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파는 그들의 교주가 재림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구원이 한정 없이 미뤄지는 중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전 세계의 기근과 빈곤, 질병, 전쟁, 그로 인한 분쟁과 슬픔과 고통은 모두 교주에게 책임이 있다.
『피와 기름』으로 열한 번째 단독 단행본을 펴내셨더라고요. 2022년에 활동을 시작하신 것을 생각하면 정말 활발하게 글을 쓰고 발표해오셨어요. 간단한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변수가 좀 있었고 처음 작가 생활을 시작하며 기획했던 것들과 어긋난 부분도 생기게 되었습니다만, 상당히 좋은 쪽으로 어긋났다는 느낌입니다. 원래 생각했던 길을 벗어나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길로 접어들었더니 거기에 보물이 있었던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피와 기름』은 어긋난 결과물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입니다.
장편소설 『피와 기름』을 짧게 소개해주신다면요?
저는 소설을 쓰기 전에 ‘이 소설을 한 줄로 줄이면 무슨 내용인가’ 하는 로그라인과 ‘이 로그라인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게 될 것인가’ 하는 관념 두 개를 딱 잡은 다음 여기에 기반해 인물 구도를 짭니다. 『피와 기름』의 경우 ‘사람을 부활시키는 소년과 25년 전의 사이비종교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자’, 그리고 ‘인간의 한정된 삶에서, 그리고 현대에 종말과 부활과 구원이란 어떤 의미인가?’가 핵심이 되었지요.
이에 따라 도망치는 구세주가 나오고, 도박 중독(혹은 스릴 중독)에 시달리는 서른네 살의 논술학원 강사가 나오고, 가톨릭 신부가 될 뻔했던 대기업 총수가 나옵니다. 이때 대기업 총수는 1999년의 집단 자살 사건과 얽혀 있지요. 바로 이렇게, 죽음–부활-영원한 생명–자동차-교통사고-돈의 권세-신학이 뒤섞여 궁극적으로는 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피와 기름』에는 1999년 집단 자살 사건으로 유명해진 종교 집단 ‘새천년파’와, 한때 이 새천년파의 중심에 있던 소년 교주 ‘이도유’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도유를 추적하는 ‘조강현’도 있지요. 조강현은 한때 신학도였으나 신학교를 벗어나 신비한 힘을 지닌 이도유를 따랐고, 이후에는 이도유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지요. 이 인물들을 창조하며 참고하거나 영감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인물들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구성적 필요에 의해 결정됩니다. 앞서 로그라인과 관념을 토대 삼는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토대에서부터 이런저런 인물들의 조합을 만들어보면서 어떤 조합이 최적일지를 찾는 방식입니다. 세부적인 설정이나 이미지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다만 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역량만을 큰 틀에서 지정함으로써 변동의 여지를 열어두는 편입니다. 여기에 기반해 카드 게임을 시뮬레이트 하듯(혹은 명제 퍼즐을 짜듯) ‘A, B, C 각각의 패가 이러하다고 했을 때 A가 이 카드를 낸다면 C는 어떤 카드로 대응할지, 게임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야 관전자들이 가장 즐거워할지’ 등의 질문을 굴려보다 보면 최적의 청사진이 나오는데, 이걸 붙잡고 쓰기 시작합니다. 세부적인 성격이나 디테일은 쓰는 동안 완성되며, 그동안 다른 사람의 창작물은 보지 않습니다.
이제 질문 주신 인물들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도유’는 원래부터 필요한 인물이었고, 육화된 카테콘(kathēkon)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억제함으로써 종말과 구원마저 지연시키는 존재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물은 로그라인을 뒷받침하는 관념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또 다른 주인공인 조강현은 처음에는 “주인공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본가 정도면 좋겠군” 정도로만 틀이 잡혀 있었지요. 주인공이 현장에서 실컷 구를 예정이니까 그 반동 인물은 사무실에서 가만히 명령을 내려야만 에너지의 밸런스가 맞는 겁니다. 즉 조강현은 대기업의 총수로서 영생이나 더 많은 돈이나 정치적 권력을 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돈이나 영생이나 권력에 목매는 사람은 저 자신에게는 결코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거니와 소설 자체도 관념적인 뉘앙스가 짙어진 까닭에, 중반부터는 이 인물도 신학적 토론의 대오에 합류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평범하게 경영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알타이저와 몰트만을 읊기 시작하면 이상하니까, 조강현에게는 마땅한 전사(前史)가 있어야 합니다. 해당 인물의 목적과 역량을 설명할 수 있거니와 독자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한 사연들 말입니다. 가톨릭 신부가 될 뻔했던 대기업 총수 겸 집단자살사건의 생존자라니 흥미롭지요.
