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이 남긴 암호 같은 한문 자료를 해독하는 기쁨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마음이 글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교감에 있다. 두 마음 빛이 번져 손잡으면, 오래전 이 세상에 살았던 작가는 여기의 독자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들려준다. 수백 수천 년을 머금은 고서 속 진심에 치열하게 귀 기울이는 독자에게, 작가는 수다쟁이가 되어 말을 걸어온다. 시간을 넘나드는 대화에 몰입하는 순간, 무릅써야 하는 장애물들은 잊히고 한문 공부의 즐거움만 남는다. 몇 겹의 우연과 운명이 쌓여 드디어 통하게 된 옛사람과는 이렇게 순식간에 벗이 된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최다정 작가님의 책 『한자 줍기』에서 일부를 읽어드렸습니다. '옛글을 탐구합니다', 최다정 작가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는데요. 작가님은 오래된 문헌을 발굴하고, 연구하다 보면 수백 수천 년 전의 어느 날을 살아갔던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기쁘고 슬펐다는 것을 감각할 수 있고, 그러면 순식간에 그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최다정 작가님을 모시고 옛 문자의 세계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인터뷰 - 최다정 편>
오은 : 스튜디오에 꽃을 가지고 오셨어요. 웬 꽃인가요, 작가님?
최다정 : 굉장히 떨리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데요. 떨리는 마음을 꽃을 안으면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우선 있었고요. 또, 오늘 처음 뵙는 자리여서 반가움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갖고 왔습니다. 실은 제 책의 북토크 날에도 오시는 분들이 그냥 그 밤에 돌아가시는 게 마음이 안 좋아서 참석하신 분들께 꽃을 한 송이씩 나눠드렸었어요. 저를 보려고 퇴근하시고 경복궁역까지 와 주신 게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오은 : 최근 SNS에 "새벽에 일어나면 시간부자가 된 기분이라 좋다. 기분도 종이도 창밖도 가장 맑은 아침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느끼는, 이런 종류의 안심(安心)을 좋아한다."라고 남기신 글을 봤어요. 심야형 인간으로서(웃음) 새벽형 인간을 만나게 되어 신기하기도 하고, 즐거운데요. 새벽에 일어나면 어떤 기쁨이 있나요?
최다정 : 새벽을 나타내는 한자 중 '새벽 효(曉)'자가 있거든요. '효'라는 글자에 뜻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가 새벽이고, 두 번째는 깨닫다, 깨우치다,라는 뜻이에요. 새벽은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적인 과도기이기도 하고요. 또 어두운 데서 밝은 이해의 과정으로 넘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한 거예요.
이런 뜻처럼 저도 새벽 시간에 놓이면 조금은 더 맑은 생각과 맑은 마음이 돼요. 그리고 '새벽'이라는 시간은 나만 깨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서요. 그때 한문이 쓰인 종이와 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 때문에 좋죠.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은, 하루의 문을 열기 전에 글과 오롯하게 함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은 : 최다정 작가님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자와 만주 문자를 단서로 삼아 옛날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너머에 있는 옛 문자의 세계를 동경한다.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연수 과정을 졸업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고전번역협동과정 박사 재학 중이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맞지만, 사실 그보다 좀 더 좋아하는 건 '공부가 펼쳐지는 장면' 쪽이다." 사실 작가님께서 하시는 학문이 사명감이 아니면 걷기 힘든 길일 것 같다고도 느껴지는데요. 이 공부의 필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다정 : 저는 한문학 공부가 과거를 해석해내는, 해독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과거를 해석해서 과거를 잘 알게 되는 것이 결국 지금 살아가는 저에 대해서 잘 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을 공부하면서 가장 피부로 느끼는 것은 몇 백 년 전에 살던 조선 문인들이 쓴 시나 수필 같은 것을 읽을 때예요. 옛날 사람도 나랑 똑같은 이유로 슬펐고, 나랑 똑같은 이유로 기뻤구나, 나처럼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면서 살았구나, 느끼게 되거든요. 그 점이 위안으로 다가왔어요. 마치 제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마음에도 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니까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일상적인 기록들이 한자라는 일종의 장벽에 가려진 거잖아요. 그 장벽을 누군가는 해독해서 지금의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요. 지금 제가 그런 일에 한 몫을 보태려고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은 : 책 『한자 줍기』가 어떤 책인지 직접 소개해 주시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책이죠?
