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 “과거의 재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재난 이후에 꿀 수 있는 희망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재난을 잊지 말아야 하죠.
글ㆍ사진 신연선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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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난 사회, 재난을 경험한 사회에서 우리는 커다란 과제를 품게 되었다.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사회학자 노명우 작가는 이 커다란 질문 앞에서 ‘기억’이라는 문제를 꺼내 들었다. 각자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사회적인 책임감을 갖고 재난을 기억한다면 닮은 꼴의 재난이 반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쉽게 잊고 비슷한 일은 반복될까요』는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 한국 사회가 놓친 것과 바라봐야 할 것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사회적 참사를 통해 짚어간다. 노명우 작가는 그 뼈아픈 과정, 기성 세대와 미래 세대 모두가 재난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기억하는 일에서 변화가 시작됨을 역설한다. 끈질기게 기억하기, 변화는 거기서 시작될 것이라고.


사람이 인격을 갖추며 성숙하듯,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도 성숙을 통해 더 나아져야 합니다. 밝은 면만 본다고 세상이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좀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면 어두운 면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어두운 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어둠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27쪽) 



책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


다시는 ‘안녕’하지 않음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안녕’하지 못했던 과거를 기억하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9쪽)라고 하셨어요. 

보통 책 작업을 할 때, 제가 출판사에 제안을 하는 편이었는데요. 이번 책은 유일하게 반대의 경우였어요. 편집자께서 저한테 메일을 주셨던 건데요. 그것이 여느 제안 메일과 달랐어요. 의례적인 제안 메일이라기보다, 요청 메일 자체가 한 편의 에세이처럼 읽히더라고요. 굉장히 감동을 받았죠. 하지만 당장 수락하지는 못했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원고를 쓸 수 있는 기간이 짧았고요. 두 번째 이유는, 일정상의 문제보다 더 중요했던 이유인데, 저에게 자격이 있는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됐던 탓이에요.


책을 쓸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제가 유가족 분들이나 ‘4.16재단’에 관련된 분들처럼 지난 10년동안 꾸준히 진상 규명을 위해 투쟁해온 사람이 아니니까요. 저도 10년 전에는 잊지 않겠다는 말을 했던 사람 중 하나이지만, 알게 모르게 잊고 살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출간 제안을 받으니 과연 책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이 들었어요.


끝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궁금해지는데요. 

그런 저런 고민으로 답을 못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편집자께 다시 간곡한 요청 메일이 왔어요. 역시 그때도 자격이라는 문제로 망설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머리를 감다가 10년 동안 우리가 뭘 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10년 전에 세월호에 관해서 여러 방식으로 표현을 했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들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지더라고요. 여전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요. 오히려 그 점이 저의 10년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그렇다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다른 원고 일정들을 일단 미루고 이 책 작업부터 해야겠다 생각해서 쓰기 시작했어요.


말을 거는 것 같은 문장의 톤에 눈길이 가는데요. 쓰실 때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셨던 건가요? 어떤 상상의 독자가 있었던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짙어지는 생각은 정말이지, 미래 세대는 우리가 가졌던 시대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다르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책을 우리보다 살 날이 많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써야겠다 생각했어요.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 책이 저에게는 반성의 계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저 또한 살면서 잊고 지낸 때가 있었고, 일상에 묻혀 살았으니까요. 그러한 반성의 측면에서 쓰다 보니 말을 거는 방식에 있어서는 설득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했어요. 우리 함께 반성해 봅시다, 말하고 싶었어요. 요즘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요. 예전에 비해 정치에 희망을 거는 분위기도 많이 사라졌고요.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것에 대한 담론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공동의 미래가 있지 않을까, 언제까지 체념만 할 것인가, 우리가 꿈꾸고 품고 있었던 희망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끄집어내면 좋겠다, 하는 염원이 마음속에 있었어요. 그것은 누구보다 저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고요.



