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돌보는 조연 - <더 웨일>
혈압 234, 몸무게 272kg, 울혈성 심부전으로 일주일 안에 죽을 것이 뻔한 남자를 간신히 진정시킨 뒤, 나는 그의 품에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한 통을 안겼다.
글ㆍ사진 김소미 <씨네21> 기자
202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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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더 웨일> 포스터

최근 나는 어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아닌 그 곁의 인물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게 됐다. 이 글은 스크린이 다 보여주지 않는 조연의 삶, 돌봄 노동 속에 있는 어떤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더 웨일>의 주인공은 이 영화로 재기에 성공해 23개에 달하는 미국 비평가협회상을 휩쓸고 있는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가 연기한 인물 '찰리'다. 딸을 버린 게이 아버지이자 파트너의 불행한 죽음이 남긴 상처로 무너진 그는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폭식을 지속하면서 어느새 울혈성 심부전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더 웨일>은 이토록 피학적인 자기 파괴의 충동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슬픔의 부작용임을 들려주는 영화다. 교회 대신 '에세이'를 믿는 그는 대학 온라인 강의를 통해 에세이 쓰기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쓰기'를 강조한다. 자기 삶과 입장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수필은 다수의 공감을 위해 마련된 두루뭉술하게 아름다운 글보다 훨씬 가치 있으며 그것은 때로 인간을 구원하기도 한다고, 그는 믿는다. 찰리는 특히 딸이 어린 시절에 쓴 『모비딕』 독후감을 자기 인생의 정전으로 여긴다.

『모비딕』에서 고래에 관해서만 한 챕터 내내 이야기하는 순간이 슬펐다, 그것이 자기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배려하는 작가의 제스쳐임을 알기에...

찰리가 좋아하는 문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영화가 시작한 직후 우리는 어느 퀴퀴한 주택 거실에서 심장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찰리를 본다. 그리고 때마침 찾아온 아시아계 여성 '리즈(홍 차우)'를 만난다. 인근 대학 병원의 간호사인 그는 빠르고 능숙하게 응급 처치를 한 뒤 병원행을 설득해보지만, 찰리는 병원비가 없다는 핑계로 내내 완강하다. 리즈는 혈압이 234까지 치솟은 그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고 이대로 지내면 주말 쯤엔 죽고 말 것이라고 허공에 대고 소리친다. 실로 <더 웨일>은 그 일주일에 관한 영화다. 오랜 설득과 실패에 이미 익숙한 듯 리즈는 곧 찰리가 종일 머무는 소파에 앉아 그에게 의지한다. 밤새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간호사의 피로가 그제야 몸을 휘감는다.

가족도 연인도 아닌 남자를 주기적으로 간병하는 간호사, 아이다호의 목사 집안에 입양된 아시아계 여성. 리즈는 누구일까?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사람의 강퍅한 얼굴을 한 리즈는 곧잘 찰리를 흘겨보거나 소리치곤 하지만, 찰리는 물론 관객조차도 리즈가 스크린에 머무는 순간만큼은 안심하게 된다. 그는 신의 구원을 주겠다는 선교사 토마스, 8년만의 재회해 아빠에게 과제 에세이 대필을 부탁하는 딸 엘리, 그런 딸에게 지쳐버린 모성을 토로하는 전 부인 등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인물들을 통틀어 유일한 '보호자'이다.

그렇다면 왜? 영화는 돌봄의 배경을 누설하기 전에,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들 관계의 속성을 담은 한순간에 관한 묘사로, 놀랍도록 다정하면서 서늘한 냉기가 감돈다. 심각한 심장 발작이 지나간 직후, 간신히 소강상태가 찾아오자 긴장이 풀린 찰리와 리즈가 소파에서 서로 몸을 기대고 있다. 텔레비전에선 두 사람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직전에 찾아온 죽음과의 사투가 무색한 안락의 시간, 남자는 갑자기 부탁이 생긴 듯 리즈를 부르는데, 리즈는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한 채 일부러 대꾸하지 않는다.


영화 <더 웨일> 스틸컷

리즈! 리즈! 리즈! 

