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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의 제철 숙제] 봄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1화 : 곡우엔 돌미나리전이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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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이면 돌미나리전을 먹는다. 그건 봄마다 친구를 떠올린다는 말.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평생 동안 미나리전 앞에서 친구를 떠올릴 것을 생각하면, 오래 전의 약속이 모양만 바뀐 채로 계속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2023.04.25)


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어떤 해에는 봄을 일찍 만나 늦게 헤어지고 싶어진다. 오래 기다려서 반갑게 재회한 친구처럼.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고 싶은 마음. 그럴 때면 바지런히 짐을 챙긴다. 3월 즈음 부산이나 남해로 벚꽃 마중을 나갔다가 4월 중순 무렵엔 북쪽으로 벚꽃 배웅을 떠나는 것이다. 서울의 벚꽃이 다 진 뒤에도 기온이 더디 오르는 북쪽 땅, 혹은 산속에는 벚꽃이 남아 낯선 이를 반겨준다. 아니 남아 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겠다. 그곳에선 그곳의 속도와 기온에 따라 제철을 맞이한 꽃들이 피고 있을 뿐이니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이른 봄에는 남으로, 늦봄에는 북으로 가는 게 봄꽃을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어디로 떠났건 벚꽃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북한강변에 앉아 돌미나리전을 먹는다. 때는 곡우 즈음. 봄철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는 이름도 정겹다. '봄비가 내려 모든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뜻. 올해는 양평에 있는 산장에서 마지막 벚꽃을 보며 며칠을 묵었고 마지막 날 밤부터 과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오전까지도 비가 이어지는 걸 보며 전집 바깥 자리엔 못 앉겠다 싶어 아쉬웠는데 정오가 지나며 날이 개기 시작했다. 서둘러 강변을 달려 이름도 정직한 '돌미나리집'에 도착했다.



반짝 해가 난 행운을 누리기 위해 등나무 아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웰컴 푸드'처럼 소쿠리에 돌미나리 한 줌이 담겨 나온다. 싱싱한 미나리 몇 줄기를 집어 돌돌 말아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향긋한 봄이 입안에 가득 찬다. 등나무에 벌써 연보라색 꽃이 피기 시작한 걸 발견하고 반가워 사진도 찍었다. 5월이 되면 구름처럼 환하게 핀 등나무 꽃에 시선이 붙들려 걷던 이도, 자전거 타던 이도 홀린 듯 이 집에 들어설 것이다. 꽃그늘 아래서 마시는 막걸리는 또 어찌나 단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실 때쯤 주문한 돌미나리전과 비빔국수가 나왔다. 바삭하게 익은 돌미나리전 가장자리를 떼어 한 입 먹는 순간엔 누구와 있든 동시에 눈을 맞추게 되어 있다. '맛있지 맛있지!', '맛있다 맛있어!' 무언의 감탄을 나누면서. 기름진 맛 뒤에는 매콤하고 새콤한 비빔국수 한 입.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기분이 좋아져 버리면 어쩔 수 없이 막걸리도 한 병 주문. 

달아오른 볼을 바람에 식히며 길 건너 북한강을 바라본다. 더 바랄 게 없어지는 봄날 오후다. 이 집의 주인은 풍류를 아는 이가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강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등나무 꽃그늘을 만들어 전과 막걸리를 팔 생각을 했을까. 저 산 좀 봐. 요즘의 연두는 어쩜 저런 빛깔일까. 등나무 꽃이 꼭 포도송이 같지. 나중에 주택에 살게 되면 복숭아나무랑 등나무는 꼭 심고 싶어. 봄마다 꽃 피는 순서대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봄은 시시각각 깊어져가고...



나는 당연한 수순처럼 오랜 친구를 떠올린다. 이 집을 처음 발견한 것도 그 친구와 함께였다. 십여 년 전 겨울에 남양주 트레킹 코스인 '다산길'을 함께 걸었던 게 시작이었다. 봄에 다시 오자 말하고서는 이듬해 봄 그 약속을 지켜 운길산에 같이 올랐다. 우리는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부러 산을 타는 사람들처럼 목을 바짝바짝 마르게 한 후 등산로 초입에 위치한 전집에서 시원한 생맥주에 미나리전을 먹었다. 부침가루의 흔적이 거의 없는 미나리전은 어찌나 바삭하고 향긋하던지 전을 부치는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놀랐더랬지. 그리고 봄마다 이렇게 같이 산을 오르고 미나리전을 먹자고 약속했던 것 같다. 말하는 순간엔 언제까지나 지켜질 것만 같았던 그런 약속들.

친구가 고향에 내려가게 되면서 이젠 멀어진 그 시절만큼이나 거리도 멀어졌다. 몇 해 전엔 친구의 고향집에 찾아가 하루 묵고 온 적 있다. 며칠 전부터 들판을 오가며 손수 돌미나리를 뜯었다는 친구는 옥상에 캠핑 의자를 펼치고 앉아 끊임없이 전을 부쳐 주었다. 고소한 파 기름에 돌미나리를 넉넉히 넣어 부친 그 전은... 내 생애 최고의 돌미나리전이었다. 앞으로도 그 이상의 돌미나리전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그 해, 그 봄, 그 밤, 모닥불과 보름달과 밤바람과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던 우리, 그 모든 게 어우러졌을 때만 가능했던 맛이니까. 한 시절 최고의 친구가 만들어주었던 한 시절 최고의 미나리전. 나는 그 밤에 액자를 두르고 그렇게 적어 마음의 빈 벽에 걸어둔다. 오래 오래 바라보고 싶어서.

그 시절 우리가 나눠가진 건 단순히 봄의 맛이 아니었다. 해도 해도 바닥나지 않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털어놓느라 문 닫은 카페 앞에서, 막차가 끊긴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이던 날들. 서로의 고민에 뾰족한 답을 내주지 못해도, 이런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탐탁지 않을 때에도 친구가 있어 괜찮았다. 이만큼 괜찮은 친구가 곁에 있는 딱 그만큼은 나도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것 같아서. 의지하며 한 시절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니 이 글은 나의 미나리 친구에게 부치는 늦은 봄 편지. 

매년 4월이면 돌미나리전을 먹는다. 그건 봄마다 친구를 떠올린다는 말.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평생 동안 미나리전 앞에서 친구를 떠올릴 것을 생각하면, 오래 전의 약속이 모양만 바뀐 채로 계속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봄 산을 같이 걷길 잘했지. 평상에 앉아 미나리전을 먹길 잘했지. 좋은 계절의 좋은 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을 줄여서 '우정'이라 부르는 건지도. 우리는 그렇게 잊지 못할 시절을 함께 보낸다. 서로에게, 잊지 못할 사람이 된다.



곡우 무렵의 제철 숙제

강 멍 또는 산 멍을 하며 제철을 맞은 돌미나리전을 먹습니다. 맛집에 찾아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봄의 운치를 즐기는 것도 좋고. 한 단에 2천 원 정도 하는 돌미나리를 사다가 집에서, 여행지 숙소에서 직접 부쳐 먹어도 좋겠죠. 사진 속 식당은 '돌미나리집'이라고 정직하게 검색하면 나옵니다. 곧 등나무 꽃이 만개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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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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