100년, 200년 프로젝트가 될 수도 


미래 세대 말씀을 하셨는데요. “기억의 시제는 미래여야”(9쪽) 한다는 문장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이 떠올라요. 기억이란 과거에 머무르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문장이었거든요. 

그동안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어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재난인데 그런 재난이 거듭 발생했어요. 우리가 재난 이후에 꿀 수 있는 희망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재난을 잊지 말아야 하죠. 재난이 소중해서가 아니에요. 재난을 망각하지 않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재난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재난을 계속해서 돌이켜 보고 기억하려고 하는 건 반복되지 않는 세상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요. 그런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기억의 시제가 미래라고 표현했던 거예요.


책을 쓰며 품었던 염원은 결국 미래가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기도 하겠네요. 

지난 세기에 일어났던 재난을 정리하면서 저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지난 100년동안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어떻게 이토록 유사한 일이 반복되었을까 싶었어요.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를 깊이 반성한다고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인종 청소의 형태만 해도 한두 가지로 말하기 힘들 정도죠. 이것은 2차 세계대전 때만 있었던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고요. 현재에도 어디선가는 되풀이되고 있어요. 사실 저는 막연하게 부모님 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요. 너무나 제 중심적으로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니 우리가 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 결코 나아진 세계를 살았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과거는 완전히 달라 보일 수 있어요. 우리가 비판적으로 역사를 승리자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재난에 연루되어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갖기 마련이거든요.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던 자의적인 해석이었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많이 반성했죠.


재난을 꾸준히 기억하고, 거기에 나 또한 연루되어 있다고 느끼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고 불편한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 그리고 승자의 이야기로 역사를 바라보는 편을 택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요. “만약 우리가 밝은 면만 본다면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25쪽)이라고 하셨잖아요. 기억하는 행위가 그저 아프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20세기에 발생한 재난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삐딱해서가 아니에요. 다른 미래를 원한다면, 달라지고자 한다면 불편하더라도 과거에 있었던 불행한 사태를 있던 그대로 보는 시간을 거쳐야만 하거든요. 어떻게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까에 관한 실마리는 그럴 때에야 비로소 찾아낼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어요. 때로는 너무 불편해서, 깊이 들어가면 너무나 커다란 문제가 드러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죠. 어떤 재난이 발생하면 미디어가 집중 조명을 하긴 하는데요. 그렇지만 끈질긴 파헤침은 없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적당한 수준에서 기억하고, 적당한 수준에서의 사태 수습책을 내놓는 방식이 재난이 되풀이되게 만든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얕은 기억’과 ‘깊은 기억’을 구별한 것도 그 이유였어요. 지금까지의 기억이라는 건 얕은 기억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깊게 들어갈 때에야 끈질긴 기억이 나와요. 재난을 만든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어떤 한 가지 정책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파고 들어면 엄청난 칡뿌리 같은 게 있고요. 그것은 잡초 뽑듯이 간단히 뽑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기억이 끈질긴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깊은 기억으로 돌아가서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낸 상태와 마주해야 해요. 그러니까 뿌리가 다 사라질 때까지 노력하려면 100년, 200년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다시 미래 세대예요. 

끈질긴 기억을 완수하는 것을 우리 세대가 다 못 할 수도 있거든요. 따라서 이 기억이 미래 세대에게도 이어져야 하겠죠. 만일 우리가 그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채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미래 세대가 이 기억을 물려받아서 뿌리를 제거하려고 애를 써야 할 거예요. 이 책이 중학생부터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어요.



책임은, 마음의 불편함을 감당하는 것 


관련해서 문제의 깊은 뿌리를 캐내려면 ‘잠정 국면’과 ‘전조 국면’까지 다 파악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재난이 발생하면 미디어 등을 통해 특정 사람들이 악마화 돼요. 의인화를 시켜버리면 쉬우니까 재난을 선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건데요. 그에 비해 재난 이전의, 잠정 국면에 있었던 재난의 뿌리를 규명하는 과정은 사람들에게 선뜻 선명하게 다가가지 않죠. 매력적이지 않은 거예요. 가령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 인물을 악마화 하는 데 관심이 몰렸거든요. 박근혜가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기억이 더 깊은 쪽으로, 전조 국면과 잠정 국면으로까지 가지 못했다는 의미예요.