『피와 기름』은 세계 윤리에 대해 질문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중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지구 반대편에서 30만 명이 굶어 죽더라도 오늘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그 일은 얼마나 부조리한지, 진중하게 묻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런 면에서 전작인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에서는 모두의 머리 위에 정의와 부덕의 지표를 드러내는 수레바퀴가 떠올라 있는 세계를 보여주셨지요. 이러한 주제를 소설로 쓰고자 결심한 계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해당 작품과 『피와 기름』은 “인간은 지구 반대편에서 30만 명이 굶어 죽더라도 오늘 저녁을 맛있게 먹는 생물이다”, 그리고 “돈과 욕망의 자율성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 (산술적인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정의는 망실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의 자체에 대하여 강제적인 기준점을 추가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공유하고 있지요. 비록 세부적인 접근 방식이나 그것을 구현하려 하는 양상은 다릅니다만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실제로 ‘조강현’의 몽상 같은 세계입니다.
이런 주제에 천착하게 된 까닭을 설명드리자면, ‘뚜렷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이것을 묻고 답하며 살아왔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령 저는 상황이 있는 아이들에게 무료 과외를 해주거나 학비를 약간 보태는 등의 일을 해왔는데(그리고 자연스레 진로 상담이라든지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를 해주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다. “나는 재능이 탁월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는 나보다 사정이 안 좋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공력을 들이느냐?”
이것은 타당한 지적입니다. 사실 아이 하나를 대학에 보낼 비용(혹은 높은 수준의 직업 교육을 시킬 비용)과 해외 인프라 개선에 보탤 비용을 저울에 올려놓고 계산한다면, 후자가 단연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대학은 반드시 가야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한 학생이 없더라도 다른 학생이 알아서 그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그러니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 돈을 모두 기부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진실은, 돈을 기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병이 고쳐진다고 해서 방황이 바로 멈추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이 필요합니다.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사랑하며 살아갈 대상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 사랑이란 반려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음악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나는 아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우리 세상에 필요하다고 믿는다’ 등의 믿음이고요.
즉 사람을 돕는 데에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완전해지는 데에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개념은 ‘타인의 긴절(緊切)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의지’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필요를 만들어 내는 능력(그리고 그 필요를 충족시킬 의무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경향)’마저 포괄하기 마련입니다. 후자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음악과 미술과 선량한 이웃들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소외된 자들의 필요를 외면하게 됩니다. “○○한 사람들은 ××해서 싫더라” 하는 발언이나 유명인들에 대한 집착적인 통제욕 역시 후자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카리타스(caritas)와 코나투스(conatus)는—또한 쿠피디타스(cupiditas)는—그 본성상 종종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사랑과 사랑이 맞부딪히는 자리에서 욕망과 정의가 잡음을 일으킵니다.
사랑이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 완성될 수 없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는(더 나아가 우리가 발붙인 세계를 망가뜨리고 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일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어쨌든 나는 딱 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길거리에 나앉는 상황을 감수할 만큼 담대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에 대한 사랑이 수십억 명의 규모로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은 아닌지……?”
한편 이 질문은 『피와 기름』을 통해 형상화되어 있기도 합니다.
작품 초반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공간은 대치동 학원가입니다. 서른넷의 ‘우혁’은 대학 선배의 도움으로 대치동 학원가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그러다 중학생 시절 조우했던 신비한 소년과 재회하지요. 작품 도입부의 배경이자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다시 만나는 공간으로 대치동 학원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치동 학원가는 굉장히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질서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곳입니다.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요소들이 새로운 자연을 형성하고 있지요. 그건 정말이지 현대 사회와 시장의 미니어처처럼 보입니다. 작중에서는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충동―현세의 욕망과 물질―믿음과 추상과 초월’의 세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만큼 대치동은 그 정중앙에서 다른 둘을 교차시키고 매개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일 것입니다.
