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종말을 소재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한가득한 와중에 그 부류에서는 조금 동떨어진, 어쩌면 아주 다른 종말기가 나왔다. 세상에 둘만 남은 남과 여. 그러나 그 둘의 관계가 삐걱거리다 못해 거부감으로 ‘발전’되어 간다면? 6년만에 장편소설 『담이, 화이』를 출간한 배지영 작가에게 소설에 못다 한 이야기를 청해 본다.
오랜만에 소설을 출간하셨습니다. 시간이 길었던 만큼이나, 다른 책을 선보였을 때와 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책이 나오기 전까지, 오랜만의 출간이란 사실을 잘 몰랐던 거 같아요. 매일 성실하지는 않아도 꾸준히 소설을 쓰고, 또 고치고 있었고, 연말이 되면 내년엔 책이 반드시 나오겠지, 라고 생각했거든요.
막상 책이 나오고 헤아려 보니 정말 오랜만에, 그러니까 6년이나 걸렸더라고요. 그 사이 아이를 낳아 키웠고 몇 해 전엔 몸이 아파서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으니 아무래도 집중해서 마무리하기 쉽지 않았던 거 같아요. 등단한 지 몇 년이 됐고, 나이가 어떻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지만, 제 인생에서도, 소설가로서의 삶도, 새로운 시기를 맞이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더 속도를 내야겠다는 다짐도 했고요.
책을 손에 쥐었을 때의 첫인상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표지를 받아들고 소설책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싶었어요. 장종완 작가님의 「식물성 로맨티스트」라는 작품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는데요. 박혜진 편집자님이 지어주신 제목 ‘담이, 화이’랑도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간되기 전, 사진으로 보내 주셔서 봤을 때도 예뻐 보였는데. 손에 쥐고 실물을 보니, 아, 이거 너무 소장각이잖아, 싶었어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을 소개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종말에서 창세기를 생각해 본 이야기.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아담이 되고픈 남자와 이미 죽어 버린 사랑을 찾으려는 한 여자가 서로를 참아내는 이야기.
『담이, 화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세상에 둘만 살아남은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서 생겨나는 서로에 대한 짜증인 것 같습니다. 종말을 상상하면서 이렇게 일상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에 주목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세상의 종말에 두 남녀가 살아남았다고 가정했을 때 처음엔 노아가 방주에서 걸어 나온 상황이 떠오르더라고요. 물이 휩쓸고 간 세상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면 그 어떤 건설적인 일보다, 어쩌면 시체와 동물의 사체 등을 처리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하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사람들만 죽어 버렸다면, 창세기의 상황과 더 닮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담과 화이에겐 모든 것이 완벽한 ‘안전가옥’이 있고 또 물건을 가져올 수 있는 백화점이 가까이 있고. 그건 일종의 에덴동산과 같은 장소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던 시절, 둘은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어요.
하와는 아담 이후에 만들어진 존재잖아요, 그것도 아담의 갈비뼈로. 그런 하와에 대한 아담의 마음은 어땠을까. 처음엔 좋았겠으나 어쩌면 그 시간은 지극히 짧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담은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문제로 하와에게 이것저것 요구했을지도 모르고요. 하와로서는 그러한 것들을 부당하게 느꼈을 거 같아요.
‘도대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에덴동산이 자기 것도 아니면서!’
그러기에 하와는 ‘뱀’으로 상징되는 어떤 존재에게 끌렸던 건 아니었을까. 아담도 하와를 따라 선악과를 먹고, 거짓말을 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잖아요. 그때 아담은 얼마나 하와를 원망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 뒤 하와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면, 아담은 그게 자신의 아이라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뱀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상상에서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성경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은 이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과잉되기도 하지만, 결여되면 회복도 힘든 데다, 결핍에 대한 파국의 정도 또한 크기 때문 아닐까 싶었어요. 그렇게 서로에 대한 믿음도 없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그 어떤 소망도 사랑도 없는 두 남녀를 생각하며 담과 화이를 그려 봤어요. 많은 부분에서 닮았음에도, 담과 화이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더 미워하고 사사건건 짜증내며 대했던 것 같기도 해요.
담도 화이도, 평소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배경은 어느 날 아침에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걸어다니는 시체’로 바뀌는 상황입니다. 왜 다 죽지 않고, 움직이는 시체를 이들의 배경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해요. 차라리 다 죽여도 됐을 텐데요.
좀비 영화에서 주목하는 건 대체로 그들의 공격성이잖아요. 그렇기에 살아남은 인간들은 ‘외부의 적’을 향해 힘을 합하고 화해할 수 있었을 거 같아요. 그랬다면 담과 화이도 조금 더 쉽게 상대를 이해하는 척, 좋아하는 척, 믿는 척, 이라도 했을지 몰라요. 그리고 그저 시체였다면 ‘처리 문제’에 있어 훨씬 더 용이했겠죠. 성실한 담이라면 쉽게 그 일을 마칠 수 있었기에 화이에게 일에 관한 압박도 조금 덜했을 지 모르고요.
