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
골목마다 장미가 환한 계절이다. 어제는 수선 맡긴 옷을 찾으러 가려고 길을 나섰다가 담벼락 아래로 넘어온 장미 덤불 아래 한참 서 있었다. 길게 뻗어 나온 가지가 꽃송이를 매달고 늘어져 있어서 그 아래 서면 꼭 장미 꽃다발을 커다란 모자처럼 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유월에 들어서면서 만개한 꽃의 기세도 한풀 꺾여 바닥엔 꽃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아까워라. 들어줄 이도 없는데 동의를 구하듯 입 밖으로 말해본다.
골목을 지나 개천 산책로로 접어들면 토끼풀 꽃이 지천이다. 익히 보던 하얀 꽃들 사이로 웃자란 듯 삐죽 솟은 자주색 꽃이 궁금해 구글 렌즈로 검색해보니 '붉은토끼풀'이란 결과가 나온다. 궁금해한 것이 머쓱할 정도로 정직한 이름이다. 이 무렵엔 연례행사처럼 돌아오는 동네 경사도 있다. 어김없이 새끼 오리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매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장구치는 새끼 오리들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다. 작년 이맘때 폭우로 개천이 범람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가장 걱정한 것도 아마 새끼 오리들이었을 것이다. 못 본 새 사람들 키를 훌쩍 넘어서버린 수풀, 바람에 실려 오는 밤꽃 향기, 비 그친 하늘에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 망종의 풍경을 이루는 것들이다.
망종(芒種)은 '까끄라기(벼, 보리 따위의 깔끄러운 수염) 망' 자에 '씨 종' 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 그대로 수염 있는 곡식, 대표적으로 벼의 씨앗을 뿌리기에 좋은 때라는 뜻. 모내기를 일찍 끝낸 시골집에선 이제 들깨 모종 심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매화가 진 자리에 새파란 매실이 단단하게 익어갈 무렵이고, 곧 있으면 햇감자를 캘 시기가 다가오겠지. 그러고 나면 장마가 시작된다.
농부에 비하면 한량 같은 소리지만, 나도 망종 전후로 부쩍 바빠진다. 장마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챙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무엇이든 야외에서 하는 일이다. 친구와의 약속도, 일로 만나는 미팅도, 저녁 식사도, 주말의 할 일도 웬만하면 바깥을 누릴 수 있나 살핀다. 날씨와 계절에 진심인 사람에게 장마는 명확한 절취선이다. 대한민국의 여름을 모기가 있는 시기와 없는 시기로 나누는. 장마철 군데군데 생기는 물웅덩이는 장구벌레들의 서식지가 되고... (이하 생략) 습도 역시 마찬가지다. 잘 마른 볕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쾌적한 계절에서, 뜨거운 볕에 습한 바람이 부는 꿉꿉한 계절로 넘어가는 고개가 바로 장마다. 무더위가 '물더위'에서 'ㄹ' 끝소리가 탈락한 말이란 걸 아시는지. 습도와 온도가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이 땅에선 무더위라 부른다. 짝을 이루는 '불더위'는 불볕더위. 그러니까 몹시 더운데 '찜통' 안에 갇힌 것 같은 날은 무더위, '불가마' 속에 갇힌 것 같은 날은 불볕더위란 소리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습도 낮고 모기 없는 망종 무렵엔 무얼 해야 할까? 부지런히 바깥을 즐겨두면 된다. 할 일이라곤 그게 전부다. 실내에 있기보다 이왕이면 바깥을 누리기. 이 시기가 금방 끝난다는 걸 아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산책하기, 자전거 타기, 카페 테라스 앉기 등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혼자서 하고 함께 하면 더 즐거운 것은 함께 한다. "이번 주에 야장 가자", "주말에 캠핑 가자" 말하면 처음엔 시큰둥하거나 느긋한 반응들이다. 그럴 땐 불안 마케팅을 한다.
"모스키토가 창궐하기 전에 야장 가야 돼."
"습도 98%의 여름이 오고 있어. 꿉꿉해지기 전에 움직여야 돼."
그럼 다들 맞네!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따라나선다.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실은 5월에 접어들며 카페와 식당과 술집 등에서 폴딩 도어를 활짝 열고 바깥에 테이블을 내놓기 시작하면 틈틈이 체크해둔다. 올해 장마가 오기 전에 어디 어디에 꼭 들르고 싶은지. 오, 이 집은 근사한 느티나무 그늘이 있네. 저긴 2층 창가 자리가 한갓진 게 좋겠어. 이왕이면 코너 뷰에 앉아야겠군. 아, 여긴 음악이 최신 가요 TOP100만 아니면 다 좋은데... 진지하기론 자리 평론가가 따로 없다. 겨울에 창문을 닫아두고 있을 땐 감흥 없이 지나치던 가게들이 푸르른 나무 그늘 아래 멋진 야외 테이블을 가지고 있어 놀라기도 한다. 에어컨을 트는 계절이 오면 이제 저 창문들은 일제히 닫히고, 바깥 자리는 모기들한테나 맛집인 곳이 되겠지. 그러니 지도에 핀을 꽂고, 친구들을 유인할(?) 답사 사진을 남겨두고, 날씨 앱에서 길일을 살핀다. 부지런한 자만이 제철 행복을 얻는 법.
얼마 전엔 개천 옆 먹자골목에 자리를 찜해둔 뒤 퇴근하는 강을 그리로 유인한 적 있다. 남의 동네 빌라 사이에서 남의 동네 사람들을 구경하며 초여름의 정취를 즐기니 좋았다. 이사 온 아파트 단지에서 나름 야경이 보이는 명당을 알게 돼 밤 11시쯤 주머니에 캔 맥주를 하나씩 넣고 나가서 마시고 온 적도 있다.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낮술을 마신 날도 있고, 손님이 직접 따라 마시면 생맥주를 할인해주는 을지로 '수표교 호프'에서 야장도 즐겼다. 먹고 마시는 일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집에서 소파에 누워 있다가도 누구 한 명이 "산책?" 하면 거절 없이 일어난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가보면 반드시 좋은 계절이니까. 주말엔 무주영화제에 다녀왔다. 등나무 운동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밤늦도록 야외 상영해주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다음 주엔 도서관 강연을 가는 김에 그 고장에서 차박을 하고 올 예정이다. 트렁크 문을 열면 바다가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지. 일 년 중 가장 부지런하게 '바깥양반'이 되어 움직이는 망종.
참, 며칠 전엔 개천에 주차된 자전거를 살피다가 충동적으로 1년 정기 이용권을 끊었다. 전기 자전거인 줄 알고 결제했는데, 일반 자전거여서 다리 아프도록 페달을 밟아야 했지만. 별 수 없지, 더 힘차게 야외를 즐기는 수밖에. 망종엔 우리 모두 바깥 인간이 되자. 밖으로 나가 계절을 누리자. 잠시여서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변치 않는 제철 숙제니까.
망종 무렵의 제철 숙제 '장마가 오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 저마다 작성해보세요.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무엇이든 '바깥'을 즐길 수 있는 쪽으로. 모기가 창궐하기 전에, 찜통 속의 만두 처지가 되기 전에 이 쾌적한 기온과 습도를 즐겨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신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일상에 밑줄을 긋는 마음으로 자주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적는다. 일상을 사랑하기 위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기록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최선을 덜 하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 이 정도면 됐지, 그럴 수 있어.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런 말을 해 주려 노력한다. 너무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좋아하는 게 취미다. 오늘을 잘 기억하면, 내일을 기대하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으로 순간을 모은다. 언젠가 바닷가 근처 작은 숙소의 주인이 되는 게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