찰리가 세 번째로 그 이름을 부르면, 리즈는 그제야 아주 무심한 동작으로 재빨리 몸을 일으켜 부엌에 간다. 리즈가 안아 드는 것은, 원통형 종이 팩이 넘치도록 수북하게 담긴 패스트푸드점의 치킨이다. 익숙한 건넴과 받음. 곧 찰리는 치킨 한 통을 먹어 치운다.

혈압 234, 몸무게 272kg, 울혈성 심부전으로 일주일 안에 죽을 것이 뻔한 남자를 간신히 진정시킨 뒤, 나는 그의 품에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한 통을 안겼다.

만약 이 영화가 간호사 리즈의 에세이를 다룬다면, 우리는 심심찮게 이런 구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리즈의 역할은 그를 살려내는 성실한 간호사이자, 그가 원하는 '치즈를 잔뜩 추가한 라지 사이즈의 미트볼 샌드위치'를 사 주는 어떤 동지로서의 인간이다.

슬픈 것은 정크 푸드를 먹는 이 장면에 실로 약간의 안식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기름이 뚝뚝 흐르는 치킨은 찰리의 죽음을 촉진시킬 지는 몰라도 그의 파괴적 자아를 잠시 달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건강하지 못한 협약 속에서 리즈는 찰리 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질문하자. 무엇이 이 관계를 지탱하는가. 이 때 모든 것을 이겨버리고 마는 것은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었다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대감이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찰리의 파트너는 퀴어라는 이유로 목사인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교단에서 쫓겨났다. 그는 신의 구원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식음을 전폐하고 자기 육체를 비우는 고난을 수행하다가 호수에 몸을 던졌다. 리즈는 그런 오빠의 시신을 직접 수습한 그의 여동생이다. 먹어선 안될 것을 계속 먹고, 또 먹이는 관계 속에서 둘은 해결되지 않는 슬픔과 애도를 끌어안은 채 공생한다. 자기 몸을 모욕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에세이스트로서의 소명만큼은 확고한 남자가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간호사로서 리즈가 믿는 가치와 상식은 너무도 손쉽게 무너진다. 나는 그것을 염려하게 되었다. 에세이가 찰리를 구원할 때, 리즈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웨일>은 찰리와 리즈 사이에 형성된 유일무이한 동질감이 시험에 처할 때까지 밀어붙인다. 찰리가 그동안 딸 엘리를 위해 착실히 저금했으며, 그 사실을 숨긴 채 가난을 핑계로 치료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리즈는 극도로 분노한다. 돈이 있었다면 붙잡을 수 있었던 치료의 여러 기회를 잘 아는 간호사로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오빠를 잃고 이제는 그의 연인의 죽음까지 앞둔 여자가 소리친다.

"물에 퉁퉁 불어 터진 시체를 처리한 사람도 나였어!"

하나였던 슬픔은 이제 두 개로 쪼개어져 대결한다. 이 순간, 브랜든 프레이저가 연기하는 외롭고 거대한 남성의 표상처럼 느껴졌던 '고래'는 다른 인물로 전환된다. 리즈를 중심으로 본다면 <더 웨일>은 이미 오래 전에 물 속에 잠긴 고래, 그 죽은 고래를 찾아 영원히 망망대해를 떠돌 작정인 여자가 쓰는 애도의 '모비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레퀴엠>보다도 더 실질적인 레퀴엠이기도 하다.

영화의 말미에 리즈는 이 영화의 중심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녀의 서사를 위해 문자 그대로 집 바깥으로 잠시 퇴장한다. 파괴, 구원, 화해 같은 거창한 시도들이 에세이를 매개로 이루어질 동안 그는 프레임 바깥에 서 있다. 그가 견딜 추위, 지난 야간 근무의 피로, 그리고 또다시 돌아가서 돌보아야 할 병원의 수 많은 환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찰리가 쓰러져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그는 일찌감치 스스로 예감한 대로 오빠에게 그랬듯 찰리의 시신도 수습해야만 할 것이다. 신 없는 구원에 대한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건조한 기도문 같은 영화 <더 웨일>에서 나는 구원 따위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는 한 여자에게 남아있는 그 무거운 일들에 대해서,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생의 무거움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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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예스24 # 김소미의혼자영화관에갔어 #더웨일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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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민

2023.02.27

김소미 기자님의 영화 평론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탄성과 공감, 언제나 기다리며 설렙니다. 좋은 글, 사유 하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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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