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정의 옛 담 너머] 터치 마이 바디
‘다칠 상(傷)’안에는 해와 빛을 뜻하는 ‘양(昜)’자가 있고, ‘상줄 상(賞)’ 속‘尙(오히려 상)’은 집과 창문을 함께 그린 글자다. 사는 동안 내게 찾아들 상처들을 창 너머 해를 쬐듯 기꺼이 앓을 수 있을까.
글ㆍ사진 현호정(소설가)
2024.07.09
작게
크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동생은 많이 슬퍼했다. 몇 달이 지나자 특별한 원인 없이 심한 어지러움에 시달렸다. 마침 내가 점집에 다녀온 뒤라(5화 참고) 동생도 주소를 물어 찾아갔고, 무당은 동생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고. “어지럽네… 어지럽겠네….”


어떻게 아셨냐고 물으니 무당은 근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되물었단다. 그렇다고 하니 무당이 답하기를, “할머니가 우리 ㅇㅇ이 불쌍하다고, 불쌍해서 어쩌나 어쩌나 하며 옆에서 계속 쓰다듬고 계시네. 그런데 죽은 사람 손은 가시 손이라,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만져도 산 사람 몸은 상하지. 할머니가 ㅇㅇ이 걱정하지 않게 잘 지내야 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세월호에 대한 원고1를 쓰느라 관련된 글을 읽던 새벽녘 나는 책상 앞에 엎드려 몸을 부수듯 울었다. 고(故) 이수빈 학생의 어머니 박순미 씨의 인터뷰를 보고서였다. 박순미 씨는 주변의 만류로 팽목항 시신 안치소에서 아이 시신을 보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러 안산으로 돌아온 뒤에야 겨우 수빈이의 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와서 못 보면 한이 될 거 같았어. 내가 엄만데 왜 안 보여 주냐, 난 엄마라고. 우리 애기 눈 없고 코 없고 입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랬더니 (영안실에) 엄마 아빠 두 사람만 들어오라고 해요. (…) 수빈이 손을 잡으려 했더니 장의사가 내 손을 치는 거야. 안 된다. 왜 안 되냐. 아이 상하는 거 싫죠? 지금 만지면 아이 상합니다. 나는 수빈이 얼굴도 못 만졌는데 너무 속상했어요. 지금 후회하는 게 왜 천을 확 벗기지 못했을까. 아이 상한다는 말에 만질 수가 없는 거야.”2


한편 어떤 몸들에게 훼손의 아픔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공포로 남는가. 다친 기억을 흉터로 지닌 영(靈) 여럿이 주위를 맴돌면서도 정작 내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던 날도 있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한 포럼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불면증으로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채 이른 새벽 새마을호를 타고 광주에 도착했다. 호흡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편도와 비강이 부어 알러지비염약과 감기약을 먹어야 했는데 생리를 미루기 위한 경구피임약을 비롯해 기존에 먹던 약들이 이미 많아 크게 괴로웠던 기억이다. 첫날 저녁 일정을 마치고 나니 한 마디도 더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단체에 양해를 구하고 저녁을 혼자 대강 먹었다. 잠을 자고 싶어서 몸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술까지 마셔 보았지만, 또 거의 자지 못했고 아침에 시계를 보며 잠시 119를 부르는 상상을 하다 포럼 장소로 향했다.


깨어 있을 때면 입에 늘 물고 있던 커피도 없었으므로 시간이 흐른다고 정신이 차려질 리 만무했다. 여름이었는데 몸이 안 좋아 그랬는지 냉방이 잘 되어 그랬는지 몹시 춥고 계속 소름이 끼쳤다. 잠든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쪽 바닥에서 피가 흘러와 가까이 고이더니 곧 잘린 팔다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나는 평소 귀신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봤다고 놀라서 깽 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는 스스로 아주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어차피 아무것도 안 된다는 느낌이었다. 곧 누가 아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결코 내게 닿으려 하지 않았고, 대신 그들은 자꾸 내 필통을 만졌다.


