처럼, 차가운 오이 맛처럼 산뜻하고 때로는 선뜻하기도 한 시집들을 소개합니다. 

 

 

『별세계』

김유림 저 | 창비 

 

도약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쓴다. 사물이 거부하고 사람이 거부하고 힘이 거부하는 동시에 길이 열리고 그는 쓴다. 나는 쓰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 상수리나무의 잎사귀를 관찰하는 산림청 직원을 보았다. 그는 나무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고 색 끈을 하나 꺼낸다. 색 끈으로 나무의 허리 즈음을 조인다. 그러나 나무는 한참 자랐다. 한참 자라서 사람의 키를 추월하고도 남았다. 사람은 자신의 머리가 닿는 높이에 색 끈을 묶지만 나무의 허리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썼을 거야. 유림은 생각하고 유림이 생각한 걸 쓰던 나는 고개를 들어 카페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노인의 복장을 본다. 가족도 지나간다. 나의 가족은 말고. 가족은 가족이라는 게 중요하다. (「완이 생각에는 주술이 이렇다」 부분, 『별세계』 107쪽)

 

매일 반복되는 일상, 이라고 관습적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우리는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날과 마주합니다. 정확히는 매분, 매초가 새로운 사건이고 우리의 의식이 연속성을 가질 뿐이죠. 김유림 시인은 그 ‘대충 비슷해 보여서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의 디테일을 조금씩 부지런하게 손보면서 시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봅니다. 화려한 기교 없이 담백하고 섬세한 쓰기를 통해서요. 시인의 ‘별세계’ 안에서, 자신의 글쓰기-세계를 계속해서 의식하고 참조하는 쓰기는 시편을 오고 가며 층위를 입히고 또 벗깁니다. 결과는 신기합니다. 가령, 이제 시인이 “반복한다”라고 쓰면, 그 행위가 가볍고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느껴집니다. 현실 세계의 반복 불가능성을 더 강하게 가리키면서요. 이 시집을 읽을 때면 깨끗하고 차가운 손으로 작은 블럭을 잽싸게 움직이는 이미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보기 좋고 쾌적하지만, 지치지 않고 연쇄된다는 점에서 약간 긴장하게 되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느낌으로 끝까지 집중하며 읽게 됩니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 집으로 나가는 길을 보았다. 그것은 얌전하고 그대로였다. 바게트를 사야 해서 바게트에게로 가다가 언덕에게로 가고 또 그러다가 잠이 깬다. 언젠가 말했듯이 이것이 내가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유다. 인간은 물을 끓여 탁자 위 컵에 붓는다. 이것은 보리차 냄새. 나는 깨닫고, 나는 최선을 다해 주위를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인 것 같고, 인간이 주는 마지막 호의인 것 같은 담요에서 부스러기를 본다. 제기랄, 부스러기는 꿈으로 흩어지는 중이었고 나는 나에게 희미했던 구수함이 진해진 걸 깨닫는다. 완전히 깨어난 것이다. (「집으로 나가는 길」 전문, 『별세계』 127쪽) 

 

 

『기억 몸짓』

안태운 저 | 문학동네 

 

새해 그다음날

나는 매여 있었지만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동작을 취하고 싶었죠

시공간이란 무엇인지 어리둥절해하면서

공간에 놓여 있는 나를 시간이라고 음미해보기도 하면서

시간에 놓여 있는 나를 공간이라고 음미해보기도 하면서

그것인 나한테

비나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음 새로운 촉감이군

새로운 흔들림이군

이렇게 중얼거리는 나한테

음 나는 새로운 중얼거림이군 (「통일 시」 부분, 『기억 몸짓』 82쪽)

 

안태운 시인의 리듬에는 느긋함이 있습니다. 끝없는 산책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시를 따르는 걸음은 그러니 평소보다 좀 느린 게 좋습니다. 그의 산책은 정확한 시간과 루트가 있는 종류도 아닙니다. 어떤 날에는 나가서 볕 좋은 곳에 앉아만 있다 오는 날도 많은 듯합니다. 이렇듯 청년보다 노인에 가까운 듯? 싶다가도, “얌”이라던가 “알타리 두릅 인절미 봄동 천혜향 두부 꽈배기 알리움” 같은 예쁜 단어들을 발음해보고 “휘양숭휘양숭” “루이햐” “레로라치레로라치” 의태어를 만들어보는 모습은 놀기 좋아하는 아이 같기도 하고요. 생물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 또한 자주 드러납니다. 

 

“어느 날에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만지지 않았다”는 시인의 말은 그래서 세상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상관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방식의 시 쓰기에 대한 그의 고민이라 저는 읽어 보았습니다. 손대지 않고 지켜보는 사랑이 가질 수밖에 없는 쓸쓸함이 어쩔 수 없이 이 시집에는 많습니다. 그런 몸짓이고 흔적입니다. 

 

벚나무를 의인화했다. 기억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그 여름 흰발농게를 떠올려보았다. 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너는 군집을 이루었다. 토착어를 연습했고 이끼를 먹었다. 먹혔다. 돋보기를 썼다. 낳았다. 나를 의인화해보았다. 피가 나고 있었다. 오목눈이를 보았다. 누치를 보았다. 그림의 빛. 나를 의인화하고자 했다. 계속 시도했다. 잔물결. 망설임. 거두어 가지 않음. (「여울」 전문, 『기억 몸짓』 15쪽)

 

 

『시작법』

차호지 저 | 문학과지성사 

 

사실이 아닌 말을 해봅시다. 그것은 거짓인가요? 『시작법』 속 화자들의 차분한 진술에는 독자를 끌어들이고, 믿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한여름에 같은 호텔에서 묵는 사람이 밖에 눈이 온다고 말한다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겠죠. 하지만 화자는 자신이 속한 장면의 중력을 성실하게 받아냅니다. 지금은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장면 속에 있으니까요. 화자가 자신의 세계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덕분에,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니지만 풍부한 생명력과 일말의 진실을 획득합니다. 그렇게 저는 시인의 시에 설득됩니다. 

 

그가 내미는 시는 화려한 쇼트케이크 보다 묵묵하게 생긴 카스테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것은 초콜렛 무스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저도 “아아 그렇군요, 잘 먹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믿어보겠습니다. 맛있게 움직이는 문장들을 따라가면 분명 멋진 도약을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방금 총성이 들렸다고 아침 조깅을 즐기던 외국인이 말했다. 나는 해변에 넘어져 있다. 아직 개와 산책하는 주인도 없는 모래사장에. 없는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는 척을 했는데 정말 넘어져버렸다. 파도치는 해변을 보고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밀려가고 밀려오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여기 봐요. 무릎에 모래도 조개도 묻지 않았어요. 아까 깨진 유리를 발로 밟았는데 상처도 없어요. 밟히는 게 없었거든요. 느낌이 이상해서 신발을 벗었는데 여기 바닥에 아무것도 없어요. 모래사장에서. 그렇게 여기서 같이 걷기로 한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신기하다. 신기해서 같이 와보고 싶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은 춥다고 말했습니다. 감기에 걸렸느냐고 물으니 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여름이고 그 사람과 나는 같은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거짓말이 속상해 울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를 달랩니다. 그렇지만 눈이 오고 있는데 눈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잖아. 그렇지. 눈이 오지 않는데 오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지.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우리는 왜 언제나 이럴까 왜 만날 수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외국인을 만나고 외국인에게 말하고 외국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총성을 듣고 생각이 났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발사되었던 것이다. (「카운터포인트」, 『시작법』 64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별세계

<김유림>

출판사 | 창비

시작법

<차호지>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Writer Avatar

임유영 (시인)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