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주 소설가의 책장
작가들은 평소 뭘 보고 듣고 읽을까? 언젠가 영감의 원천이 될지도 모를, 작가들의 요즘 보는 콘텐츠.
글ㆍ사진 이희주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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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평소 뭘 보고 듣고 읽을까?
언젠가 영감의 원천이 될지도 모를, 작가들의 요즘 보는 콘텐츠.
 



『파계』

마츠오 스즈키 글 / 야마모토 나오키 그림 / 김정규 역 | 길찾기


주인공 카즈시는 어린 시절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이 있었지만 티브이 생방송에서 실연에 실패한 뒤로 패배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언제나 우울한 서른한 살. 한 번 쓰러졌던 아버지 대신 빚더미에 앉은 공장을 운영하며, 손가락이 잘린 공장직원과 그에게 달라붙은 야쿠자에게 뜯기며 살아가는 그에게 제멋대로인 여자 미츠코가 나타난다.

결말에서 카즈시는 자신에게 사기를 친 미츠코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억눌려있던 초능력을  발휘해 미츠코의 수족인 야쿠자들을 모조리 죽인다. (이때 초능력에 조종당해 죽어가는 인물에게 “너 뭐 하는 거야. 이런데서 피투성이로 춤추면 안 되지. 그런 춤은 다른 사람 불안하게 만든다고.”라고 말하는 경찰의 대사가 압권이다.) 그렇게 카즈시는 피가 낭자한 광경 속에서 홀로 목욕을 하던 미츠코의 앞에 선다. 이런 상황에서 상상되는 건 네가 나를 가지고 놀았다며 분노하는 남자의 이미지다. (현실 속에서 그런 장면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러나 ‘당하는 존재’인 카즈시는 끝까지 당하는 존재의 품위를 지킨다. 그는 기어가서, 곤죽이 돼서 말한다. ‘죄송해요, 피투성이라.’ ‘저지르는 존재’인 미츠코는 답한다. ‘괜찮아. 그래도 돼.’

옛날 에로만화엔 이런 힘이 있었다.




『잠이 오나요』

이유리 저 | 위즈덤하우스


읽기의 목적을 공감에서 찾는 풍조를 달갑지 않게 여겼는데, 『브로콜리 펀치』의 두 주인공이 손이 브로콜리가 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악산에 오를 땐 솔직히 좀 좋았다. (나는 산을 좋아한다.) 『잠이 오나요』에선 왕방울이라는 악성고객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영업자들이 등장하고 피해자 중엔 강아지 미용 업체인 ‘멍이퐁퐁’ 언니도 있는데, ‘이퐁퐁’은 내가 십 년 가까이 쓰고 있는 닉네임이라서 또 좋아졌다. 그것이 추천의 이유는 아니고, 최근 내겐 누군가를 미워한 일이 있었다. 어떤 흥분 속에서 신나게 욕을 하다가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허망했다. 그리고 무서워졌다. 나는 잠을 잘 자고, 오히려 나쁜 일이 있으면 무섭게 자는데, 이 소설을 보고 나서 내가 종일 먹고 마시지도 않고 잔 것이 잠이 아닌 것 같고, 진짜 잠은 오지 않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 진짜로 자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고통은 어떻게 끊어내야 할까?



유튜브 캡처


영상

엔시티 위시(NCT WISH)


점프계열의 소년만화를 즐겨보던 여자들에겐 어느 날 내가 그들과 같은 필드 위에 설 수 없고 응원단(잘 쳐봐야 매니저)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때가 오는 듯한데, 개인적으론 그랬던 적이 없다. 오히려 여자였던 점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스킨을 뒤집어쓰는 일을 둘 다 가능케 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내리는 소나기를 맞고, 비를 피하러 들어간 버려진 차 안에서 신나게 음악을 듣고, 잠에 빠졌다가, 걷다가, 문득 바람이 채 간 모자를 줍기 위해 달리다가 꿈처럼 하늘로 붕 날아오르는 소년들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것은, 이 영상을 통해 ‘스킨을 뒤집어쓰는 일’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하늘을 날 수도 있는 가능세계는 내가 영원히 꿈꾸는 장소다. 육신은 착실히 나이 들어, 앞으론 징그러운 아줌마에서 징그러운 할머니가 될 일만 남았지만, 내 마음속의 소년은 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 같은 걸 보면 여전히 꿈 같다고, 놀랍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튜브 <雨は毛布のように> 캡처


음악 <雨は毛布のように(비는 담요같이)>

키린지(KIRINJI)


한동안은 침묵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입니다, 상태로 살다가 천천히 음악과 친해지는 중이다. 키린지는 가사가 좋기로 무척 유명하다. 흔히 시적이라고 생각되는 구절도 많지만, 이 노래의 ‘장난쳐도 돼? 화해하고 싶단 말이야’라는 부분에선 단순한 말이 아주 효과적일 때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bernardfaucon.fr 홈페이지 캡처


베르나르 포콩 <여름방학> 시리즈


곧 간행될 신작 장편의 표지 이미지가 이런 느낌이면 좋겠다며 편집자에게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을 보냈다. 국내에 번역출판된 사진집은 『사랑의 방』뿐이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건 마네킹과 인간소년을 섞어 유년기의 순간을 복원해 낸 <여름방학> 시리즈다. 강렬한 에너지와 불쾌함을 수반하는 에로티시즘이 매우 인상적으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리는 남자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그리는 남자의 차이 같은 것을 생각할 때 도움이 되는 텍스트 중 하나다. 이런 것들을 보고 모으며 이희주문학왕국의 건설 방향성을 혼자 세워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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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주

2016년 「환상통」으로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사랑의 세계』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