학원가가 과잉 지식인의 구제처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즉 배운 건 많은데 도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사교육 업계로 흘러 들어가고, 주인공인 최우혁은 딱 이 설명에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칸트와 플라톤에 대한 지식으로 Y대 논술 첨삭을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과 추상과 초월이 물질에 부역하거나 아예 악세서리가 되어버리는 현대의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구도지요.
한편 무의식이 작용했겠다고 추측하는 면도 있습니다. 올해 6월까지 사교육 현장에 대한 르포인 『수능 해킹』 집필 및 교정 작업에 매달려 있었고, 그 후로도 후속권 준비로 인해 계속 교육 이슈에 귀를 열어두고 있었거든요. 정신이 대치동에 붙들려 있으니 소설을 쓸 때도 대치동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중인물들의 대화 중에 여러 종류의 철학서가 언급됩니다. ‘작가의 말’에서는 ‘우혁’을 창조하며 떠올린 미스터리 소설 속 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셨지요. 작가님의 방대한 독서량이 짐작이 되는 부분이라 생각되는데요. 평소에 책을 얼마나 읽으시는지,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앗, 종종 오해받는 부분인데 제가 쓰는 작가의 말은 ‘기획 비하인드’라기보다는 철저히 사후적인 것입니다. 후기를 쓸 때는 소설을 쓰는 자아로부터 열 발짝 정도 물러나 타인의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듯이 글의 구성 요소를 뜯어보게 되지요. 즉 작가의 말은 기본적으로 “쓰고 나니 이런저런 것을 연상시키고 이렇게 해석될 만한 결과물이 나왔다”지 “나는 이런 동기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와는 거리가 멉니다. 특히 최우혁의 성격이라든지 화법은 탐정소설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저를 떠올리면서 썼습니다(그래서 이 친구는 모범적인 탐정들에 비하면 상당히 덜떨어진 편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책을 얼마나 읽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쓸 때는 아무것도 읽지 않고, 쓰지 않을 때는 뭐든 읽습니다. 대강 골조만 알면 나머지 내용이 보이는 책들이나 담론이 놓인 맥락을 이미 아는 책들에 대해서는 발췌독을 하다 보니 이걸 몇 권으로 세어야 할지 긴가민가한 면도 큽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나쁜 버릇이 특히 심한데, 보통은 3/5까지만 읽으면 이후 전개가 이렇게 저렇게 되겠네 싶은 느낌이 확 올라와서 뒤로 쓱쓱 넘겨보게 됩니다. 혹은 글 내부의 공간을 음미하기보다는 ‘이건 이런 얘기를 하는 대목이고 이런 기교가 활용되었군’ 정도를 빠르게 훑고 지나갈 때도 있는데, 관광과 측량기사의 업무가 다르듯 이것은 독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도 소설 중에서만 말씀드리자면 최근에는 R. F 쿠앙의 『옐로페이스』를 가장 즐겁게 읽었습니다. 미국 출판시장과 정체성 정치, 당사자성과 윤리적 재현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국이랑은 상황이 다소 다르면서도 맥이 통하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건 첫 문단과는 다소 배치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읽으면서 제 버전의 『옐로페이스』를 하나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또 다른 방향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 직후에 최재영의 『맨투맨』이 나왔고 이것도 읽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슬슬 한 시대가 넘어가는 징후로 여겨집니다.
한편 『피와 기름』을 쓴 직후에는 프란츠 베르펠의 『베르나데트의 노래』와 올더스 헉슬리의 『루덩의 악마들The Devils of Loudun』을 읽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소설들(『사제 바실리 피베이스키의 삶』, 『가룟 유다』 등)도 살폈고요. 그 후에는 에마뉘엘 카레르의 『적』을 한 번 더 읽었는데, 장클로드 로망 같은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친 까닭에 굉장히 놀랐기 때문입니다. 책과 인간사가 교차하는 순간은 언제나 경이거나 경악이지요.
마지막으로 채널예스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말씀해주시겠어요?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도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최소한 다섯 권 정도는 큰 윤곽이 잡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똑같은 테마를 다른 방향에서, 다른 분량으로 접근해 들어가면서 ‘똑같은 대상을 다루더라도 방식에 따라 그 질감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조명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데요, 유화 물감이 더께 쌓이며 지층과 양감을 만드는 것처럼 제 작업물의 리스트 또한 시간에 따른 퇴적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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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