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집] 가정의 달을 인간답게 보내는 방법
가족 안에서 인간다우려면 가족 밖에서도 인간다울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가족 없이도 인간다울 수 있어야 한다. 가족 밖의 삶은 물론이고 가족 안의 삶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라도, 인간다운 삶에는 가족 바깥의 준거가 필요하다.
글ㆍ사진 김대현
202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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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안과 바깥에서, 한국과 한국을 벗어난 자리에서, 혼자 그리고 여럿이, 우리는 이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채널예스에서 다양한 가족의 의미를 묻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1989년 UN총회에서 1994년을 세계 가족의 해(The International Year of the Family)로 정하고, 1993년 5월 15일을 세계 가족의 날(The International Day of Families)로 정한 이래, 2005년 시행된 건강가정기본법 제12조를 통해 위 UN의 결정이 ‘가정의 날’로 한국에 적용되었고, 이에 따라 5월이 가정의 달로 선포되었다. 이 법의 제3조에 따르면, 가족은 혼인, 혈연, 입양으로 구성된 “사회의 기본단위”이고, 가정은 그 가족구성원이 생계·주거를 함께 하며 부양·양육·보호·교육이 이루어지는 생활단위이며, ‘건강가정’은 이러한 가족구성원의 욕구가 충족되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정을 가리킨다. 2018년 1인가구의 정의가 추가되기는 했지만, 소위 ‘인간다운 가정’의 기본 골격을 가족(family)으로 보는 이 법의 시선은 동일하다.


법에 그렇게 써놨으니 과연 그 가족을 통해 거기에 구성된 사람들이 정녕 법대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많은 가족들이 별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가족을 가정으로, 가정을 건강가정으로 구태여 명토박은 이 법 또한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가족의 범주와 기능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 과연 실익이 있을지는 따져볼 문제다. 가족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은 한 사람의 인간다움과 욕구 충족을 오로지 가족에게만 매어둔 바로 그 이유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의 기능이 가족에 너무 매여있게 되면,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비인간적인 폭력도 가족이 구사하는 인간다움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을 사소한 일로 취급된다.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돌봄이 아무리 과중한 것이어도 그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으레 그럴 법한 일로 합리화되고, 반대로 가족 밖에서 일어나는 인간다움의 실천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에게 중요한 것이라도 가족을 통하지 않은 것이기에 어딘가 열등하고 모자란 것으로 치부된다.


가정의 달, 아니 ‘가족’의 달 5월을 맞아 우리가 사유해야 할 바는 다음과 같다. 가족 안에서 인간다우려면 가족 밖에서도 인간다울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가족 없이도 인간다울 수 있어야 한다. 가족 밖의 삶은 물론이고 가족 안의 삶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라도, 인간다운 삶에는 가족 바깥의 준거가 필요하다.


가족 바깥의 인간다움의 준거로 이 책이 드는 것이 돌봄이다. 물론 가족 안에서도 돌봄은 일어난다. 문제는 그 돌봄이 가족 안에서 일어나기에 더 귀하고 감사한 것으로 여겨지기보다, 가족 안에서의 돌봄이기에 일견 알아서 따라붙는 것, 들여다보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가는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 중에 알아서 저절로 굴러가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음에도, 그것이 그렇게 인식되는 것은 가족이 원래 그런 ‘감사한’ 일이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곳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가족의 일이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 즉 정의(情誼)가 아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정의(正義)로서 재단되어야 한다는 말이 이런 때 필요하다. 가족 내 돌봄 또한 정의로워야 하고, 그것이 정의롭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면 당연히 따라붙는다는 개념으로부터 돌봄을 떼어놓을 필요가 있다. “가족돌봄을 하게 한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피자는 이 책의 주장도 거기에 근접해 있다 (117쪽).


우선 가족 내 돌봄이 종종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이 책은 설명한다. 가족은 정으로 이어진 공동체라는 명목 하에 그 안의 다양한 불평등이 검토되지 않은 채 넘겨지기 쉽다. 가족 내 돌봄의 의무가 주로 정규직, 이성애 결혼, 주거독립을 달성하지 못한 가족구성원에게 할당되는 문제(294~295쪽), 가족 내 돌봄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가족의 권한은 다른 힘센 사람이 대리하여 행사하는 문제(293~294쪽)를 이 책은 지적한다. 돌봄에 관한 가족 내 남성과 여성의 인식 차이도 있다. 돌봄은 으레 여성이 해야 할 일처럼 인지되어온 탓에, 가족 내 여성은 일상적으로 숱한 일을 하고도 그것을 특별한 돌봄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가족 내 남성은 자신이 한 간헐적이고 사소한 일도 몹시 특별한 돌봄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193쪽). 돌봄을 주로 가족에 전담해온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고, 돌봄의 가족 책임을 어떻게 재편하고 “민주화”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102쪽).


가족의 틀을 넘어선 돌봄은 그럼 어디로 가는가. 국가와 사회가 돌봄을 전담시켜온 대표적인 곳이 가족이었다면, 그 다음으로 맡겨지는 곳이 주로 시설이다. 이는 한국 정부가 경제 개발과 성장을 이유로, 과거부터 국민의 복지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기보다 가족, 복지기관, 시설에 광범위하게 외주 주어버릇한 관행에서 비롯되었다. 과도하게 주어진 책임과 권한에는 과도한 부조리와 폭력이 따른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복지시설 내 감금과 사적 폭력의 문제는 가족과 국가가 공모한 돌봄의 시설 외주 문제가 연루돼 있다. 지금도 돌봄 관련 복지 예산의 상당 부분이 시설과 병원에 투여되는 실정이기에(51쪽), 시설에서 “탈시설”로의 전환이 내실있게 뒷받침되기 위해서는 최근 예산이 확보되기 시작한 “커뮤니티 케어” 등 지역사회 기반 돌봄 예산의 확보가 절실하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262쪽).