최다정 : 그동안 한문 공부를 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글자들을 '한자 줍기'라는 이름을 붙인 수첩에 따로 모아왔어요. 그걸 저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좀 더 많은 분들께서 한자라는 문자가 어렵기만 한 글자가 아니라 다정한 글자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그동안 모아온 글자들과 그에 얽힌 저의 이야기를 풀어낸 책입니다.
오은 : 책에 담긴 54개의 한자어를 마주하면 원래 알고 있었던 단어도 있지만, 다르게 풀이 된 것도 마주할 수 있고, 처음 보는 것도 있어서 이렇게 내 삶의 저변이 확대되는구나 느끼게 돼요. 무엇보다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멋진 단어들일 텐데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번역할 번(飜)'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새가 날갯짓에 몸을 뒤집음'이라고 풀이하신 부분이에요. 읽는 순간 정말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어요. 지금까지 작가님께서 발견한 단어들 중 제일 좋아하는 글자가 있다면 뭔지 소개해주세요.
최다정 : 제일 좋아하는 하나를 꼽는 게 어려운 일이기는 한데요. 책에 소개하지 않은 글자 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글월 문(文)'자입니다. '문학'할 때 그 '문(文)'인데요. '문(文)'자가 처음에는 사람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에 중심 부분에 문신이 그려져 있는 형상에서 출발한 글자예요. 그래서 실은 문신의 이런 의미를 함께 갖고 있죠. 또 이 글자는 문자, 문학, 문화까지도 의미하는 단어예요.
저는 저마다의 개인들은 다 다른 빛깔과 무늬, 어쩌면 문신 같은 것을 새기고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 경우 저만 갖고 있는 무늬나 문양을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무늬를 얼룩처럼 여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얼룩처럼 단정하지 않은 모양의 것도 문장으로 표현하고 나면 안 좋아하던 얼룩도 아름다움을 갖춘 무늬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 과정 전체가 담긴 글자라서 이 글자를 자주 꺼내서 들여다 봅니다.
오은 : 봄이 됐어요. 봄에 어울리는 한자가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다정 : 지금 떠오르는 글자는 '평화(平和)'라는 단어입니다. '평평할 평(平)'자와 화목하다 할 때의 그 '화(和)'자인데요. 많이 알고 계신 것과 다르게 이 두 글자 모두 소리, 음악하고 관련이 있어요. '평(平)'은 악기 소리 같은 것이 공평하게 울려 퍼져서 공평하게 사람들의 귀에 닿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 '화(和)'도 서로 높낮이가 다른 음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음을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의미예요.
두 글자 모두 어떤 아름다운 것을 다투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골고루 나눠서 누리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이고요. 또, 그 단어들이 모여서 만든 평화라는 글자가 함의하는 것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청취자 분들께서도 그렇게 다투는 마음 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시기만 하는 평화로운 봄날이 되시길 바라면서 이 단어를 선물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은 : 이제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읽아웃> 청취자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소개해 주세요.
최다정 : 제가 추천해드리고 싶은 한 권의 책은 1700년대 조선에 살았던 '유득공'이라는 문인이 쓴 『고운당필기』라는 필기 수필집입니다. 이 수필집에는 굉장히 짤막한 글들이 담겼는데요. 제가 석사 논문을 쓸 때에는 이 책이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저는 원문 형태의 글을 한 자씩 번역하면서 내용을 파악했었어요. 다행히 지금은 번역이 되어 나와 있어서 독자 분들께서도 쉽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조선의 문인이 표현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워서요. 독자 분들께서 조선 시대와 당시의 사람들을 멀지 않게,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마음이 많이 담긴 책이라서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다정 한자와 만주 문자를 단서로 삼아 옛날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너머에 있는 옛 문자의 세계를 동경한다.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연수 과정을 졸업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고전번역협동과정 박사 재학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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