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2017년 11월 15일을 기억하는가.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일으킨 포항 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지진은 우리에게 생소한 자연 재난 중 하나다. 태풍이 지나가고 한파와 폭염 있는 대신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나라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2017년 포항 지진은 규모 5.4로 한국에서 지진 관측이 시작된 이후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수능이 연기될 정도였는데, 지진이 발생했을 때 그리고 지진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던 포항 지진을 다시 돌아보게 된 건 지난 5월 4일,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라는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날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1 는 두 개의 재난 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리슨투더시티는 2009년부터 지속 가능한 도시 전환을 위해 활동하는 미술, 디자인, 건축, 영화, 인문학, 도시계획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인 콜렉티브다. 이날 행사에서는 올해 1월 1일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 반도에서 발생한 지진을 다룬 <재난 이후(After the Disaster)>와 2017년 포항 지진을 다룬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Leave No One Behind)>가 상영되었다.
여기서 리슨투더시티는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포항 지역 장애인 대부분이 대피할 수 없었다는 현실에 주목한다. 왜 이들은 남겨질 수밖에 없었는가? 이 영화는 장애인들의 재난 경험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들은 지진이 일어났다는 경보나 알림을 들을 수 없거나, 경보를 들어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는 혼자 움직일 수 없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거나, 휠체어를 타고 체육관 등의 대피 장소에 진입할 수 없거나, 장애인 이동 차량을 구하지 못해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지 못한 채 있어야 했다. 일상에서 확보되지 않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은 재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쳐오는가? 지진, 허리케인, 폭우, 폭염과 같은 자연 재난을 상상해 보자. 갑작스럽게 건물이 흔들리거나 꼼짝할 수 없게 많은 비가 내리면 누구도 쉽게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종류의 재난을 마주하게 되면서,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자연 재난이라 해도 재난의 영향이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재난의 불평등함을 겪었고 알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우리는 매일 늘어나는 확진자 수뿐 아니라 요양병원, 콜센터, 물류센터 등에서 발생한 집단감염을 목격했다. 누구나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지만,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고 감염 이후에 치료받거나 쉴 수 있는 환경은 너무도 달랐다. 같은 작업복을 여러 사람이 돌려쓰거나, 칸막이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전화를 받아야 하거나, 바이러스 감염을 이유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른 사람들이 있었다. 2022년 한여름에 내린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반지하 침수 사건은 우리 사회의 주거 불평등이 재난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처럼 재난은 한 사회의 불평등과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허술한지 재난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재난의 불평등함을 늘 상기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재난 이후에도 여전히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으며,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재난을 염려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를 통해 재난 이후 사회의 회복을 위해 변화가 필요한 지점이 어디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재난의 불평등함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재난 대피 체계와 매뉴얼에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장애인들의 사회적 관계 부재임을 강조한다. 재난이 발생해도 함께 대피하거나 구하러 올 친구나 이웃이 없다는 것이다. 지역 공동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사회 연결망과 공동체의 중요성은 일찍이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도 책 『폭염 사회』에서 밝힌 바 있다. 1995년 7월 13일 시카고의 온도는 41도, 체감온도 52도까지 올랐다. 사흘 연속 38도를 넘는 폭염이 이어졌고, 일주일 만에 739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에 대한 면밀한 조사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립과 불평등 탓에 사망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사망자가 매일 혼자 집에만 있고, 병이 있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고, 냉방 장치가 없고, 교통 시설이 불편하고, 가까이에 지인이 없는 환경에 살고 있었다. 사회적 고립이 폭염 재난의 원인이었음을 밝히며 클라이넨버그는 고립을 예방할 수 있는 공적 장소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17년 포항 지진과 1995년 시카고 폭염. 다른 시기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재난이지만, 재난 이후 어떤 방향으로의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해 같은 답을 보여준다. 누구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는지를 알려준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오지 않기에 ‘누구도 남겨두지 않기’ 위해 우리는 두터운 사회 안전망과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박진영(환경사회학 연구자)
환경사회학 연구자.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같은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지식 정치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환경과 보건의 교차점에서 과학기술, 사회운동, 정치를 주제로 연구한다. 저서로 『재난에 맞서는 과학』,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공저), 『재난공동체의 사회적 연대와 실천』(공저)이 있고, 《한편 13호 집》에 글을 실었다.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공해와 지역 환경재난을 사례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