잠정 국면으로 깊이 파고 들면 이윤 중심의 사고가 어떻게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는가, 하는 부분까지도 보이죠.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 중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노후 선박에 대한 규제 완화잖아요. 규제가 완화되지 않았다면 세월호는 운항할 수 없었을 거고, 그랬다면 학생들은 다른 배를 탔을 거고, 침몰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신자유주의적 사고, 경쟁력 강화라는 허울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만드는가에 대한 사회적 환기까지 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냥 몇 인물들을 악마화하는 것으로 끝나고,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더 깊어지지 못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라는 재난의 원인을 거슬러 가보면 2008년에 시행된 노후 선박 규제 완화까지 가고요. 그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물들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까지도 따지게 되는데요. 그 지점에 이르면 어쩌면 나도 유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쉽게 구경의 대상으로서, 살아남은 자로서 어떤 사람을 욕하고 악마화 하는데요. 잠정 국면까지 확대를 해보면 내가 그 사태에 연루돼 있다는 걸 알게 돼요. 매우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근데 그게 불편해요. 그때 양심의 문제라는 게 떠오르니까요. 그때 우리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경제 중심주의와 경쟁 위주의 분위기로 내달릴 때 우리가 다른 목소리를 냈더라면, 과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경제적 이윤뿐인지 진지하게 생각을 했었더라면, 하는 가정법이 계속 떠오르잖아요. 생각할수록 마음이 불편하죠.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은 마음의 불편함과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책임은 다른 게 아니라 마음의 불편함을 감당하는 것이거든요. 재난이 일어나기 전의 잠정 국면으로까지 가보면 우리가 직접적인 가해자를 심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역시 동조 혹은 방관을 한 부분이 있기다는 걸 알게 되고요. 때문에 포괄적 의미에서 양심에 기반한 죄를 다 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돼요. 사회가 형사 처벌할 사람은 처벌을 하고, 탄핵 받아야 할 대통령은 탄핵해야 하지만요. 책임에 대한 감각을 나 역시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저는 지금 그것이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책에서 시간에 지지 않고 끈질기게 문제 제기를 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러니까 깊은 기억을 다시 끌어내려고 노력했던 분들의 이야기 말이에요. 가령 노근리 사건이 그런데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요. 

과거의 사건을 정리하면서 저 역시 깨달았던 것이었어요. 어떤 억압이나 반격에 의해 애초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완전히 은폐되어 있던 것들을 나중에 알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을 우리는 잘 몰라요. 그러한 사건은 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뭔가를 해온 사람들 덕분에 수면 위로 올라온 거거든요. 노근리 사건 역시 오랜 기간 묻혀져 있었지만 끈질기게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들 덕분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가능했던 거죠.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무엇이든 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진상조사위원회 한 번 구성하고, 1년 후에 위원회에서 내용 발표하고 나면 진상이 규명됐다고 생각하는데요. 책임의 범위를 확장시켜 보면 진상조사라는 것이 1년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거든요. 진상조사위원회와 같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거기서 나온 결과로부터 우리가 아직 하지 못한 것이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끈질기게 보완해야죠. 그러려면 이것은 정말 기나긴 과정이 될 거예요.


많은 재난이 현재진행형인 이유고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 됐다고 하면 어떤 분들은 벌써 10년이 됐느냐고 말해요. 그러나 1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사람들 머릿속에 의문이 있잖아요. 왜 침몰한 것인지, 왜 못 구했던 것인지 여전히 명확하게 해명되지 질문이 있어요. 그것은 아직도 진상 규명이 안 되었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10년이 지났다고 해서 진상 규명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없는 거예요. 진상 규명이란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질문, ‘왜 그랬지?’ 라는 질문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죠. 벌써 10년이 아니라 이제 10년인 거예요.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재난과 한국의 재난을 연결하기도 하셨잖아요. 이 작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건네고 싶으셨나요? 

