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토크를 하러 광주에 갔다. 저녁을 먹기 위해 백반집에 들렀다. 일사불란하게 반찬을 퍼 나르던 식당 아주머니들의 눈이 곧, TV에 꽂혔다. ‘센세이션’이라는 자막 아래, 요즘 펄펄 날아다니는 기아 타이거즈의 유격수 김도영이 떠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아예 식당 의자에 자리를 잡아, 숨을 죽여 김도영을 바라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나는 지독한 NC 다이노스의 팬이다.)
전국이 야구로 들썩들썩하다. 올해 프로야구는 개막 한 달여 만에, 200만 관중을 돌파했다. 지금의 10개 구단 체제가 시작된 2015년 이후 최단기간에 거둔 기록이다. 인기리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의 여파, 서울 연고로 많은 팬덤을 보유한 LG 트윈스의 지난 시즌 우승,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의 복귀까지 맞물려서 올 시즌 야구장은 북적북적하다. 티켓팅이 ‘빡세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출간된 책 『인생 뭐, 야구』는 25년 차 스포츠 기자가 만난 야구와 사람 얘기다. 은퇴 선수들의 자서전, 야구 기자들의 시즌 안내서, 사회인 야구 체험기 등 각종 야구 서적이 넘쳐나는 가운데 『인생 뭐, 야구』는 점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저자 김양희는 몇 안 되는 베테랑 ‘여성’ 야구 기자다. 야구장에 가면 단연코 여성 관중이 많고(응원할 때의 함성으로 가늠 가능하다), 소셜미디어상의 관련 콘텐츠도 주로 여성들이 생산하지만 유독 야구 기사의 생산자는 아직도 남성이 많다. 그 가운데 저자는 “야구도 모르는 년이” 소리를 듣던 2000년대 초반에서부터 지금까지, 야구장 안팎의 기록을 부지런히 담당하고 있다.
여타 스포츠 종목보다 ‘헐하다’(?)는 의미로 ‘레저’라는 비아냥을 듣는 야구이지만, 『인생 뭐, 야구』에 적힌 야구는 제목처럼 인생 그 자체다. 인생을 두고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듯, 야구를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면 누가 ‘레저’라고 말하겠는가. 전쟁, 혹은 전쟁 같은 인생이지. ‘국민타자’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은 훈장처럼 곧게 펴지지 않는 왼쪽 팔을 갖고 있고, 마운드의 ‘어린 왕자’ 김원형 전 SSG 감독은 반복된 투구 동작 탓에 오른팔이 굽어 왼손으로만 세수를 한다. “프로야구 선수나 코치 태반은 야구를 하면서 기형적으로 변한 몸 때문에 평생 고통을 받는다”라는 한 코치의 전언은, 전후 상이 군인 같은 선수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야구팬은 왜 늘 화가 나 있을까’ 같은 불가사의한 명제에 ‘과학적으로’ 답하는 글도 재밌다. 저자는 영국 서식스대학의 경제학자 피터 돌턴이 축구 팬들을 상대로 한 연구 결과를 언급하며 스포츠 팬은 승리했을 때 평소보다 3.9점 더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패했을 때는 슬픔의 강도가 7.8점에 이른다고 적었다. 게다가 스포츠팬이 응원 팀에게 가지는 동질감은 ‘가족’ 수준이자, 심지어는 “자아의 연장선”이라고까지 말한다. 단순히 응원하는 팀을 넘어 가족, 더 나아가서는 나의 패배라고까지 느끼는 지경이라면 ‘화’는 숨 쉬듯 당연한 감정에 가깝다.
여기에 유튜버 문상훈이 얘기했던 ‘빡사분면’을 떠올리면, 화난 야구팬이 더욱 다층적으로 이해가 간다. ‘빡사분면’은 경기 승패와 함께 점수 차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야구팬이 처할 수 있는 네 가지 상황을 뜻한다. 그에 따르면 야구팬은 이겨도 화가 난다. 왜? 크게 이기면 크게 이겨서(다른 날에 좀 나눠서 치지), 점수 차가 적게 나는 ‘꾸역승’이면 ‘찝찝해서’(이럴 일이야?)다. 지면?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듯 야구팬은 정말 자주 화가 나는데, 여기에서의 ‘화’는 정말 ‘화’이기만 할까. 야구팬들이 말하는 ‘화’는 여러 레이어가 켜켜이 쌓인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은 ‘희로애락’의 범벅에 가까운 말일진대, 경기의 승패에 부닥쳐 일단은 앞서는 감정이 ‘화’이기 때문에 그것이 쉽게 야구팬 전체를 대표하는 단어로 도식화됐다고.
화가 날 만큼 감정이 요동친다는 것은 무언가(야구)에 깊이 몰입한 자만이, 누군가(응원 팀)에 강한 연대 의식을 느끼는 자만이 갖는 특권이기도 하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의지가지하는 준거집단은 많을수록 행복할 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빡사분면’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계속해서 야구를 본다.
이 외에도 책에서는 야구판에 빗댄 인생의 자세에 관한 서술이 눈에 띈다. 특히 야구 얘기가 아니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와닿는 잠언집이 될 공산이 크다. 저자는 묻는다. 본인이 타석에 선 타자라면, 어떻게 1루로 출루할 것이냐고. 내 타구의 궤적을 알아차린 상대의 수비 시프트에 맞서, 더 강하게 칠 것인지 아니면 반대쪽으로 번트를 댈 것인지. 당신이 투수라면 당신만의 스트라이크존은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인생은 열 번 중에 세 번만 쳐도 ‘잘한다’ 소리를 듣는 타자의 그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타자와의 승부에서 열 번 중 여덟 번은 이겨야 ‘A급’ 소리를 듣는 투수에 가까운지.
우리도 인생이라는 그라운드에 선 선수로서, 매 순간 나름의 결정을 내린다. 안 되면 타격폼도 바꿔 보고(타자), 안 쓰던 구종도 연마해 보고(투수), 무리하게 베이스도 훔쳐보고(주자), 가끔은 다이빙 캐치도 시도해 보면서(야수). 무엇이건 위험 부담이 따를 테지만,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인생이고, 푸른 잔디가 자라는 그라운드다. (번트로 1루에서 3루까지 두 베이스를 질주한 NC다이노스의 야수 최정원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안 뛰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이렇듯 논픽션이 만들어낸,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순간들을 ‘직관’하기 위해 우리는 야구장에 간다. ‘빡사분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한 달 새 200만여 명이 야구장을 찾았다.
이슬기 기자
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