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 소비와 소유를 넘어 존재하는 법을 고민하는 이소연 에디터의 에세이.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잠시 쉽니다. 답이 늦어요. 인스타그램 프로필과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걸어둔 문구다. 무형의 세계에 접속해 있는 것이 오죽 당연하면, 그로부터 벗어나 있기 위해서는 호기로운 부재중 선언이 필요하다.
“이 언니 인스타그램 주소 뭐예요?”
“인스타 아이디 좀 제발 알려주실 분.”
“제발 브이로그 시작해 주세요.”
춤을 잘 추는 학생의 영상에도, 일상 영어 표현을 가르쳐 주는 영상에도, 매체 인터뷰에서 우연히 찍힌 한 시민 인터뷰 영상에도 댓글 창에서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묻는 댓글이 보인다. 아이디를 용케 찾은 누군가가 댓글로 아이디를 달아두면, 연신 하트와 대댓글 ‘고맙습니다’가 이어지며 해당 계정으로 사람들이 유입된다.
타인의 일상과 불필요할 정도로 가깝게 연결돼 있다. 누가 누구와 어디서 멋진 저녁을 먹었는지, 축하할 일과 위로할 일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일거수일투족 알 수 있다. 친구들과 아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도 안부를 물을 필요조차 없어졌다. 참, 네덜란드 다녀온 건 어땠어? 당신의 일상을 내가 관찰하고 있다는 그 당연한 전제는 어째서 지옥 같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일상을 관찰하고 삶을 소비한다. 나의 순간으로 채워가기도 모자란 일상에서, 누군가를 팔로우할 때마다 한 사람의 슬라이스 된 인생이 내 앞에 대령 된다. 어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라는 듯이. 하늘 아래 같은 색상 없다며 끝없이 펼쳐진 옷과 화장품을 소비하고 또 소비하던 우리는 이제 타인의 삶을 소비하기에 이르렀다.
소비는 ‘인간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돈이나 물자, 시간, 노력 따위를 들이거나 써서 없애는 것’을 뜻한다. 돈만 쓰는 게 아니라 시간을 쓴다. 써서 없앤다. 누구도 담보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시간’을, 돈처럼 다시 벌 수도 없는 그 시간을 써서 없앤다는 건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다.
두렵도록 한정된 시간이라는 자원 앞에서 ‘소비냐 존재냐’는 물음은 더욱 심오해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시간을 쓰며 타인의 삶을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시간을 쓰기만 할 것인가, 그 안에 진정한 내 모습으로 존재할 것인가. 그런데, 진정한 내 모습이 뭔데? 누워서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란 말이야?
아마 아닐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전신인 페이스북(현 메타)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는 서비스를 만들 때부터 한 사람의 개성은 면화나 황금만큼이나 상품 가치가 있는 것임을 철저하게 이해했고 이용했다. 우리가 일상을 공유하는 사진과 글에는 ‘콘텐츠’라는 이름이 붙어 그 반응 정도와 팔로워 수에 따라 ‘소비’의 대상이 되고 동시에 철저하게 돈으로 치환된다. 권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안에서는 진정한 자아를 오롯이 유지하는 것은, 아니 보호하는 것마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인생의 절단면만 모인 인스타그램에서는 이상 현상이 생겨난다. 엄지를 내리니 누군가 발리의 해변에서 사선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청초한 맨얼굴로 요가를 하고 있다. 와, 너무 예쁘다. 어쩜 승모근이 저렇게 하나도 없지. 하트를 분명 꾹 눌렀다. 그런데 며칠 후 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승모근이 왜 이렇게 솟아있지? 내가 운동을 잘못 하고 있나? 아무래도 요가를 다시 시작해 볼까.
한 엄지를 올리기도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한다. 이번엔 분명, 무해한 강아지다. 누군가 골든 리트리버와 전국 여행을 하며 옷이 더러워질 걱정일랑 접어둔 채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귀여워! 하트. 휴, 부럽네. 저게 삶이지. 까만 패딩이 드글드글 빈틈없이 꽉 들어찬 지옥철 9호선에 또 하나의 까만 패딩을 밀어 넣으며 아득바득 출근하는 것, 이건 삶이 아닐 거야. 어딘가로 떠나야 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올릴 만한’ 순간이 됐다. 서로가 서로를 가깝게 소비하는 사이, 우리는 저마다의 삶과 오히려 멀어졌다. 한참 몰두 중에 픽 꺼져 버려 갑작스레 마주한 텅 빈 검정색 화면처럼 삶은 공허하고 낯설어졌으며, 멋쩍은 마음에 괜히 스윽 쓸어 만지게 되는 밋밋하고 평평한 스마트폰 화면처럼 납작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영화관에서 보고 온 주인공의 삶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며 영화 티켓을 사는 정도로 나의 소비가 그치지 않고, 퇴근한 옆자리 동료의 저녁 메뉴와 초등학교 이후 본 적 없는 동창생의 아기 사진을 초 단위를 소비하게 되어버린 것은. 삶을 살아가며 존재하는 대신, 경탄의 대상으로 삼게 되어버린 것은. 그리고 나 자신마저 누군가에 소비될 존재로 내어주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무색무취의 가스 같다. 일상의 소소한 연결과 행복, 받아본 적 없는 스포트라이트… 그 모든 게 이 안에서라면 가능하다고 유혹하는 피드들이, 아니 무수히 많은 삶의 절단면이 내게 미치는 영향력이.
이소연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싼 가격에 ‘득템’하는 재미에 푹 빠져 기쁘나 슬프나 옷을 사다, 2019년부터 새 옷을 사지 않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미디어 스타트업 뉴닉에서 3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기후위기, 환경, 포스트팬데믹 뉴노멀에 대한 글을 썼다. 바닷속과 바닷가의 쓰레기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 코리아 활동가가 됐고, 스쿠버다이빙을 통해 바다 깊은 곳에 버려진 폐어구를 수거하는 정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생태전환 매거진 [바람과물]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릿터] [코스모폴리탄] [1.5도씨매거진] 등 다수의 매체에 기후위기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2019년 아산정책연구원 영펠로로 선발돼 워싱턴에서 미국의 분리배출 및 폐기물 정책 디자인을 연구했고, 2020년 제2회 아야프(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 리서처 펠로십)에서 국내 재활용 정책 및 현황을 연구했다. 그 밖에 스브스뉴스 「뉴띵」, 모비딕 「밀레니얼 연구소」, EBS FM 「전효성의 공존일기」, KBS 라디오 환경의 날 특집 같은 예능·교양 콘텐츠에 출연하거나 환경 교육 및 특강을 진행하는 등 일상적인 방식으로 기후위기, 그린워싱, 패스트패션의 허와 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cute001
2024.02.19
소비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한번 더 해보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던 세대에서
지금은 무엇을 소비하고 살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는 세대로 넘어간 듯 한 느낌이네요
지금 세대가 틀렸다기 보다는 지금 세대에 대한 이해와 함께보기(?)가 필요한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