처음에는 만년필에 닿으려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옆자리 참석자가 펜을 빌리려는가 하고 돌아보았지만 나는 뒷자리 구석에 앉아 있었으므로 옆에 아무도 없었다. 조금 있으니 누가 또 만년필을 만지다 슬그머니 필통에 손가락을 걸어 자기 쪽으로 끌어갔다. 내가 다시 내 쪽으로 끌어오니 이번에는 그 손이 내 노트로 다가왔다. 나는 일정이든 메모든 일기든 한 노트에 적기 때문에 어쨌든 누가 남의 일기를 보는 것은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 노트도 슬그머니 팔꿈치로 눌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 끝에 필통을 그들 쪽으로 조금 밀어주었다. 그러자 곧 필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내 약간 졸기 시작했고 그 잠이 너무 달콤해 푹 빠져들었다. 기묘한 평화와 공존이 얼마간 이어진 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다시 양해를 구하고 함께하는 점심 자리에서 빠져 혼자 카페를 찾았다.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커피를 둘 다 시켜 번갈아 마시고 동물 모양 쿠키도 먹었다. 그러는 동안 메시지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 미섭이 지금 내가 있는 건물이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전남도청과 경찰청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음을 알려 주었다.


미섭은 그 영들로 추정되는 존재가 만지려 한 물건이, 그러니까 내가 그들에게 내어준 물건이 필통이라는 사실을 기꺼워했다. 그 이유는 나도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미섭도 필통에 관한 아프고 귀여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미섭은 갑작스러운 공황 증세로 괴로워했다. 지안이라는 친구가 미섭을 도우려 했지만 공황에는 하임리히법이나 인공호흡 같은 게 통하는 것도 아니라 막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고. 그러다 가방에서 인형 같은 재질의 필통을 꺼내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미섭아 혹시 내 필통 만질래? 푹신푹신해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날 내가 포럼에 들고 간 필통은 딱딱했고 그냥 하얀색 네모였다. 나는 그게 미안해서 굳어진 청포묵 같은 필통을 밀어주며 바람까지 잡았다. ‘이런 필통 처음 보시죠. 저도 이번에 사면서 아트박스에서 처음 봤어요.’ 조금 뒤에 또 물었다. ‘그때는 이런 필통 없었죠?’ 나는 거의 강요하듯 물었다. ‘솔직히 신기하시죠?’


그들이 내 필통에 집중하느라 잠시라도 아픔을 잊기를 바랐다.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통하던 방법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던 어느 날엔가 치매에 걸린 노인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도록 그녀가 기억하는 몇 가지 사실 중 하나를 (“일본어로 꽃이 뭐예요?”) 반복해서 물어봤던 기억. 대답을 들을 때마다 침대 위에 먼지처럼 내려앉던 창백한 슬픔들. 내가 자꾸 꽃이 뭐냐고 물어 대니 한 번은 그 할머니가 대답 대신 자기 이불을 가리켰다. 꽃무늬 이불이었다. 수없이 많이 수 놓인 색색의 꽃들 가운데 할머니가 가리킨 꽃은 노란 꽃이었다. 그것은 나와 할머니의 중간에 피어 있었다. “아, 이게 꽃이구나!” 내가 웃자 할머니도 손가락으로 그 꽃을 만지며 웃었다. 나도 손가락을 내밀어 그 꽃을 만지며 조금 더 웃었다. 곧 할머니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건 우리가 이 장면을 다시 연습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할머니가 아프다고 말하며 울먹거렸다. “할머니, 이게 일본어로 뭐였죠?” 나는 방금 전까지 함께 만지고 있던 그것을 계속 만지며 물었다. 할머니는 내가 짚은 노란 꽃을 보더니 잠시 병자의 표정에서 학자의 표정으로 골똘해졌다.


“하나(花, はな).”


정작 나의 할머니가 치매로 아플 때 나는 그 곁에 없었다. 아프다는 몸을 주물러준 사람은 동생이었다. 자기를 키워 준 할머니가 해준 일 모두를 동생은 할머니께 돌려드렸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동생은 어지러워할 때에는 슬퍼하지 않았다. 어지럼증을 앓을 때에는 슬픔을 잊어버렸다. 어쩌면 그걸 앓을 때에만 그랬다.