우리한테 재난이 많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말하고 싶었어요. 일종의 한국 폄훼론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이 문제니까 해결책은 한국을 떠나는 거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재난은 인간 보편의 문제거든요. 또, 재난을 일종의 성장통으로 이해하는 방식도 있죠. 예를 들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많은 경우 성장통으로 이해해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이죠. 그런 해석이라면, 사회가 잘 살게 되었을 때 재난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이 설득을 갖게 돼요. 이것이 신자유적인 사고와 맞물리면서 경제 위주의 사고를 하고요.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잖아요.


따라서 재난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그런 사고방식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장치로 선진국에서도 있었던 재난이나 야만적인 것처럼 보이는 재난을 한국의 재난과 같이 배치했던 거예요. 가령 2013년,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 붕괴 사태가 그렇죠. 그 일로 의류 공장 노동자 등 1,100여 명이 숨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는데요. 그것을 일국 중심의 책임감으로 여겨서는 안 돼요. 이미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다국적 의류회사의 옷들을 만든 곳이고요. 후쿠시마도 마찬가지죠. 이것을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일본을 민폐 국가로 여기고 말게 돼요. 우리가 후쿠시마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한 재난이란 그 나라의 문제일 뿐 아니라 지구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전지구적인 시선에 기반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세계의 재난을 함께 배치했어요.


다른 사회가 재난을 대하는 방식, 이후에 같은 재난이 발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체계를 만들어가는 장면도 중요하게 읽혔어요. 거기서 배울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1989년 발생한 힐즈버러 참사 사례에서 희망을 얻었어요. 힐즈버러 참사 유가족들이 끈질기게 투쟁을 했잖아요. 사실 경찰에게 사과를 얻어내는 것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끈질긴 유가족들의 투쟁 결과로 경찰이 사과했다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죠. 한국 사회는 세월호 이후에도 몇 번의 재난을 겪었는데요.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이런 장면을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죠.


더구나 힐즈버러 유가족들이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때 구체적인 연대의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두 재난이 거의 비슷한 메커니즘이었거든요. 희생자를 낙인화하는 방식이 힐즈버러에서 있었던 것처럼 이태원 참사에서도 있었어요. 이러한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힐즈버러 유가족들이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에게 연대한 것이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지난 시간이 지옥과 같기도 했지만 희망의 가능성 역시 있다고 생각했어요.


법적 처벌과 사회적 책임이 다르다고 말씀하신 부분도 뼈저리게 와닿는 부분이었어요. 심지어 법적 처벌조차 터무니없이 약한 수준으로 몇몇 관계자를 처벌하고, 그것만으로 재난의 진상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법적 처벌 외에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계속 물을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범죄 사실에 대한 형사 처벌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그건 그냥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죠. 왜냐하면 범죄 사실에 대한 형사처벌은 과거에 행한 행위에 대한 처벌이니까요. 과거에 일어난 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이 이루어진다고 유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형사 처벌은 재난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 장치가 아닌 거예요.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는 형사 처벌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요. 진상 규명에 의해 제대로 된 형사 처벌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유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형사 처벌은 출발인 거죠.


또 형사 처벌을 받은 사람이 법적 처벌을 면죄부로 삼아서도 안 돼요. 형사 처벌 다음에 사죄라고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우리 사회에는 사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가령 이태원 참사에 대해 경찰청장이나 대통령 등이 포괄적 의미에서 사회와 유가족에 대한 사죄 요청을 할 수 있어야죠. 진솔한 사죄 요청이 있어야 피해자가 용서를 할 기회도 있는 거거든요. 물론 용서를 강요해서는 절대 안 되고요. 사죄 요청 한 번으로 쉽게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요. 그러나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죄 요청을 하면 용서도 가능해져요. 용서가 왜 중요할까요. 역사에서 보면 과거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돼서 당했던 일을 똑같이 되풀이되는 메커니즘이 있잖아요. 그건 용서가 부재했기 때문이에요. 불행한 과거를 단절시키는 것이 용서이고, 용서의 전제 조건은 진정한 사죄 요청이에요.


