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름다운 것은 징그럽다, 하고 엄마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봄날 산란하게 흩날리는 꽃잎 아래였거나, 파랗고 푸른 투명함 속으로 몸을 녹여 사라지고 싶은 바닷가였다면 나는 그렇구나, 하고 반쯤 공감했을지 모른다. 온갖 생활폐기물들이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는 골목들을 지나면서 들을만한 말은 아니었다. 빈 집 우편함에는 비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수차례 반복했을 우편물들이 목을 반쯤 뺀 채 꽂혀 있었다. 줄기가 푹 꺾인 채 자라고 있는 식물 같기도 했다. 주민 이주가 마무리된 재개발 구역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텅 빈 상점들의 쇼윈도가 지나가는 것들의 모양새를 가감 없이 비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 놀란다. 사람이 어떻게 앞만 보고 사니? 엄마는 그런 말로 황급히 피한 시선을 기어코 쇼윈도로 돌려놓는다. 엄마가 웃고 있다. 두 팔을 높게 들고 흔들기도 한다. 부서지고 내려앉은 상점 내부가 엄마의 웃는 얼굴, 움직이는 몸과 중첩된다. 언젠가 엄마가 표지 그림이 특이한 노트를 사줬던 팬시점이었다는 걸 그곳을 지나고 나서야 떠올렸다. 엄마가 기억하고 손을 흔든 건지, 그냥 우연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수술과 재수술 후 엄마의 기억력은 불안정해졌다. 내 기억력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팬시점을 지나기 전까지 엄마와 나는 되도록 먹지 않는 편이 좋다고 권고 받은 음식들을 하나씩 주고받던 중이었다. 우유 다음이었나, 시금치 다음이었나. 맥락도 없이 불쑥 한 말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징그러워. 엄마가 보고 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불안해졌다.
엄마 말을 속으로 여러 번 반복했다. 불안하면 반복한다. 샹탈 아케르만의 말이 떠올랐다. <잔 딜만 Jeanne Dielman> 관련 인터뷰에서 그는 어머니인 잔 딜만이 강박적인 건 “시간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그러니까 불안이 자리할 만한 일말의 가능성을 주지 않기 위함이” 1 라고 했다. 딸인 내 반복과 강박이 쇼윈도에 그대로 비쳤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엄마가 나를 읽은 것처럼 멈춰 섰다. 내가 나란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엄마는 가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70대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딸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설마 치매 증상인가, 내 얼굴이 일순 굳든지 말든지 엄마는 발랄하게 덧붙였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더라. 자기를 너무 기억하면 안 돼.”
엄마가 ‘그 여자’가 되는 순간이다. 이상한 여자. 심장 색이 변해 죽은 다른 여자 이야기를 내게 실어 날랐던 여자. 밥상을 앞에 두고 여자들은 높은 비율로 ‘독살’을 사인(死因)으로 갖게 될 거라고 말해서 숟가락을 들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던 그 여자가 느릿느릿 물속인 듯 인기척 없는 거리를 통과한다. 세계의 마지막 날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온갖 식물들이 웃자라 휘청거리는 걸 지나고, 쇼윈도 위에서 쇄파한 내부의 풍경과 중첩되는 자신의 몸을 지나고, 뿌리가 드러난 채 누워서 두 방향으로 자라는 나무를 지나 그렇게, 계속 지나치는 것들이 많아지면 또 모른다. 그 여자 말처럼 나도 내가 누구였나 잊을 수 있을지도. 잊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그런데 어떤 다른 사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말이 없다. 다시 엄마다. 샹탈 아케르만의 엄마처럼 “아무 말도, 거의 아무 말도 안” 2 하거나, 결정적일 때 입을 닫아버린다. 덕분에 딸들은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기예의 전수자들이 된다. 엄마는 조용히 몇 걸음 더 앞선다. 2km 넘게 걷는 동안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다. 엄마를 처음 이 거리로 안내하면서 내가 했던 말. 사람이 없으니 인력도 척력도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그게 너무 좋았다고 말한 거였는데, 내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력과 척력을 미치는 존재와의 동행이라는 걸 어이없게도 깜빡했다. 태생적으로 그 힘들(밀당)에 일가견이 있는 고양이 두 마리가 뒷골목에서 나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다음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까 본 애들 같지 않아요? 우리 감시하나 보다. 왜지? 침입자니까. 아아, 죄송합니다.
내가 고양이들에게 한눈파는 사이 엄마는 대문 한쪽이 뜯긴 집 앞에서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주워 들더니 허벅지에 탁탁 두드려 먼지를 떨어냈다. 검은 박스 조각인가 했는데 가만 보니 엽서다. 젖었다 마르길 반복한 흔적이 구부정한 등처럼 남아 있는. 밤하늘 사진인가? 재개발 구역에 접어든 후 처음으로 엄마와 내 몸이 바짝 붙었다. 주소와 내용이 담긴 면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반대편 면을 살피는 데 더욱 열심이었다. 아리송한 지도 조각을 쥔 것처럼 이렇게 저렇게 한참 돌려보다가 둘은 폭넓은 합의에 이르렀다. 검은 바탕에 하얀 점들, 밤하늘과 별, 멈춘 어둠과 폭발하는 빛, 영원과 순간, 죽음과 삶… 엄마는 머뭇하더니 의미를 이어갔다. 엄마와 딸. 갑자기요? 침묵. 잠시 후 내 안에서 조용한 비명이 울렸다. 검은 침묵과 하얀 비명. 엽서를 우편함에 넣고 엄마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아주 큰 노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굳이 뒤처졌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징그럽다. 그렇다. 다른 이가 한 말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라면 너무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부터 걸렸다. 그게 왜 내게 문제가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도 상처 받지 않을 번역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살고 싶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는 다 징그러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엄마. 이번에는 멈춰 서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엄마가 말했다.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징그럽지. 징글징글하지. 8천 300여 가구가 떠나고 남은 집과 상가, 나무와 쇼윈도와 엽서와 고양이를 지나온 엄마의 등에서 무언가가 누설되고 있었다. 숨 쉴 수 있는 것들이 모두 숨을 멈췄다. 엽서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흑 속의 백. 엄마와 딸? 아니, 딸과 엄마. 그 순간 엽서의 수신인은 나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해. 가령, 모성 같은 것으로부터.
엄마 몰래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엽서가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걸렸다. 사라진 것들이 실은 남은 것들이었다.
1 샹탈 아케르만 저, 이혜인 역, 『브뤼셀의 한 가족』, 워크룸 프레스, 2024, 115쪽
2 같은 책, 131쪽
김지승
읽고 쓰고 연결한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