상한 몸은 끝까지 사랑하고 사랑받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인지도 모른다. ‘다칠 상(傷)’안에는 해와 빛을 뜻하는‘양(?)’자가 있고, ‘상줄 상(賞)’ 속‘尙(오히려 상)’은 집과 창문을 함께 그린 글자다. 사는 동안 내게 찾아들 상처들을 창 너머 해를 쬐듯 기꺼이 앓을 수 있을까. 나는 남은 커피를 두고 포럼장으로 돌아갔다. 책상 위에 펼쳐 두었던 필통을 닫아 노트와 함께 가방에 집어넣고선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과 닿는 몸이 나이기를, 그들이 하나의 나를 만지기를 바랐다. 잠시라도 좋으니 맞닿고 싶었던 차가운 손가락의 창백한 주인들. 그러나 포럼장은 이제 따스했고 활기로 웅성거렸다. 그들은 이미 여기 없었다. (아니, 내가 이제 거기 없었다.) 다만 늘 경계 너머로 피는 하나의 해가 있어 길고 무수한 손가락으로 전부를 어루만졌다.



1 현호정, 「제심(齊心)」, 『계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 그렇게 우리는 10년을 살았다』, 문학동네, 2024. 

2 오준호, 『세월호를 기록하다』, 미지북스, 2015, 12쪽. 


#eBook
3의 댓글
User Avatar

tigerabc

2024.07.11

@일부 지역에서 굿이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으로 신령숭배 전통이 나타나도, 이를 무속신앙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도교나 불교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다만, 역사와 자격같은것을 도외시하는, 유교에 토대한, 시중의 변질행태로 인식하는 객관성을 가지시면 됩니다. 공식적 자격이 없는 행태! 정부에서 탄압하면, 대부분 소멸되고, 지방기구가 강하게 탄압하지 않아왔으면 그대로 민간신앙으로 유지되는 과정을 가져온, 유교토대 무속신앙입니다. 왕조가 망하면, 해당왕조의 지배층이 거행하던 각종 유교제사를 거행하지 말아야 하는데, 후발 왕조가 제지하지 않고 탄압하지 않으면, 민간신앙 형태로 변질되어 유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도교와 불교 신분으로 무속신앙의 접신 행태를 보이면 아무 효능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이와 별도로, 고대의 전통으로 보면, 유교 경전 논어 팔일(八佾)에서는 공자님이전부터 섬겨온 아랫목 신(안방신), 부엌신등을 섬기는 전통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신명 섬기기에 대해서, 공자님도 오래된 관습으로,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관습을 존중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신명(神明:천지의 신령)모시기 전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유교가 공식적이고, 유교 경전에 그 절차와 예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유교경전 예기에는 상고시대 조상신의 위치에서 그 혼이 하늘로 승천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최고신이신 하느님[天(하느님, 하늘(하느님)]하위신의 형태로 계절을 주관하시는 五帝가 계십니다. 유교는 하느님(天), 五帝, 地神, 山川神, 부엌신(火관련)숭배등 수천년 다신교 전통이 있어왔습니다.불교나 법사의 이름으로 무속신앙을 행하는것은 잘못이며 유교와 전혀 관계없습니다. 마을의 무속신앙은 유교전통.