돌봄의 의무와 책임을 국가에 전담시키는 인식에 대해서도 이 책은 질문을 던진다. 물론 한국 정부는 앞서 설명했듯 복지의 의무를 외주 주어왔기 때문에,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돌봄에 대한 가치의 공공연한 인정을 부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돌봄이 필요한 취약 그룹들을 국가에 “버리”는 형태가 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131쪽). 시설 내 폭력을 고발하며 제창된 ‘시설화’의 개념 또한 돌봄의 책임을 가족과 시설과 지역사회가 서로에게 떠넘기는, 외주된 돌봄 의무의 폭탄돌리기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 정부·지자체가 직영해온 감화원, 부녀보호지도소 등에서는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행해졌고, 어떤 존재를 ‘보호’하고 ‘복지’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그 존재를 병들고 모자란 인간으로 취급한 역사가 분명히 존재한다. 최근 등장한 “국가돌봄”의 경우가 그렇듯, 돌봄의 국가책임을 생각할 때 자칫 아름다운 말들 속에 놓치기 쉬운, 사건으로서 존재하는 과거 사례들을 빼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 바깥의 돌봄을 상상하는 일에서 필요한 것은 이처럼 돌봄의 의무와 책임을 외주 주어버릇하지 않는 것이다. 가족과 시설과 지역사회와 국가에 속했다는 것으로 돌봄이 알아서 해결될 거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잘라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돌봄을 나와 내 곁의 사람을 위해 필요한 나의 일로 사유하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는 나와 내 곁의 사람들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돌봄에 경륜과 식견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돌봄받는 사람과 돌보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공정하고 윤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 대목에서 필요해진다. 가령 돌봄에는 돌봄 서비스를 통해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돌봄과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돌봄이 있다(140~141쪽). 전자의 경우, 돌봄노동자가 돌봄받는 이를 착취해서는 안되는 것만큼이나, 돌봄노동자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유로 오로지 돌봄 “소비자”처럼 굴어서는 곤란하다(159쪽). 후자의 경우, 돌보는 사람의 지나친 자기 희생이나 죄책감이 생기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고, 돌보는 사람 또한 자기 욕망을 갖고 잘 쉴 수 있어야 하며(190쪽), 돌봄받는 사람 또한 나를 돌보는 사람과 내가 어떻게 정의롭게 관계맺을 수 있을지, “돌봄받는 것에 대한 윤리”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157쪽).


이 과정에서 돌봄받는 사람과 돌보는 사람의 관계가 외부로부터 고립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관계 바깥의 “낯선 동료와의 관계, 우정의 관계, 우연의 관계가 들어설 자리”(59쪽)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가족 내 돌봄이 잘 일어나기 위해서라도 가족 바깥의 “공동체”와 그들과의 소통은 필요하고, 가족이 아닌 그러한 관계에도 제 이름과 그에 걸맞는 인정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그러한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때로는 그 관계가 곤욕스러울 때 ‘자기만의 방’으로 숨어들 수 있는 “은둔”의 상태도 때로는 필요하다(69~70쪽). 관계와 돌봄이란 잠시 쉬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한 사회 안에서 내가 내 나름의 자리가 있다는 장소안도감(居場所)의 체감과 연결될 수 있다(210~212쪽). 이렇듯 돌봄의 문제를 가족을 떠나 관계 일반의 문제로 사유하는 것은, 가족 안의 돌봄을 정의롭게 만드는 일임은 물론, 가족 밖의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돌봄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의 대담에 참여한 조기현 작가는 20대 때 인지저하를 겪는 부친을 간병한 ‘돌봄 청년’이고, 홍종원 의사는 방문진료 전문병원을 개소하여 지역사회 돌봄을 실천하는 의료인이다. 이 대담집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돌봄의 다양한 차원에 대한 내용이 망라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겪은 현장에서의 돌봄 경험과 실무가 행간에 잘 묻어나 있고, 그것은 “내 안에서 미약하게 떨림으로 존재하는 것들”(61쪽)을 포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나에게 당장 체감되지 않는 일이 상위의 의식으로 굳건하게 나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책의 말미에서 조기현 작가는 인지저하(속칭 ‘치매’) 환자를 돌보기 위한 방법론으로 ‘휴머니튜드 케어’를  소개한다. 인지저하 환자를 무조건 결박하는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인지능력이 취약해진 점을 고려하여 환자 스스로 제 나름대로 주위 상황을 환기하고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돌봄의 기법이다. 작가는 그 12년의 돌봄 과정에서, 내가 스스로 약해서 휘청거릴 때 “내가 먼저 나를 잡아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338~339쪽). 나이듦과 질병의 공포를 누군가에게 외주 주지 않고, 그것으로 필요해질 돌봄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강단으로 읽혔다. 그러한 돌봄과 깨달음은 작가와 작가의 부친이 가족이기 때문에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가정의 달 5월에 가족이 있다고 쉽게 안도하거나, 가족이 없다고 쉽게 절망할 사람들에게 정녕 필요한 돌봄에 얽힌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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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가족구성권연구소의 운영위원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