인터뷰 첫 번째 질문이 “다시는 ‘안녕’하지 않음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안녕’하지 못했던 과거를 기억하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9쪽)에 대한 생각이었는데요. 책을 덮으면서 과연 재난이 되풀이 되지 않는 사회는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남았어요. 작가님은 어떤 답을 가지고 계신가요? 과연 그 날이 올까요? 

답이라기보다는 태도인데요. 그날이 온다고 생각하면 오고요. 안 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 올 거예요.(침묵) 사회 과학이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하지만요. 동시에 사회학의 또 다른 중심은 윤리의 문제예요. 이래도 괜찮은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죠. 이 질문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는 거고요. 그러고 나면 여전히 안녕하지 않으니까 안녕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게 돼요. 사회학이 해야 할 것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전형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적인 책이에요.


책의 인세를 기부하기로 한 데에도 변화에 대한 작가님의 지향점이 엿보여요. 

제대로 조직화되지 못한 피해자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게 4.16재단이었어요.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고 지원을 한 것도 세월호 유가족들이었죠. 이 책의 인세는 꾸준히 4.16 재단에 후원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개인이 무엇이든, 끈질기게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이와 같은 단체에 기부하는 것이니까요. 함께 해주시면 좋겠어요.



*노명우

아주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이러다 잘될지도 모르는 연신내 골목길의 독립 서점인 ‘니은서점’을 열고 세상에 알려져야 마땅한 좋은 책을 소개하는 마스터 북텐더다. 그러다 내친 김에, 세계적인 석학은 되지 못했지만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되고자 시민과 함께 공부하는 ‘생각학교’를 만들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언제나 닮고 싶은 학자이며 지그문트 바우만처럼 노인이 되어서도 글을 쓰고 싶기에 누군가 대표작을 물어보면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다음 책이라고 말한다.

2002년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아도르노와 쇤베르크』로 첫 책을 출간한 이후,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담은 『계몽의 변증법―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를 썼고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변증법적 상상력』을 번역했다.

시각문화와 예술사회학 그리고 미디어 이론과 관련해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아방가르드』 『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등을 썼고, 『구경꾼의 탄생』을 번역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이른바 자전적 사회학을 위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을 썼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학의 쓸모』를 번역했다. 골목길의 작은 독립 서점 니은서점의 책상에서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서점』을 썼고, 생각학교를 구상하여 이 책 『교양 고전 독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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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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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

아주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이러다 잘될지도 모르는 연신내 골목길의 독립 서점인 ‘니은서점’을 열고 세상에 알려져야 마땅한 좋은 책을 소개하는 마스터 북텐더다. 그러다 내친 김에, 세계적인 석학은 되지 못했지만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되고자 시민과 함께 공부하는 ‘생각학교’를 만들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언제나 닮고 싶은 학자이며 지그문트 바우만처럼 노인이 되어서도 글을 쓰고 싶기에 누군가 대표작을 물어보면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다음 책이라고 말한다. 2002년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아도르노와 쇤베르크』로 첫 책을 출간한 이후,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담은 『계몽의 변증법―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를 썼고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변증법적 상상력』을 번역했다. 시각문화와 예술사회학 그리고 미디어 이론과 관련해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아방가르드』 『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등을 썼고, 『구경꾼의 탄생』을 번역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이른바 자전적 사회학을 위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을 썼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학의 쓸모』를 번역했다. 골목길의 작은 독립 서점 니은서점의 책상에서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서점』을 썼고, 생각학교를 구상하여 이 책 『교양 고전 독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