https://blog.naver.com/macmaca/223464014560
답글
0
0
User Avatar

tigerabc

2024.07.11

수천년전부터 행해지던 하늘숭배,하위神숭배등 한나라 이전의 始原유교가 먼저 성립되었습니다(학문적으로는 큰 범위의 先秦儒學시대). 이후 殷.周시대의 하늘숭배.神明숭배.조상숭배와 교육을 계승하신 공자님의 가르침인, 先秦儒學의 儒家사상이 성립되었습니다. 한나라 국교가 되고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가 되기전의 하느님숭배, 神明숭배, 조상신 숭배.교육등은, 한나라이후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님의 儒家사상을, 국교로 하고,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수천년동안 계승해 왔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각종 제사와 명절을 주관하고, 24절기를 기념하며, 유교 교육기관을 세우고, 지방의 국가기구.공적 단체, 전국의 門中.가족들이 유교 명절과 제사를 이어왔습니다. @조선시대 강신巫가 탄압받은건,제후인 조선국왕의 산천제사 영역을 침해하게 되어, 시중에서, 산신령에게 제사하였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원래 중국에서 천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모든 제사를 다 치를수 있었고, 제후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지 못하는대신, 산천제사부터, 조상제사까지 치를수 있었고, 大夫와 士는 신분에 맞게 묘를 세우는 조상제사, 庶人은, 廟를 못세우고, 寢에 제사하도록 하였는데, 한국 고대부터 고려때까지는, 임금이 제천의식을 행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대의 제천의식을 치르는 왕은 제사장(신라시대 제사장, 남해왕이 巫)의 형태.그런데, 원나라시대, 중국 천자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고려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바꾸게하고, 조선시대에도 성균관으로 사용함. 조선은 명나라를 확실한 천자국으로 받들면서, 제천의식을 포기하고, 산천제사, 사직제사, 종묘제사, 공자님제사권한만 가지게 됨.

@유교는 음식을 바치는 제사(설날.추석때의 차례는 조금 다름), 음식을 바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수천년 인류전통에서, 인류가 죽고, 굶주리고, 병들고, 재난을 당할때, 하느님의 초월적 존재를 체감하여, 동아시아는 세계종교 유교, 서유럽은 세계종교 가톨릭을 형성하여 수천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tigerabc

2024.07.11

@무속신앙이라는 신앙이 자체로 성립한적은 없었고, 조선시대에, 중국 명나라 제후국으로 살 때, 조선 왕의 산천제사 자격을 침해하게 되어, 탄압받아와서, 신분이 높지 않은 가문출신의 무자격자들이, 강신巫로, 활동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무자격 강신巫들을 강하게 탄압했습니다. 현대에, 불교국가가 된, 일본 영향을 받아, 무자격 강신巫들이, 타로나 주술을 행하는것은, 아무 자격도 없고 효험도 없는, 일본발 사이비 풍속입니다. 전통적으로, 마을굿 하는 무속인들은, 신라시대의 화랑들이, 보급시킨 형태로 보여지는데, 신라가 고려에, 자진해서, 나라를 넘긴이후에는, 과거의 마을굿, 산신령제사등이, 고려 정부의 탄압없이 행해지다가, 조선시대에 아주 강하게 탄압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대의 왕족.왕녀, 신라시대의 화랑출신들이 유지하여 오던 마을 굿등이, 제천의식을 치르던 고려시대까지는, 국가의 탄압없이,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다가, 고려시대이후에는 화랑제도도 소멸해 버렸습니다. 필자는 성균관대 출신입니다. 무속신앙은 수천년 왕조시대중, 후발 왕조가 탄압하지 않고, 방임히면, 그대로 민간에서 행해져 온, 유교토대 민간신앙입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별도로, 무속신앙이 성립된적은 없었고, 단지 유교에 토대한, 변질형태의 민간신앙에 해당됩니다. 수천년 왕조시대 전통을 승계한 공식적인 유교제례로는,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 성균관대, 성균관, 향교.서원등의 제례가 있고, 조상을 숭배하는 전국의 門中제사, 가족제사, 설날.추석.대보름.단오.한식.동지의 제사, 명절의식들과, 국화철의 중양절, 상강이후 단풍철 행사등,주요 명절들의 절기의식, 24절기 의식등이 전통적 유교제례입니다.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후에 형성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공적기구에서 제사를 주관하면 현대적 정치체제하의 유교제례에 해당됩니다. 이와달리, 민간단체에서 전통 유교제례를 주관하면 무속신앙(본질이 유교임은 不變)으로 분류하는게 적당합니다.
답글
0
0
Writer Avatar

현호정(소설가)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 『삼색도』 등을 썼다. 2020년 박지리문학상, 2023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