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의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 ‘출판도시’란 이름의 ‘책공장’
지금 그곳은 ‘출판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책공장’이다. 출판의 근간을 단절이 아니라 연결에서 찾는다면, 출판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저자와 서점과 독자 곁이지 다른 곳이 아니다.
글ㆍ사진 김영훈(출판 편집자)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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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잎사귀, 높지 않은 건물들 위로 보이는 쾌청한 하늘. 파주에서 일하는 지인들이 SNS에 올린 사진들을 보며 봄의 도착을 확인한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면 예쁘기만 한데, 파주 출판도시를 일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늘 불편한 감정에 휩싸인다. 어떤 감정이냐면, 지도 앱을 켜고 집에서 파주 출판도시까지 ‘길 찾기’를 했을 때 느껴지는 바로 그 감정이다. 도대체 누가, 왜 여기에 출판사들을 모아 놓았나 따져 묻고 싶어지는.


출판도시는 어찌하야 서울 도심에서 한 시간은 족히 떨어진 경기도 외곽, 그것도 엎어지면 임진각이 코앞인 파주에 자리하게 되었나. 출판도시가 만들어진 과정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이야기가 군데군데 묻어 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파주는 출판도시 후보지가 아니었다. 출판도시를 구상하던 초창기, 제일의 후보지는 단연 일산 신도시였다. 1989년 9월 5일 한국출판문화산업단지 건설조합 발기인대회를 다룬 기사는 당시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오는 95년까지 경기도 일산에 약 15만평 규모로 조성될 출판타운은 출판업을 중추생산기능으로 하고 유통관리기능과 함께 교육시설·박물관·의료시설·사원주택 등 복지기능을 고루 갖추게 된다.     (『출판저널』, “‘위대한 책의 시대 창출’ 선언” 중에서)


하지만 ‘일산 출판도시’ 계획은 곧 철회된다. 신도시 개발계획 지연과 지가 상승으로 토지 매매에 실패한 것이다. 이후 건설조합은 마땅한 다른 후보지를 찾지 못했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며 도움의 손길을 구한다. 유통구조 개선, 임대료 문제 해결, 창고 개선을 위해 출판도시 건설이 꼭 필요하다는 출판사들의 절절한 요청에 대한 정부의 답이 바로 파주였다. 그간 군사 지역으로 묶여 개발되지 않았던 습지, 파주 문발리에 출판도시가 건립된 배경이다.


출판도시를 계획한 이들의 포부는 담대했다. 앞서 언급한 건설조합 발기인대회에 참가한 112명의 출판인은 발기인선언문을 채택하는데, 거기엔 지금은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출판에 대한 고고한 의지와 확신, 출판산업 발전을 기대하는 낙관, 다가올 미래에 출판이 맡을 역할에 대한 희망이 가득하다. 선언문에서 그들은 출판도시 건설을 ‘역사적·시대적 요구에 대한 출판인의 주체적 대응’으로 정의하고, 앞으로 출판도시가 아래 다섯 가지 역할을 하게 되리라 장담한다.


  1. 출판문화산업의 획기적 발전을 이끌 현대화와 과학화
  2. 출판물 유통질서의 현대화 제고
  3. 문화행사 개최를 통한 문화 창출의 중심
  4. 국제적 문화공간으로서 민족문화의 세계화
  5. 출판문화 창출작업에 나서는 모든 일꾼의 인간다운 삶의 공간


이제 다시 고개를 들어 오늘날 출판도시를 보자. 과거의 포부는 햇볕 아래 책처럼 모두 파랗게 빛이 바랬다. 이름만 ‘도시’일 뿐 편의시설 무엇 하나 제대로 고려되지 않은 산업단지. “교육시설·박물관·의료시설·사원주택”은 지금도 찾아볼 수 없고, 이채 사거리 상권은 언제 방문해도 황량함만 감돈다. 대형 병원은커녕 하나 있던 약국마저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가 괴담처럼 들리고, 올해 초엔 퇴근 시간대 통근버스 운행까지 조용히 축소됐다. 힘겹게 파주로 출근해야 하고, 혹시나 아프면 바삐 서울로 나와야 하는 셈이다.


사무실을 파주로 옮긴 고용주들 역시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파주 출판도시의 건설 과정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출판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사회고발 다큐와 다름 없다. 송영만 효형 출판사 대표는 파주로 회사를 옮기면서 ‘숙련된 출판노동자’가 적어도 절반 이상은 퇴사했다고 말한다. ‘북한산 결의’의 구성원인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주차장 부족, 소음과 먼지 문제 등 출판도시의 고질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낙관주의가 도시 구성의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아무래도 파주 출판도시는 실패했다. 증거는 도처에 있다. 일부 출판사는 파주와 서울 사무실을 동시에 운영한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파주 안 출판노동자는 ‘탈파주’를 꿈꾸고, 파주 밖 출판노동자는 파주만은 갈 수 없다 고개를 젓는다. 출판도시를 통해 개선한다던 출판 유통구조의 경우 (2017년 송인서적 부도가 보여주었듯) 현대화는 고사하고 도산 위기에 있다. 이기웅 파주출판도시 명예 이사장은 출판도시의 궁극적 지향이 “인간성의 회복”이라 공공연히 말했으나, 지금의 출판도시에서 인간성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


지금 그곳은 ‘출판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책공장’이다. 출판의 근간을 단절이 아니라 연결에서 찾는다면, 출판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저자와 서점과 독자 곁이지 다른 곳이 아니다. 36년 전 유수의 출판인이 북한산에 올라 ‘북한산 결의’를 다지고 건축가들과 ‘위대한 계약’을 맺어 지금의 출판도시를 만들었으나, 그 결과물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덩어리로 남았다. 출판도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다음을 이야기할 우리의 결의가 절실하다.



참고자료

“‘위대한 책의 시대 창출’ 선언”, 출판저널, 47권 11호, 1989 

김종신·정다운,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기린그림, 2022



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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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ct0327

2024.05.22

하나 있던 약국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괴담도 아니고 사실이랍니다.....ㅎㅎ 약국이나 병원, 상권도 문제지만 편하게 갈 수 있는 서점이나 도서관, 야근하고 탈 대중교통이라도 제대로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늘 출판도시라는 기획의 의의가 뭘까 고민하면서 통근했는데 구상 단계에서는 저런 목표들이 있었다는 게 새롭네요. 구구절절 공감되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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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메

2024.05.21

내실 있게 일하는 건 정말 어렵지만 내실을 기하려는 움직임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게 화가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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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yoonha45

2024.05.20

출판도시가 파주가 아니라 일산에 세워질 뻔 했다는 이야기도 칼럼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어요. 왜 파주에 출판도시가 세워지게 되었는지, 하지만 현재 실태는 어떠한지 등등 이번에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저자와 독자와 서점 곁에 있으며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마음 속에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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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출판 편집자)

편집자. 서너 곳의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했다. 만들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한결같이 타이완과 홍콩을 사랑한다. X(트위터였던 것) @bookeditor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