하지만 시체가 걸어 다닌다면, 일단 ‘처리’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해질 거 같아요. 걸어다니는 시체는 외부에서 들어오기도 하고, 그곳은 또 직장인들이 많았던 빌딩과 건물에 둘러싸인 곳이잖아요. 멸망의 시간이 퇴근 무렵이었으니, 안에 있던 (죽었으나 어떤 면에선 결코 죽지 않는) 시체들이 끊임없이 밖으로 나오기도 하니,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을 거 같아요. 더구나 그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무리 지어 다니잖아요. 죽은 듯 했으나 걸어다니고 있기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럼에도 그저 시체이기도 한 그들을, 쓰레기처럼 취급할 수도 없었을 테고요.
담과 화이는 그런 좀비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멸망 전 자신을 소외시켰던 이들을 떠올리게 했을 거 같아요. ‘걸어다니는 시체’는 담과 화이에게 있어, 너무도 외면하고 싶었을, 취약하고 허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존재가 되었을 거란 생각도 들어요. 세상의 멸망 후, 완벽하게 상황이 역전되었음에도, 담과 화이는 이전의 생활방식을 고수했고 정작 본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해요. 여전히 지하를 서성이며 청소하는 일에 몰두하는 담도, 자신이 일했던 백화점이란 공간을 차마 떠나지 못한 채 애초에 죽었던 혹은 없었던 사랑 찾기에 몰두하는 화이도요. 시체가 되었음에도 부지런히 걸었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죠.
앞서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둘만 남은 상황이라고 했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담은 계속 일을 하고 화이는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화이 눈에 담의 그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는 게 아이러니했어요. 담에게 ‘일’을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담은 모든 것에 소외된 인물입니다. 어떤 것도 주류에 속하지 못해요. 성적 취향조차. 그런 그가 유일하게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건 지하에서의 ‘일’이었어요. 작지만 강인한 신체, 다소 고지식하고 무던한 성격조차 너무 최적화된 거예요. 더구나 담은, 그의 아버지가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무가치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았잖아요. 그런 담에게 ‘일’이란 생존을 넘어선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정체성이기도 해요. 그 일이 비록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게 아닐지라도 담은 일을 하는 순간만큼은 빛나는 존재니까요. 그러니까 담은, 세상이 망한 뒤에도, 그 일을 놓치지 못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화이는 나름 열심히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담의 눈으로 봤을 땐 태업에 불과했겠죠. 화이에게 ‘일’이란 정체성도 뭣도 아닌 그저 ‘수단’이었던 거죠.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일할 땐 지상으로 가려고 일을 했던 거고, 담이 제공해준 집에서 살게 됐을 땐, 일종의 월세를 지불한다는 생각으로, 담이 요구하는 일을 했던 거고요. 담이 생각하는, 사명감 같은 게 있을 리 없어요. 그러니 그 이상을 요구하는 고지식한 기성세대이기도 한, 담의 요구에 그녀는 동조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런 담을 보면서, 참 별거도 아닌 것에 집착하는구나, 싶었을 거 같아요.
세상이 다 망해버린 것 같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첫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만, 실은 이전 세상과 하나도 변함없음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역전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이전의 삶을 버리지 못합니다. 지하를 서성이며 청소하는 일에 몰두하는 담도, 자신이 일했던 백화점이란 공간을 차마 떠나지 못한 채 죽어버린 사랑 찾기에 몰두하는 화이도요. 시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걸었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걷는 자들’ 역시 그렇기도 하고요.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님께 생긴 변화가 있다면 무얼지 궁금해요.
이 소설은 「그들과 함께 걷다」라는 제목의 제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시킨 이야깁니다. 처음엔 작업이 정말 빨리 끝나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러 버전의 초고가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담과 화이의 캐릭터도 변화를 맞이했지요. 인물 구성도 달라졌고요. 그러면서 시간이 많이 흘렀더라고요. 아이가 태어나고 유치원을 다니고. 나이만 많은 어설픈 엄마로서 매일이 고되었지만 그만큼의 기쁨도 있었어요.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어서 견뎌낼 수 있는 부분도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는 시를 쓰는 천수호 언니네 가족과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살게 된 거예요. 키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 언니네는 1층에, 저희는 2층에서 살았어요. 근데 하필 그 시기에 제가 몸이 아팠던 때라 수호 언니와 언니의 가족분들에게 많이 기대어 지내기도 했어요. 그뿐 아니라 이웃도, 마주치는 동네 분들도 모두 친절하셨어요. 아이의 인사에, 웃음소리에 혹은 눈빛에도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수호 언니네 가족의 배려와 이웃의 친절이 저의 회복을 도와준 거란 생각도 들었어요.
지나고 보니, 전 그토록 따스한 마음과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으면서, 당시 쓴 소설 속 담과 화이는 차가운 시선으로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끝내는 배신하는 마음만 주고받게 했으니,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에도 제 글이 미움이나 단절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이자, 사랑받지 못한 이들의 사랑을 그리고 그들이 품었던 소박한 희망과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응원하는 마음으로 담과 화이를 바라봐 주었으면 싶기도 해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담이, 화이
출판사 | 민음사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